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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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정치적 관점
4. 역사



1. 개요[편집]


도래인()은 직역하면 을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고대일본으로 이주하여 이전보다 진화된 문화, 사회, 정치 체제 등을 도입하였다고 평가받는다.


2. 상세[편집]


넓게는 각 시대를 통틀어 동아시아 대륙과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한 이들을 의미하고, 좁게는 기원후 3세기~7세기 사이에 일본열도로 이주한 이들을 의미한다.

광의적으로는 고조선 멸망, 신라의 삼국통일, 발해의 멸망,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등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지속적으로 이주한 이들을 포함한다.

협의적으로 '도래인' 또는 도래계 씨족이라는 표현은 청동기, 철기가 유입된 야요이 시대 사람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기보단, 일본에서 어느 정도 고대 국가 체제가 수립된 야마토 정권 수립 이후에 일본에 유입된 사람들을 말한다.[1]

도래인의 이주 규모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있지만, 대체로 이들이 가져온 농사 등의 농업 기술과 청동기철기 등의 금속 제련 기술, 그리고 기타 문물로 인해 조몬인도 덩달아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했다는 게 현 일본 학계의 주류 시각이다. 조몬 시대 일본 열도의 인구가 약 10만여 명으로 추정되는데, 도래인의 이주로 인해 조몬인의 생활도 매우 풍족해졌다고 한다.[2]

도래인과 조몬인혼혈이 현대 일본인의 직계 조상이라고 흔히 평가받는다. 일본의 역사는 규슈에서 세력을 키운 이들이, 동화되지 않은 조몬인들을 몰아내면서(흔히 쇼군이라 불리는 정이대장군의 원래 임무는 동쪽의 에미시들을 몰아내는 직책이었다) 홋카이도까지 세력을 키워나간 것이 주요 전개 과정 중 하나였다. 도래인 계통은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87~96.7%를 차지한다고 한다.[3]


3. 정치적 관점[편집]


日本と韓国との人々の間には,古くから深い交流があったことは,日本書紀などに詳しく記されています。韓国から移住した人々や,招へいされた人々によって,様々な文化や技術が伝えられました。宮内庁楽部の楽師の中には,当時の移住者の子孫で,代々楽師を務め,今も折々に雅楽を演奏している人があります。こうした文化や技術が,日本の人々の熱意と韓国の人々の友好的態度によって日本にもたらされたことは,幸いなことだったと思います。日本のその後の発展に,大きく寄与したことと思っています。私自身としては,桓武天皇の生母が百済の武寧王の子孫であると,続日本紀に記されていることに,韓国とのゆかりを感じています。武寧王は日本との関係が深く,この時以来,日本に五経博士が代々招へい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また,武寧王の子,聖明王は,日本に仏教を伝えたことで知られております。

しかし,残念なことに,韓国との交流は,このような交流ばかり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このことを,私どもは忘れてはならないと思います。

일본과 한국 사람들 사이에는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고 『일본서기』 등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과 초빙되어 온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문화와 기술이 전해졌습니다. 궁내청(宮內廳) 악부(樂部)의 악사들 중에는 당시에 이주해온 사람의 자손으로 대대로 악사 일에 종사하며 지금도 때때로 아악(雅楽, ががく)을 연주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와 기술이 일본 사람들의 열의와 한국 사람들의 우호적 태도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으로서는 간무 덴노(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일본과 관계가 깊었고, 이때 이래로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빙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과의 교류는 이러한 교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4]

. 이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平成 13년(서기 2001년) 12월 8일 제125대 일본 덴노 아키히토. 일본 궁내청의 공식기록 발췌.[5]


한일 공통으로 민족주의적 감정,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인해 다양한 논란의 인용 소재가 되고 있다. 일본 국어사전에서는 도래인을 고대에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절대다수였다.

세키네 히데유키 가천대 교수는 일본인의 기원이 '고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기조가 일본 학계에 있다며, 일본인의 기원의 다양한 갈래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도래인의 위상을 과소평가하거나 한반도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파된 것 정도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 몇몇 일본 학자는 도래인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시베리아, 만주, 중국 대륙 남부에서 바로 건너왔다고 본다는데, 왜곡된 형태로나마 한국인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피하고자 만들어낸 억지라고 보았고, 인류유전학적으로 도래인은 분명 '고대 한국인'이 맞다고 주장했다.[6]

세키네 교수는 일본 제국 시절 유리할 때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을 내세우고, "일본인은 조선을 조상의 나라로 생각했고,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였다."라고 했던 학자(도쿄제국대 인류학 주임교수 도리이 류조, 1919년)도 있었던 일본 학계가 패전 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특별한 민족론'을 내세우려 한반도와의 관계를 억지로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현 일본 학계가 한일 간 명백한 문화적 연속성이 있음은 알고 있으면서도 혈연 관계는 인정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7]

한편 고대 일본어, 한국어 연구의 권위자로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한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 교수 역시 양국 학계에 비슷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반도 일본어설에서는 한국어계의 조상(고조선, 부여 계열)이 만주와 한반도 북중부에 거주하다가 한반도 중남부로 남하하면서 그곳에 거주하던 일본어계의 조상이 일본 열도로 밀려난 것 아니냐는 가설을 제시한다. 일본으로 가지 않은 원주민들은 만주와 한반도 중북부에서 남하한 민족에 동화되었다고 본다. 그는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가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서 쓰였고, 고 일본어족 화자들이 남하하는 부여어족 계통의 집단에게 밀려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일본어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만약 보빈 교수 말마따나 일본인의 조상인 도래인이 한반도 중남부에서 건너왔다면 반대로 말하면, 한반도 중남부의 원주민은 일본인의 조상에 해당하는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조삼모사 수준의 뒤집기인데, 이렇게 설명하는 순간 대중의 반발을 산다. 그래서인지 반도 일본어설은 고대사 사서에서 계속 암시되는 한반도 남부와 일본의 관련성[8]에 관하여 설명 가능한 학설 중 하나이지만 은근히 관심을 못 받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갑론을박이 있는 가설의 영역이라 주류 학설로 인정받기엔 더 연구해야 될 부분이 많긴 하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도 한반도에서 도래인이 넘어왔다고 봤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야요이 일본은 한국에서 수백만의 이주자를 받아들였고 이들 이민자들은 야요이 전환기 무렵에 75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조몬인의 유전자를 압도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현대 일본인들은 지난 2000년간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수정, 발전시켜 온 한국인 이민자의 자손이라는 얘기이다.

총, 균, 쇠 - 재레드 다이아몬드



4. 역사[편집]


도래인은 농사 기술과 청동기, 철기, 스에키로 대표되는 도기 제작 기술, 말 사육, 치수(강의 범람, 간척 등) 기술, 방직 기술 등을 일본 열도에 전파하였으며, 완전히 자리 잡은 뒤로는 한반도에 있는 국가들(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중국 남조 국가(동진, 송, 제, 양, 진)들과 교류를 통해 한자유교, 불교, 건축기술 등도 도입했다.

도래인들의 주요 이주 시기는 대략 4단계로 구별된다.

1단계는 기원전 8C부터 이주한 집단이다. 인구 증가, 내부 갈등, 기온 하강 등의 부정적 압박을 받은 송국리 유형 문화 사람들(오늘날 김해)은 남강과 남해안을 지나 후쿠오카와 카라츠 연안 평야로 확산되었다. 그들과 토착 조몬인들과의 교배로 야요이인이 출현하였다. 일본 열도에 농법과 금속 제련 기술이 전수되었고 이를 계기로 석기 시대조몬 시대에서 청동기·철기 시대야요이 시대로 넘어갔다. 야요이인들은 현대 일본인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 다만 아직 통일된 왕권은 나타나지 않았고, 기원후 3세기까지는 첨단 기술의 흡수 목적으로 왜의 엘리트들(지방 호족)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가야, 백제, 마한에서 긍정적, 부정적 압박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서기 전 194년 고조선의 위만의 반란으로 위만조선이 들어섰을 때, 고조선의 준왕은 마한의 일부를 공격해 그 지역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무렵 청동기를 지닌 익산 지역의 사람들이 규슈 북부에 집단 이주하였다.

2단계는 4~5세기로 고분 시대이다. 당시 왜는 소국의 왕들을 비롯해 호족들이 영역의 경제 및 문화 발전과 정치지배력을 강화하던 시기였기에 도래인의 선진 기술이 요구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기원 후 4세기 초까지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한 땅에 세운 한 4군 중 낙랑과 대방을 통해 백제와 마한, 가야를 거쳐 청동거울, 금, 은을 비롯한 여러 중국 상품을 수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에 의한 한반도 내 중국 교역센터(낙랑) 소멸과 금관가야 무력화(농공구, 철제 무기)라는 위기가 있었고, 혼란스러운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열도에 새 터전을 마련하려는 한반도인들을 앞다투어 받아들이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진출한 도래인들은 규슈 북부, 오카야마, 오사카, 나라 일대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호족들을 도와 왜가 중앙집권 국가로 발돋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일본 천황가를 받들며 일본성씨를 추증받은 신라의 하타 씨족(3세기 무렵 도래, 씨족신인 이나리신이 유명)과 백제 아야 씨족이 일본으로 도래하여 선진 문물을 전파하였다.

3단계에는 5~6세기 긴키 일대에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던 시기다. 케이타이 덴노를 시작으로 하는 일본 황실이 이 때 성립되었는데 통일된 왕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래인들을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서 백제와 신라의 일부 귀족 씨족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반대로 일본 호족인 모노노베 씨족의 일부가 백제에 정착하는 등 인적인 교류가 활발했다. 다수의 백제계 도래인들은 오사카와 나라 일대에 정착하였다. 6세기에는 백제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 신라, 고구려와도 본격적인 교류를 이루게 되는데 5세기에 건너간 신라계 도래인은 이즈모국 지방을 중심으로 서북 일대에 자리잡았으며 고구려인들은 무사시국 인근의 동쪽 일대에 자리잡았다.

4단계는 7세기 말 삼국통일전쟁으로 백제고구려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일부 귀족들과 유민들이 망명하였다. 백제 귀족은 오미에 주로 정착했고 고구려 귀족들은 무사시에 정착했다. 야마토 조정이 668년 신라와 국교를 회복하면서 신라에서도 다시 이주하였다.

815년 헤이안 시대 초기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당시 교토, 나라, 오사카 등 긴키 일대의 1182개 씨족 중 30% 가량이 도래인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고분 시대까지의 도래인은 야마토 정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융화되어 야마토인이 되었지만, 이후에 유입된 기술자들과 권력자들은 조상의 정체성을 많이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헤이안 시대가 형성될 때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이런 도래인의 활발한 역사는 헤이안 시대신라구의 일본 침입, 일본의 고립주의 등이 겹쳐져 신라인(한반도인)의 이주가 중지되었다. 이후 에도 시대임진왜란으로 일본에 건너간 포로들이 형성한 마을로 일시적인 재현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자발적이라고 보긴 어려워서 묘하긴 하다.

일본 안에서는 과거에는 귀화인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는데 이는 제국주의 시대에 주로 쓰였지만, 덴노의 덕을 흠모해 귀순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 표현이었기에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비판이 있었고, 현대에는 교과서를 비롯해 일반적으로 중립적 의미인 도래인으로 바꿔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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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문에,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야요이 시대 뿐 아니라, 고훈 시대 때 대거 도래한 것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2] 특히 야마토 정권 수립 이후 유입된 하타씨 나 아야씨 같은 경우 대규모 호족 단위로 이주했는데, 이런 집단들은 양잠이나 주조 기술 뿐 아니라 토목, 관개 기술 등, 인구 펌핑 스타터팩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적게는 수천, 많아봐야 수 만에 불과해 동일본에 비해 열세였던 서일본의 인구가 도래인 유입 후 7세기에 이르러서는 도래인 혈통이 7 ~ 9할을 차지하는 1백만까지 늘어나게 되어 인구와 경제력, 기술력을 바탕으로 동쪽을 정벌한 끝에 열도의 주류 세력이 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일본인 혈통 대다수를 차지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도래계 씨족 상당수가 호족 지위를 유지하고 수도에서 중용되기까지 한 것도 바로 이것 때문.[3] 조몬인 혈통 비율 3.3% 3.3% (2020) 8% ~ 9.8% (2019) 9% ~ 13% (2019) (연구 모델을 조몬인과 야요이인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4] 통상적으로 임진왜란이나 일제 강점기와 같은 부정적인 관계를 돌려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5] 일본 궁내청 '天皇陛下お誕生日に際し(平成13年)' 출처.[6] #[7] #[8]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진무천황의 선조인 니니기가 한국을 언급한 점, 타카마가하라가 한국의 고령으로 지목되는 점, 스사노오가 신라에서 건너온 점, 가야 지명 중 일본어가 연상되는 지명, 백제와 일본의 긴밀한 관계, 호남과 가야 지역에 발견되는 전방후원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