조지훈

덤프버전 :

분류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조지훈(동명이인) 문서
조지훈(동명이인)번 문단을
조지훈(동명이인)#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
[ 펼치기 · 접기 ]
1998년
1월
신윤복
2월
안향
3월
이상화
4월
석주명
5월
이익
6월
송흥록
7월
조철호
8월
윤봉춘
9월
한성준
10월
정태진
11월
최제우
12월
이순신
1999년
1월
이중섭
2월
혜초
3월
유형원
4월
최한기
5월
김창숙
6월
권율
7월
맹사성
8월
황현
9월
김시습
10월
최세진
11월
정부인 안동 장씨
12월
이승훈
2000년
1월
남궁억
2월
나혜석
3월
김육
4월
서경덕
5월
진감국사(혜소)
6월
하규일
7월
정인보
8월
김좌진
9월
김수영
10월
류희
11월
김창하
12월
장승업
2001년
1월
김부식
2월
최용신
3월
강항
4월
함석헌
5월
지눌
6월
이병기
7월
이현보
8월
오세창
9월
허균 · 허난설헌
10월
설총
11월
의천
12월
송만갑
2002년
1월
정약종
2월
김환기
3월
이상재
4월
박두성
5월
박수근
6월
조지훈
7월
성삼문
8월
박효관
9월
김병연
10월
신숙주
11월
김승호
12월
손진태
2003년
1월
안확
2월
양주동
3월
이동백
4월
양팽손
5월
정지용
6월
정몽주
7월
김장생
8월
박세당
9월
유정
10월
월명
11월
이인성
12월
유길준
2004년
1월
조희룡
2월
신흠
3월
이항로
4월
이경석
5월
의상
6월
백광홍
7월
이첨
8월
김창조
9월
조헌
10월
최항
11월
장욱진
12월
박두진
2005년
1월
정정열
2월
이예
3월
강경애
4월
신동엽
5월
임윤지당
6월
김종직
7월
강정일당
8월
이규보
9월
나철
10월
이승휴
11월
효명세자
12월
최북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파일:금관문화훈장 약장.png
금관문화훈장 수훈자

[ 펼치기 · 접기 ]
1974
조택원
무용가
1975
안수길
소설가
1976
홍종인
언론인
1977
최석채
언론인
1978
방정환
독립운동가, 아동문학가
1979
고유섭
미술사학자
1980
전봉초
음악가
1981
김소월
시인
1982
이효석
소설가
1982
조지훈
시인
1983
홍승연
언론인
1983
천관우
언론인
1983
이육사
독립운동가, 시인
1984
이원수
아동문학가
1984
장발
미술가
1985
강소천
아동문학가
1986
홍진기
언론인
1987
김남중
언론인
1990
모윤숙
시인
1990
주시경
독립운동가, 국어학자
1994
김상만
언론인
1994
나운영
음악가
1994
이숭녕
국어학자
1995
공병우
한글연구가
1995
김소희
국악인
1995
문신
미술가
1995
정명훈
음악가
1995
이대원
미술가
1995
류경채
미술가
1996
송석하
민속학자
1996
신용호
기업인
1996
조병화
시인
1997
신순남
미술가
1997
홍두표
언론인
1997
최창봉
언론인
1997
정진숙
출판인
1997
고병익
역사학자
1999
방일영
언론인
1999
방종현
국어학자
1999
김세형
음악가
1999
이유태
미술가
1999
김흥수
미술가
1999
장준하
독립운동가,언론인
1999
송건호
언론인
2000
황순원
소설가
2000
백남준
미술가
2000
서정주
시인
2001
김기창
미술가
2001
김천흥
국악인
2001
장우성
미술가
2001
김수영
시인
2001
최영희
역사학자
2002
임권택
영화감독
2002
오지호
미술가
2003
박동진
국악인
2003
윤석중
아동문학가
2004
구상
시인
2004
이혜구
음악사학자
2005
박성용
기업인
2005
정세영
기업인
2006
신상옥
영화감독
2006
김동원
연극인
2006
차범석
극작가
2006
조남철
바둑기사
2007
송도균
언론인
2007
노성대
언론인
2007
송범
무용가
2008
박경리
소설가
2008
이청준
소설가
2008
김영랑
시인
2009
유현목
영화감독
2010
전숙희
수필가
2010
앙드레 김
패션 디자이너
2010
김영환
군인, 6.25전쟁기 해인사 폭격명령 거부
2011
박완서
소설가
2012
지관
해인사 주지
2012
이건희
기업인
2012
허동수
기업인
2012
김형규
국어학자
2013
이우환
미술가
2014
호머 헐버트
선교사, 한글 체계화 공헌 및 한글 보급·한글 홍보 공로
2014
전형필
문화재수집가
2014
이은관
국악인
2016
백성희
연극인
2016
임영웅
연극인
2017
박맹호
출판인
2018
최인훈
작가
2018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2018
황병기
국악인
2020
서세옥
미술가
2019
김성환
시사만화가, 대표작《고바우 영감
2020
손창근
미술품소장가
2021
윤여정
영화배우
2021
이어령
문화부장관, 작가, 정치인 겸 문학평론가
2021
박서보
화가
2022
송기숙
작가
2022
송해
희극인
2022
이정재
배우
2022
황동혁
감독
2023
이미자
대중음악인
2023
조수미
성악가








파일:attachment/Jihun.jpg
성명
조동탁(趙東卓)
아호
지훈(芝薰)
본관
한양 조씨[1]
출생
1920년 12월 3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2]#
사망
1968년 5월 17일 (향년 47세)
서울특별시
학력
혜화전문학교[3] (졸업)
등단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상훈
금관문화훈장

1. 개요
2. 생애
3. 성향
4. 가족 내력
5. 작품
6. 여담



1. 개요[편집]


파일:attachment/Cheongrok.jpg
왼쪽부터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이 셋을 두고 청록파라 한다.

청록파 시인, 대학 교수, 한국학자.

본명은 '동탁(東卓)'으로, '지훈(芝薰)'은 그의 아호이다.

독립유공자 조승기(趙承基)의 6명의 증손자 중 한 명이기도 하며, 조태열주유엔대사가 그의 3남이다.

사촌여동생 조동원은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아내이다. 박준규 의장이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인척관계임을 생각하면 조지훈 집안은 혼맥을 통해 몇다리 건너 삼성그룹과도 연결되는 셈이다.

2. 생애[편집]


1920년 12월 3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조헌영과 어머니 전주 류씨 류노미(柳魯尾)(류진희(柳進熙)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했고 1939년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서 '고풍의상(古風衣裳)'이라는 시로 등단했다. 그 외의 작품으로는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 등이 있다.

1946년 박목월, 박두진과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를 민족 주체의 위기로 보고 민족 주체 의식의 확립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민족 전통을 연구하고 그것을 시로 써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서당 교육을 받았고 검정고시를 쳐서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 합격했으므로 일제식 교육을 일절 받지 않았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부터 사망시까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수 재직 당시 지은 고려대학교교가와 '호상비문', 이 호상비문에서 따온 민족의 아리아라는 응원가가 고대생들 사이에 사랑받고 있다. 1960년에는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제자들의 4.18 의거를 지켜보고는 같은 해 4월 20일에 지은「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라는 헌시(獻詩)를 고대신문에 투고하여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켰다.[4] 고려대 교정 내에 있는 4.18 기념비문도 그가 지었으며, 고려대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조론'이라는 수필을 통해 이승만 정권 및 정치인들의 지조없음을 꾸짖은 전례가 있을 정도로 대쪽같은 인물이었다. 후배 문인 중엔 대선배인 서정주보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민권 수호 국민 총연맹, 공명 선거 추진 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김수영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적이었다면 조지훈은 그 반대로 세속적인 이해와 타협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과거 조선 시대의 선비 정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68년 5월 17일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했으며 기관지 확장증 합병증으로 인해 만 47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여담으로 그를 디스했던 김수영 시인도 한달 뒤인 6월 16일, 46세의 나이로 교통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1982년 문화의 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3. 성향[편집]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지조론 중에서


그는 과거 같은 민족을 탄압했던 친일 세력이 광복이 되자 미국에 달라붙어 친미 세력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혐오했고 그 중심에 있던 이승만의 자유당을 뒤엎어버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4.19 혁명 때 앞장서서 학생 운동을 지지했고 학생이 앞장서 혁명의 선두가 되기를 요청했고 4.19 이후 권력 공백기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에 처음에는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 세력이 없던 박정희가 같은 일본 군인 출신들과 친일 자유당 인물들을 주축으로 공화당을 만들고 결정적으로 한일협정을 추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극명하게 비판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 학문에의 침잠을 방패 삼아 이 참혹한 민족적 현실에 눈감으려는 경향은 없는가? (중략)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여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우리는 민족의 지사, 구국의 투사로서 자임해야 할 시기가 왔다.”

-조지훈이 고대 신문에 기고한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중에서


정치적 성향 자체는 진보가 아니라 정통적인 보수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 때문에 김수영 시인에게 비판 당했다. 김일성 만세 참조. 신경림 시인에 의하면 생전의 지론이 '부도덕하고 경박한 진보주의자보다 도덕적이고 성실한 보수주의자가 역사에 더 많이 기여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정부와 대립하면서 강경하게 나가는 진보적 문인들에게도 한 소리 했다는 말도 있다. 종합적으로 개인적 정치 성향은 보수적이지만 그럼에도 당시 정권들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그정도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4. 가족 내력[편집]


조지훈 자신부터 명문가 출신이었다.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 마을에 종가가 있는데 상당한 명문가로 통한다. 또 한의학자 겸 제헌 국회 의원으로서 정치가였던 부친 조헌영6.25 전쟁 때 납북되고, 조부 조인석은 6.25 전쟁 때 좌익 청년들이 자신을 모욕하고 집안에서 난리를 치자 그 수치감에 자살해버렸다.

조지훈의 부친 조헌영은 한의사 출신이며, 남한 제헌의원으로서 한의학계에 남긴 업적이 엄청나다. 1950년 보건의료 행정법안의 제1장 총칙의 의료인 규정에 서양 의사 제도만 두고 한의사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앞장서서 폐지에 힘썼다. 북한에서도 최초로 동의학(남한의 한의학에 해당) 박사가 되었으며, 동의보감 국역을 주도하기도 하는 등 현재의 한의학이 있기까지 큰 공헌을 하였고, 북한 내에서도 여러 고위직책을 맡으며 대접받았다. 88세까지 살아 장수했는데 아들 조지훈보다 20년은 더 살았다.

조지훈의 아들 조태열외교부 차관을 역임하고 주UN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로 재임하기도 했다.


5. 작품[편집]


  • 풀잎 단장
  • 파초우
  • 주도 18단
  • 승무: 이 시에서 등장한 '나빌레라'라는 어구가 매우 유명하다. 나빌레라란 '나비 같구나'라는 뜻으로, '나비'에 '-ㄹ레라'가 붙어 만들어진 시어다.
  • 완화삼
  • 낙화
  • 호상비문[5]
  • 동물원의 오후
  • 고풍 의상 : 2018학년도 수능 6월 모의평가 국어 영역에 출제되었다.
  • 마음의 태양 :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라는 구절이 2020학년도 수능 9월 모의평가 필적확인란 문구로 나왔다.
  • 사모: H.O.T.의 4집에서 강타의 목소리로 낭독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3일에 나온 문어잡이 어부의 낭독으로도 유명하다
  • 멋 설
  • 석문(石門) : 민간설화를 바탕으로 지어진 시로, 동일한 설화를 바탕으로 지어진 다른 시는 서정주의 '신부' 가 있다.
  • 영양군민의 노래 : 조지훈 시인의 고향 영양군의 공식 군가(郡歌)이다. 작사를 맡았으며, 작곡은 조동건이 맡았다.
  • 산상의 노래: 2021학년도 수능 6월 모의평가 국어 영역에 출제되었다.
  • 현충일 노래
  • 마을: 제2회 MBC 대학가곡제(1982년)에서 연대 작곡과 2학년생인 박영주가 이 시에 곡을 쓰고 같은 대학 성악과 4학년생 강무림이 불러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 은익의 노래
  • 경기여자고등학교 교가 작사 작곡은 김순애
  • 경주고등학교 교가 작사[6]


6. 여담[편집]


  • 야사 중에는 매우 해괴한 장난을 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시전설들인 '교수의 독특한 시험문제' 중 '시험지를 날려서 멀리 날아가는 순서에 맞춰서 채점하기' 방식을 쓴 사람 중에 조지훈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아나키스트 독립 운동가인 박열과 약간 접점이 있다. 박열의 대역 사건 재판 당시 박열이 입은 조선 관복(사모관대)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조지훈의 아버지인 조헌영이다. 또한 조헌영은 북한에서 박열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하였다. 조지훈 본인도 '나의 시작(詩作) 노트'라는 수필에서 '박열이 입었던 관복을 집에서 어린 시절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회고하였다.

  • 바둑의 급수에 빗대어 술꾼의 등급을 매긴 주도 18단이란 글이 유명하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03:59:30에 나무위키 조지훈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양경공파-병참공파 27세 동(東)○ ○식(植) 항렬.[2] 인근의 도계리, 가곡리와 함께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 조헌영 전 국회의원, 역사학자 조동걸, 조근해 공군참모총장, 조운해 강북삼성병원장, 조태열 전 외교부 차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 특히 이 곳은 강원도 춘천시 서면(춘천),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과 더불어 작은 시골마을에서 박사를 많이 배출했다 하여 이른바 '국내 3대 박사마을'로 불린다.[3]동국대학교[4] 2000년대 초에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의 시비가 고려대 문과대학 부근에 설치되었으나, 반정부 시위를 옹호하는 해당 시의 내용이 학내에 비석으로 세우기에는 너무 과격하다고 본 것인지, 얼마 안 가 '승무'의 시비로 교체되었다.[5] 바로 그 유명한 민족의 아리아 원문 이다.[6] 작곡:윤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