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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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대랑
公孫大娘

파일:공손대랑.jpg
출신 국가
당나라
활동 시대
개원성세(開元盛世)
성씨
공손(公孫)
이름
불명
생몰년
미상
제자
이십이랑(李十二娘)

1. 개요
2. 생애
3. 공손대랑 제자의 검무를 보고 노래하며
3.1. 두보의 시
4. 공손대랑에 대한 평가
5. 제자 이십이랑(李十二娘)
6. 이야깃거리
7.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昔有佳人公孫氏(석 유 가 인 공 손 씨 옛날에 미인 공손씨가 있었으니

一舞劍器動四方(일 무 검 기 동 사 방 한 번 검무를 추면 세상을 뒤흔들었고

觀者如山色沮喪(관 자 여 산 색 저 상 산처럼 많던 관중들은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으며

天地為之久低昂(천 지 위 지 구 저 앙 천지는 그녀의 자태에 오래도록 출렁였다.

두보(杜甫), 「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공손대랑 제자의 검무를 보고 노래하며


公孫大娘

현종 시대의 유명한 무희. 검무(劍舞)와 기예(技藝)가 정점에 달해 한번 칼춤을 추면 만인이 요동쳤다고 전해진다.

공손대랑의 이야기는 동시대의 시인 두보를 통해 후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1]의 64수에 공손대랑에 관한 시가 나온다.


2. 생애[편집]


時有公孫大娘者 善劍舞 能爲鄰里曲及裵將軍滿堂勢 西河劍器渾脫 舞藝姸妙 皆冠絶於時

그 시절 공손대랑은 칼춤 실력이 뛰어나 향리곡(鄕里曲), 배장군만당세(裵將軍滿堂勢), 서하검기혼탈(西河劍器渾脫)을 잘 추었는데 춤추는 기예가 아름답고 묘해 모두 이 시대의 으뜸이었다.

《명황잡록(明皇雜錄)》


두보 이외에도 같은 시대의 여러 인물들이 공손대랑의 검무를 증언했기에 실존했던 인물임은 확실하나 따로 열전이 남거나 후손들에 의해 기록이 남은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생몰년과 삶의 모습들은 현대에 이르러선 거의 알 수가 없게 됐다.

두보가 개원 3년(715) 어린 시절에 공손대랑의 춤을 실제로 보았으므로 최소한 700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다. 또한 늦게나마 제자를 두어 가르침을 전했다는 일화로 보아 740~750년까지는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공손대랑은 두보가 어렸을 적부터 가희(佳姬)로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절세의 미모뿐만 아니라 칼춤 실력도 무척 뛰어났기 때문에 춤을 추면 관중들이 길을 막고 거리가 크게 붐볐다고. 한번은 거리에서 검무를 추자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살펴본 적이 있는데, 이때 공손대랑의 유려한 검무에 깊이 매료된 관리가 춤이 끝나자 공손씨를 궁궐로 초청하여 공연해주길 부탁했다.

공손대랑은 관리의 요청에 응했다. 그리하여 궁에서 황제를 위해 공연을 펼치니 황제당궁 최고의 무희라며 끝없이 칭찬했고, 아무도 공손대랑을 업신여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전통 검무를 계승해서 《서하검기(西河剑器)》, 《검기혼탈(剑器浑脱)》 등 다양하고 새로운 춤을 만들었고 후대의 검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공손대랑은 손안에 주어진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강과 호숫가에 숨어 평범하게 살다가 평온하게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죽기 전에 제자를 얻어 자신이 평생에 걸쳐 갈고닦은 기예(技藝)를 물려주니, 그 제자의 이름이 바로 두보의 시에도 등장하는 이십이랑(李十二娘)이다.


3. 공손대랑 제자의 검무를 보고 노래하며[편집]


「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공손대랑 제자의 검무를 보고 노래하며
大歷二年十月十九日(대력 2년 10월 19일)
대력(大曆) 2년(767) 10월 19일
夔府別駕元持宅(기부별가원지댁) 見臨潁(견림영)
기주부(夔州府)에서 별가(別駕)를 맡고 있던 원지(元持)댁에서 임영 땅 사람인(臨潁人)
李十二娘舞劍器(이십이랑무검기) 壯其蔚跂(장기울기)
이십이랑(李十二娘)의 검무를 보고 그 빛나고 호탕한 모습이 훌륭하다고 생각해
問其所師(문기소사) 曰(왈)余公孫大娘弟子也(여공손대랑제자야)
그 스승을 물으니 "저는 공손대랑의 제자입니다."라고 하였다.
開元三載(개원삼재) 余尚童稚(여상동치)
개원 3년(715) 내가 아직 어렸을 때
記于郾城觀公孫氏舞(기우언성관공손씨무) 劍器渾脫(검기혼탈)
언성(郾城)에서 공손씨가 검기혼탈무를 추는 걸 본 기억이 있는데
瀏灕頓挫(유라돈좌) 獨出冠時(독출관시)
활발한 춤은 변화가 끝이 없어 당시에 홀로 으뜸이었다
自高頭宜春梨園二伎坊內人(자고두의춘리원이기방나인)
황제 앞에서 춤추던 의춘원(宜春園)[2]ㆍ이원(梨園)[3] 교방(敎坊)[4] 나인에서부터
洎外供奉(계외공봉) 曉是舞者(효시무자)
외공봉(外供奉)[5]에 이르기까지
聖文神武皇帝初(성문신무황제초) 公孫一人而已(공손일인이이)
이 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현종 초까지 공손씨 한 사람뿐이었다.
玉貌錦衣(옥모금의) 況余白首(황여백수)
그때의 공손씨는 비단 옷에 옥 같은 용모였지만 지금의 나는 백발이 무성하고
今茲弟子亦匪盛顏(금자제자역비성안)
지금의 공손씨 제자 역시 더 이상 한창 때의 푸른 얼굴이 아니다.
既辨其由來(기변기유래) 知波瀾莫二(지파란막이)
이 제자의 유래를 알고 나니 그 변화 가득한 춤이 스승의 춤과 다르지 않음을 알겠다.
撫事慷慨(무사강개) 聊為劍器行(요위검기행)
과거를 떠올리고는 감개무량하여 〈검기행〉을 쓴다.
昔者吳人張旭善草書書帖(석자오인장욱선초서서첩)
예전에 오나라 사람(吳人) 장욱이 명필로 서예가 뛰어났는데
數嘗於鄴縣見公孫大娘舞西河劍器(수상어업현견공손대랑무서하검기)
자주 업현(鄴縣)에서 공손대랑이 서하검기무(西河劍器舞)를 추는 것을 보았다.
自此草書長進(자차초서장진) 豪蕩感激(호탕감격)
이로 인해 서체가 크게 진척되어 호방하고 격탕(激蕩)하게 되었으니
即公孫可知矣(즉공손가지의)
공손씨의 춤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3.1. 두보의 시[편집]


昔有佳人公孫氏(석유가인공손씨) 一舞劍器動四方(일무검기동사방)
옛날에 미인 공손씨가 있었으니 한 번 검무를 추면 세상을 뒤흔들었고
觀者如山色沮喪(관자여산색저상) 天地為之久低昂(천지위지구저앙)
산처럼 많던 구경꾼들은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으며 천지는 그녀의 자태에 오래도록 출렁였다.
霍如羿射九日落(곽여예사구일락) 矯如群帝驂龍翔(교여군제참룡상)
빛나기는 예(羿)가 아홉 해를 쏘아 떨어뜨리는듯 했고[6] 힘차기는 여러 천제가 용을 타고 날 듯했으며
來如雷霆收震怒(내여뇌정수진노) 罷如江海凝青光(파여강해응청광)
나올 때는 천둥소리가 진노를 거둬들이듯 했고 물러날 때는 강과 바다에 맑은 빛이 서리는 듯했다.
絳脣珠袖兩寂寞(강순주수량적막) 晚有弟子傳芬芳(만유제자전분방)
붉은 입술의 아름다운 얼굴과 주옥 같이 화려한 소매 모두 없어져 적막해졌으나 늦게 둔 제자가 그 아름다움을 전하여
臨潁美人在白帝(임영미인재백제) 妙舞此曲神揚揚(묘무차곡신양양)
임영(臨潁) 출신의 아리따운 제자가 백제성에서 이 곡을 절묘하게 춤추니 뛰어난 풍채는 한껏 너울거리네.
與余問答既有已(여여문답기유이) 感時撫事增惋傷(감시무사증완상)
그 제자에게 묻고 답해 보니 이미 인연이 있었구나. 그 시절을 느끼며 옛 일 더듬어보니 서글픔만 밀려온다.
先帝侍女八千人(선제시녀팔천인) 公孫舞劍初第一(공손무검초제일)
선제(先帝)의 궁녀 팔천 명 중에 공손씨 검무가 제일 뛰어났는데
五十年間似反掌(오십년간사반장) 風塵澒洞昏王室(풍진홍동혼왕실)
오십 년 세월이 손바닥 뒤집듯 빨리 흘러갔고 끝없는 바람과 먼지는 황실을 어둡게 하였기에
梨園子弟散如煙(이원자제산여연) 女樂餘姿映寒日(여악여자영한일)
이원의 자제들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춤추는 가희의 모습엔 차가운 햇살만 비치네.
金粟堆前木已拱(금속퇴전목이공) 瞿塘石城草蕭瑟(구당석성초소슬)
금속산의 당현종 황제 무덤 앞의 나무는 이미 한 아름이나 됐고 백제성의 구당협 바위성곽엔 풀들만 쓸쓸히 자라네.
玳筵急管曲復終(대연급관곡부종) 樂極哀來月東出(낙극애래월동출)
화려한 술자리와 피리소리 곡조마저 끝나니 즐거움은 다하였고 동쪽에선 달이 뜨니 서글픔이 묻어오네.
老夫不知其所往(노부부지기소왕) 足繭荒山轉愁疾(족견황산전수질)
이 늙은이는 갈 곳도 모른 채 거친 산을 뒹굴다 보니 굳은살이 생기고 근심도 병처럼 생겨나네.

동서고금 최고의 시인 두보가 말년에 공손대랑의 제자를 만나 영감을 얻어 남긴 이 시는 대력(大曆) 2년(767년) 두보의 나이 55세 때 지은 작품이다.[7] 작시된 767년은 개원지치의 태평성대를 지나 안사의 난이 일어난 이후 당나라 황실이 쇠락해가던 시기로 두보가 관직을 내려놓고 오랜 기간 지방을 떠돌아 다닐 때였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힘든 나날을 보내던 두보는 공손대랑의 제자로서 스승의 검법과 아름다움을 이어받은 이십이랑(李十二娘)의 검무를 보았다. 두보가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다 공손대랑의 춤추는 자태를 떠올리고 당 현종 때의 성세와 늙고 병든 자신의 노년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 바로 위의 시다.[8]

전체적인 시의 내용은 언뜻 보기엔 활기차 보이면서도 우울하며 다소 비극적인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공손대랑의 아름다움과 찬란했던 당현종의 시대가 손바닥 뒤집듯 빠르게 지나갔으니 이제 황량한 세상을 늙은 몸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내용이 시를 꿰뚫는 주제로 이는 시인 두보의 파란만장했던 인생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4. 공손대랑에 대한 평가[편집]


昔有佳人公孫氏 옛날에 미인 공손씨가 있었으니

一舞劍器動四方 한 번 검무를 추면 세상을 뒤흔들었고

觀者如山色沮喪 산처럼 많던 구경꾼들은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으며

天地為之久低昂 천지는 그녀의 자태에 오래도록 출렁였다.

두보 《관공손대랑제자무검기행병서(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公孫劍伎方神奇 공손대랑의 검술은 실로 대단하니 귀신의 경지로다.

정우 《진양문시(津陽門詩)》


有公孫大娘舞劍 검무를 잘 추는 공손씨란 인물이 있었는데

當時號為雄妙 당시 그녀는 말할 수 없을 만치 빼어나고 훌륭했다.

《명황잡록(明皇雜錄)》



5. 제자 이십이랑(李十二娘)[편집]


李十二娘舞劍器(이십이랑무검기) 壯其蔚跂(장기울기)

이십이랑(李十二娘)의 검기무를 보고 그 빛나고 호탕한 모습이 훌륭하다고 생각해

問其所師(문기소사) 曰(왈)余公孫大娘弟子也(여공손대랑제자야)

그 스승을 물으니 "저는 공손대랑의 제자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손대랑 제자의 검무를 보고 노래하며(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두보가 공손대랑에 대한 시를 남기게 해준 일등공신으로, 이십이랑이 백제성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고 감명받은 두보가 이십이랑에게 스승의 이름을 물으니 스스로 공손대랑의 제자라고 밝혀 「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의 제목을 장식했다.

공손대랑을 연상시킬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지닌 인물로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그 기술과 재주를 물려받아 후세에 스승을 널리 알렸으니 뛰어난 예인(藝人)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두보가 이십이랑과 만난 일화를 병서로 남기며 적은 묘사를 보면 767년에 만났을 때 한창 아리따울 시기의 얼굴이 아니라고 평했으므로, 두보보단 어리지만 그 시기에도 제법 나이가 들었던 모양.


6. 이야깃거리[편집]


  • 과거부터 검무의 정점에 다다른 가희로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구운몽》 등 고전소설에선 검무가 뛰어나거나 무예가 보통이 아닌 여인을 묘사할 때 곧잘 "그 옛날 공손대랑을 떠올리게 한다."라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 당나라의 서예가 장욱(張旭)은 공손대랑의 《서하검기(西河劍器)》를 보고 큰 깨달음을 얻어 독특한 초서 서체를 터득했다고 한다.

  • 최후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민간에선 공손대랑이 끝없이 기예를 단련하다가 불로불사의 경지에 올라 선인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도 전해내려 온다.


7. 미디어 믹스[편집]


  • 한국의 웹소설 전생검신에서 대랑시대를 수놓은 인물이자 무신백좌(武神百座)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공손대랑(전생검신) 문서 참고.

  • 중국의 고전신화와 역사적 인물들을 모티브로 삼아 작품을 그리는 대만의 상업지 작가 흑청낭군의 '영세유전'에선 영세의 삶을 살아가는 무희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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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양 최고의 시집으로 청나라의 손수(孫洙)가 학문을 처음 배우는 이들의 시가(詩歌) 학습을 위해 편찬한 저명한 서적이다.[2] 의춘원(宜春園)은 당 현종 때 가무(歌舞)에 종사하는 궁녀들이 있던 곳이다.[3] 현종이 직접 재인(才人)들을 가르치던 곳은 이원(梨園)이라 하고 여기에 속한 예인(藝人)들을 이원제자(梨園弟子)라 하였다.[4] 노래와 춤을 가르치던 곳이다.[5] 궁전 밖에 살면서 일이 있을 때마다 궁전에 들어와 재주를 보여줬던 남녀 예인(藝人)들을 말한다.[6] 고대 중국사 전설의 군주인 요(堯)임금 시절 하늘에 태양 10개가 한꺼번에 떠서 농작물과 나무가 모두 타들어갔는데, 요임금은 활의 명수인 예(羿)를 보내 태양을 활로 쏴 떨어뜨리게 했고 9개의 태양을 맞추고 떨어트려 오직 한 개의 태양만 남았다고 한다.[7] 여담으로 두보는 이 시를 지은 후 3년 뒤에 향년 58세로 사망했다.[8] 공손대랑이 주인공인 시에 걸맞지 않게 당 현종이 2번이나 언급되고, 끝 마무리를 공손대랑이나 제자인 이십이랑이 아닌 두보 자신의 노년기 이야기로 마친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