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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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궁월군 (弓月君)
궁월왕 (弓月王)
생몰년도
미상
국적
백제 혹은 신라일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반도도래인으로 하타씨(秦氏)의 시조이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계 도래인으로 기록하고 있으나,실제 한 • 일 학계에서는 다른 기록을 종합해 보아 신라에서 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기록에서는 등장하지 않으며 일본 측의 기록에서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다른 기록인 《신찬성씨록》에는 중국 진시황의 3세손인 효무왕(孝武王)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후대에 와서는 부정되고 있으며, 오히려 신라계 도래인이라는 설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왜냐하면 궁월군(弓月君)이 백제에서 왜국에 도래했을 때, 진씨(秦氏)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으며 '하타'라는 성씨에서 후대에 한자로 秦氏를 사용했다는 점 때문이다. 신라의 문무왕릉비문에 신라 왕실의 선조로 '진백'(秦伯)을 언급했는데 그 이유는 《삼국지》 <동이전>에 한 노인이 신라인은 진나라에서 피난을 온 사람들이라고 말한 오류가 서술되었고, 이 기록에 따라 중국인들은 신라인들을 진나라의 후예로 믿고 있었으며, 이 잘못된 오류 서술이 수백년이 지나 신라에도 역수입되었고 그것이 일본에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하타씨가 신라계라는 것은 정설이 되었다. 여우 신사라는 별명과 무수히 늘어선 토리이들로 유명한 교토 이나리 신사는 하타씨의 씨족신을 모시고 산에서 제사를 지내던 것에서 비롯했는데 공식 홈페이지 설명에는 신라 출신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교토시 공식 홈페이지 역시 '하타'는 고대 한국어로 '바다'라는 뜻이며[1] 5세기 중반 신라에서 도래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중 3편인 -교토의 역사- 편에서도 하타씨가 신라에서 건너온 도래인이었음을 주장함과 동시에 그 이유에 대한 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2. 생애[편집]


일본서기》에 의하면 제15대 오진 덴노 치세인 283년[2] 120현(縣)의 인부들을 거느리고 왜국에 망명 시도를 했으나 신라의 방해를 받고 가라국에 강제로 체류하게 되었다. 왜국 측은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를 가라에 파견했으나 소쓰히코 또한 3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2년 뒤인 285년[3], 왜국은 헤구리노츠쿠노 스쿠네와 이쿠하노토다노 스쿠네를 가라국에 파견해서 체류하고 있었던 궁월군의 인부들과 소쓰히코를 데리고 왜국으로 귀환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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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일본어에서는 ハ행이 지금의 /h/ 발음이 아닌 /p/ 발음이었고 따라서 당시 '하타'의 발음은 '파타'에 가까웠다.[2] 이주갑인상을 적용하면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과 싸우는라 국력이 쇠락해져 있었던 백제 제17대 아신왕 치세 말기인 403년이다.[3] 이주갑인상으로는 405년, 이해에 백제 아신왕이 붕어했다.[4]일본서기》 기록에는 헤구리노쿠노 스쿠네와 이쿠하노토노다노 스쿠네에게 정예병을 주어 신라를 공격하도록 했고, 이들이 신라 국경에 이르자 놀란 신라 왕이 사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405년에 신라와 왜국 간의 충돌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교차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