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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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보
高麗時報

국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령 조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창간
1933년 4월 15일
폐간
1941년 4월 16일
복간 및 재폐간
1945년 ~ 1950년
설립 및 운영자
공진항, 김학형, 김재은, 고한승, 이선근, 김영의
박일봉, 김구[A], 김병하, 마태영, 박재청
상장여부
상장기업
종류
지방신문


파일:고려시보.jpg

《고려시보》의 영인본, 영인초고, 원본, 발췌본[1]

1. 개요
2. 역사
3. 고려시보 유물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중후반과 대한민국 초기에 발간한 경기도 개성시지방신문. 개성의 사회상과 현안을 다루었다. 개성의 지역신문이었으나, 개성 외에 황해도까지도 보급 대상 지역으로 삼았다. 이름은 개성을 수도로 삼았던 국가 고려에서 따왔다.


2. 역사[편집]


1933년 4월 15일에 경기도 개성부에서 창간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동인제(同人制)로 운영했다. 동인제는 모든 운영진이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지는 방식을 말하는데, 당시 동인이었던 사람들은 공진항, 김학형, 김재은, 고한승, 이선근, 김영의, 박일봉, 김구[A], 김병하, 마태영, 박재청 등 10명이었다.

설립 2년 뒤인 1935년 6월에는 주식회사로 체제를 전환했다. 이 때 발기인은 34명이었는데, 개성 출신 유지들을 비롯하여 여운형 등 유명인사들도 이름을 올렸다.

조선총독부의 언론통폐합 정책으로 1941년 4월 16일에 강제 폐간당했다. 1945년에 광복이 되면서 바로 복간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3. 고려시보 유물[편집]


《고려시보》는 현재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6.25 전쟁 때 대부분이 불타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소수는 남아있는데 남게 된 과정도 매우 극적이다.

6.25 전쟁이 끝난 후 개성 출신 기업인 김용남이 서울 근교의 인삼밭을 지나가던 중에, 우연히 한 인부가 집에서 아궁이 불을 피우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때 불쏘시개로 사용한 종이가 눈에 띄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로 《고려시보》였던 것. 김용남은 이를 보고 귀중한 개성의 자료가 사라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여 인부에게 큰 돈을 주고 그나마 남아있던 《고려시보》 신문지들을 매입했다고 한다. 김용남은 사들인 신문들을 개성시민회에 기증했고, 이후 개성시민회에서 계속 보관했다.

그러다 2018년 3월에 박광현 개성시민회 및 (주)제일향역 회장과 그의 아들 박수종 경희대학교 우주과학과 교수가 《고려시보》와 관련한 유물 4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유물은 《고려시보》 원본을 비롯하여 《고려시보》의 주필이었던 박재청이 집필한 문학 작품들을 따로 뽑아내어 펴낸 《고려시보 발췌》 및 《고려시보》 영인본, 《고려시보》 영인 초고 등이다. 참고로 기증자 박광현 - 박수종 부자는 각각 박재청의 아들과 손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기증받은 자료를 데이터화시켜 2024-04-28 13:54:01 현재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를 통해 공개했다. 누구나 무료로 읽을 수 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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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B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와는 동명이인.[1] 사진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