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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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경성축구단은 1933년 5월 11일 경기도 경성부를 연고로 하여 창단한 축구단이다. 홈구장은 서울운동장이었다.
2. 역사[편집]
1917년에 창단한 불교청년회 축구단이 잠시 해단하다가 1925년 조선축구단으로 재창단했고 조선축구단에서 일부 선수들과 운영진들이 나와서 같은 서울의 라이벌 경성축구단으로 합류했다.
1929년, 조선일보는 경성과 평양의 도시 대항전인 경평대항축구전을 구상하고 같은 해 1회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경성과 평양을 대표하는 축구단이 없었기 때문에 양 팀의 선수들은 각 지역의 학교 팀과 사회인 팀에서 선발하여 구성하였다.
1933년, 평양을 대표하는 평양축구단이 창단된 직후 경성에도 지역을 대표할 축구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점차 커짐에 따라 3월 28일 경성의 축구인들이 중심이 되어 창단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같은 해 4월 6일에는 평양축구단의 초청을 받고 경평전 참여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1933년 5월 11일 종로 백화원에서 경성축구단 창단 성명을 발표하였다.
창단 당시 멤버는 다음과 같다.
이사장: 여운형
이사: 유억겸, 이용설, 배석환, 현정주, 김상익
간사: 이영선, 이창진
감독: 현정주
선수: 이혜봉, 정용수, 이창룡, 강영필(연희전문), 이종만(연희전문OB), 박석연, 서형남(세브란스의전), 윤중호, 이용겸(세브란스의전OB)
김용식, 한우량, 하영득(보성전문), 송기우(보성전문OB), 이영민
(조선식산은행), 백기주(진남포), 송기수(송도고), 유약한(철도국), 채금석, 최성손(경신중OB)
1935년, 경성축구단은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에서 조선의 축구단으로서는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고참조 그 직후에 열린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조선 축구를 대표하는 클럽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36년에는 전조선축구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1938년 경평전에 함흥축구단이 추가로 참가하는 형태로 3도시축구대항전이 개최되는 등 타 지방에서도 축구열기가 고조되며 강력한 지방팀들이 생김으로 인해 경성과 평양의 양강구도가 무너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뒤집고자 선수들을 영입하며 재기를 노리던 도중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로 인해 팀은 사실상 해산되었다.
해방 후 축구 경기는 재개되었으나,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분단되면서 남북간의 교류가 어려워지고 선수들의 사상이나 출신지에 따라 월남, 월북이 이루어지며 지역 축구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 상황에서도 경성축구단은 서울축구단으로 이름을 고치고 1946년 서울에서 마지막 경평전을 치루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로서 한국의 지역 축구는 종지부를 찍게 되며, 사실상 오늘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의 남북전으로 이어진다.
3. 주요 인물[편집]
4. 여담[편집]
- 2007년 K3리그에 참가한 서울 유나이티드 FC가 자칭 경성축구단의 가치를 계성한다며 창단했다. 창단 당시에 유니폼도 경성축구단의 유니폼을 본따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알고보니 유니폼의 무늬와 흑백 스트라이프 컬러는 착각으로 인한 오용이었다. 위의 흑백사진의 원래 컬러는 카탈루냐주기 같은 적색, 노란색 스트라이프.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구단측에서 유니폼과 경성축구단과의 관계를 결부시키는 홍보는 하지 않고 있다.
5. 주요 성적[편집]
- 전조선축구대회[7]
- 우승 1회 ( 1936 )
- 준우승 3회 ( 1933 , 1938 , 1939 )
-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8]
- 우승 1회 ( 1935 )
- 메이지신궁경기대회
- 우승 1회 ( 1935 )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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