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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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편집]


교동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1.1. 원삼국시대[편집]


마한의 국가 중 하나인 소석삭국이었다.


1.2. 삼국시대~남북국시대[편집]


원래 교동도의 지명은 대운도 또는 고림,달을신이라고도 불렸으나, 고구려강화도를 차지한후로 고목근현이었다.

신라가 강화도를 차지하고 나서 경덕왕대에 교동현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이 지명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1.3. 고려시대[편집]


수도 개경과 가까워, 국제교역의 중간 기척지 역할을 하였다. 한편 한강과 임진강 하구가 만나는 지점을 감제하는 요충지여서 항상 정예병력이 상주하고 있고, 수도와 가까워 감시가 용이한 점 때문에 왕과 왕족의 유배지이기도 하였다.


1.4. 조선시대[편집]


고려시대부터 수도와 가까워 강화도와 함께 왕과 왕족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연산군, 광해군이 있으며 연산군은 여기서 죽었다. 전략적 요충지로 이용되어 경기수영 예하 함선과 병력이 항시 주둔하고 있었으며, 인조 시대에는 경기, 황해, 충청의 수영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되기도 했다.[1]

1.5. 근대 ~ 현대[편집]


일제강점기 부군면 통폐합 정책에 따라 교동군이 강화군에 통합되었다.

6.25 전쟁 이후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섬 북쪽을 따라 흐르는 한강은 대한민국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중립수역이 되었고 전쟁 이전까지 대한민국령이었던 연백군 출신 실향민들이 고향이 가까이 보이는 교동도에 많이 정착하기도 했다. 2010년대에 교동대교가 개통되어 강화버스 18번과 자동차로 교동도를 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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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존에 삼도수군통제사의 지휘에 들어가지 않는 경기, 황해, 평안 수영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라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수영 항목에서 보듯이 삼도수군통어영은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을 지휘했다. 충청 수군은 대일 작전에선 삼도수군통제영의 지휘를 받았고, 대중 작전에선 삼도수군통어영의 지휘를 받았다. 평안도에는 수영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평안도 관찰사가 평안수사를 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