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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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
東大門運動場 | Dongdaemun Stadium

연혁
경성운동장 (1925~1945)
서울운동장 (1945~1984)
동대문운동장 (1984~2008)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81 (을지로7가)[1][2]
애칭
성동원두
(城東原頭)[3]
기공
1925년 5월 24일
개장
1925년 10월 15일
폐장
2003년 3월
철거
2008년 5월 14일
좌석
22,706석
수용인원
23,500명
표면
천연잔디 (필드), 우레탄 (트랙)
준공비
155,000원
소유
서울특별시청
운영
서울특별시체육시설관리사업소
홈 구단
경성축구단 (1933~1950)
서울시청 축구단 (1976~2003)
일화 천마 (1989~1995)
럭키금성 황소-LG 치타스 (1990~1995)
유공 코끼리 (1991~1995)





1. 개요
2. 건립
2.1. 건립 배경
2.2. 건립
2.3. 부속 건물
3. 역사
3.1. 1928~1945
3.2. 1945~1982
3.3. 1983~2000
3.4. 2001~2008
4. 철거DDP 건립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전국에 계신 스포츠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서울운동장입니다.[4]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7가 일대에 위치했던 종합운동장이다. 애칭은 성동원두(城東原頭). 수많은 국내·국제 체육 경기가 벌어졌던, 대한민국 근현대 스포츠의 메카라 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장소이다. 여러 차례의 개·보수 끝에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했고, 주경기장의 경우 트랙은 우레탄 포장, 그리고 필드는 천연잔디를 깔았다. 28단의 스탠드는 3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부속 건물로 동대문야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배구장 등이 있었다.


2. 건립[편집]


1925년 10월 15일 건립된 이래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最古)의 경기장이자, 대한민국 스포츠의 메카였다.


2.1. 건립 배경[편집]


일제강점기에 경기장이 없어서 사립학교의 운동장을 빌려서 행사를 개최했는데, 이러한 임시방편만으로는 현대적인 체육행사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고 당시 교육기관의 민족주의적 성향 때문에 체육행사의 성격이 민족의식을 표출하는 자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스포츠경기는 인기가 많지만, '즐길거리'가 많지 않았던 1920년대이기 때문에 이러한 체육행사에는 상당한 인파가 모여들었는데, 이는 곧 대규모의 독립 시위로 발전할 수도 있음을 의미했고,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하여 조선총독부는 독자적인 체육 전용시설 건설을 고려하기에 이르렀다.


2.2. 건립[편집]


1925년 일본의 동궁(쇼와 덴노) 결혼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경성운동장[5]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되었다. 경성운동장은 일본 황실 황태자[6]의 결혼식이라는 일본의 최대 경사를 경축하는 뜻을 담는 동시에 "특히 운동을 사랑하시는 동궁전하의 기념사업으로 운동장 설치계획을 세움은 적당한 처치"라는 것이 그 건립의 이유였다.

경성운동장의 부지가 조선시대의 훈련원(訓練院) 자리와 한양도성 성벽을 허물고 남은 공터였던 만큼, 한민족에게는 식민통치의 역사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굴곡이 뒤엉킨 자리에 그것도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을 기념하는 명분으로 건설한 것이 바로 축구장, 육상경기트랙, 야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등을 아우르는 '동양 최대의 종합경기장' 경성운동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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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선이 성벽의 위치이다. 정확히 가운데를 관통해 지나간다.

경성운동장은 경성부의 토목기사인 오모리(大森)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그 구조를 보면 총면적 22,700평, 총 공사비 155,000원(약 34억), 총 수용인원 25,800명이며 육상경기장 8,500평(15,000명), 야구장 5,500평(7,000명), 정구장 1,000평(3,900명)의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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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3. 부속 건물[편집]


  • 주경기장 : 최초에는 육상 전용 경기장이었다가 피치를 다듬으면서 축구 경기도 가능하게 됐다.


  • 배구장 : 대한민국 최초의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이 들어서기 전에 주로 사용했던 체육관으로 지붕이 없는 노천체육관이었다.

  • 수영장 : 미스코리아 대회의 수영복 심사장으로 이용된 적이 있다.

  • 테니스장 : 최초 건립시에는 정구장이었다.



3. 역사[편집]



3.1. 1928~1945[편집]


건립후 광복 전까지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조선자전거경기선수권대회 등 각종 대회의 경기장으로 활용되었다. 근대적인 경기장으로는 거의 유일했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과 평양이 축구로 겨루는 경평축구대회(경평전)의 서울측 홈구장이기도 했다. 제2회 경평축구대회에는 2만여명의 관중이 운집하기도 하였다.


3.2. 1945~1982[편집]


1945년 광복이 되자 일본이 서울을 칭하던 경성(京城)[8]을 서울로 바꾸어, 서울운동장으로 개명하였다. 광복 직후 의친왕의 아들인 이우 공의 장례식이 거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1962년의 보수공사로 육상경기장을 비롯 야구장·수영장·배구장·테니스장 등이 국제규모의 운동경기를 치를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고, 1966년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야구장에 야간 조명시설이 마련되었다. 1968년 보수공사로 메인스타디움인 육상경기장이 오늘날 흔히 기억되는 모습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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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경기장으로 개장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각종 체육단체, 각급학교, 언론기관에서 주최한 각종 종목의 전국 규모 대회와 올림픽 및 월드컵축구대회의 출전을 위한 예선전 등의 각종 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특히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이 개장하기 전까지 서울에서 전국체육대회를 치러야 할 때는 메인 스타디움 역할을 치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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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축구 아시아 예선전.

더구나 이곳은 단지 스포츠의 공간이 아니라 때로 정치, 사회, 문화의 현장이기도 했다는 점에서도 틀림없는 '종합'경기장이었다. 8.15 광복 경축행사, 각종 규탄대회 등 관제집회[9], 어린이날 행사, 국군의 날 행진시 최종 도착지, 미스코리아 대회장(부속 수영장), 부활절 연합예배 등 종교행사 등 다양한 목적의 행사에 활용되었다.


3.3. 1983~2000[편집]


1986 서울 아시안 게임1988 서울 올림픽에 사용목적으로 잠실에 건설된 운동장의 명칭이 '서울종합운동장'으로 확정 되었던 1985년 1월 '동대문운동장'으로 개칭되었다.국립경기장 등 이름확정

이때부터 화려한 영광을 뒤로하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장충체육관, 효창운동장, 잠실종합운동장, 목동운동장 등의 운동장이 신설되었기 때문에 '서울 경내의 유일한 종합운동장'의 지위마저 상실했으며, 여러차례의 개보수를 했다고 하지만 준공 후 60년 이상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난 시점이어서 시설의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K리그 원년인 1983 시즌 슈퍼리그의 역사적인 개막전 경기를 비롯 매시즌 가장 많은 중립경기가 배정되었으며 그리고 1989년부터 일화 천마 (현 성남 FC)를 시작으로 1990년 LG 치타스 (현 FC 서울), 1991년 유공 코끼리 (현 제주 유나이티드) 이렇게 서울 연고 구단들이 생기면서 서울 연고 구단들의 고정적인 홈경기를 비롯하여 실업 축구 결승전, 대학 축구 결승전과 같은 주요 경기가 열려 국내 축구의 메카로 불리기도 하였다.

좌석수에서 동대문운동장의 두 배 이상인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이 1984년 개장한 이후로는 A매치 등 인파가 몰리는 경기는 잠실에 넘겨주었으나 이따금씩 동대문운동장에서도 대형 이벤트가 개최되기도 했었다.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AFC 아시안컵 예선 등 중요도가 비교적 덜한 A매치가 동대문에서 열리는 경우가 있었다. 아시안컵 예선 당시에는 박지성이천수가 국가대표팀으로 처음 뽑혀 A매치 데뷔전을 치르기도 했다.

1996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강행으로 서울 연고 구단들이 지방으로 이전한 후에도 이따금씩 정규리그와 컵대회 등의 중립경기들이 열렸으나 점차 프로축구 경기 개최수가 줄어들었으며 2000년 10월 22일 성남 일화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컵대회 경기를 마지막으로 프로축구 경기는 더 이상 개최되지 않았다.

  • 1990년 당시 서울 연고 구단이었던 럭키금성 황소(현 FC 서울 )의 동대문운동장 홈경기에서 1990 시즌 K리그 우승 세리머니 사진
  • 날짜: 1990년 10월 30일, 출처: 동대문운동장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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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마지막 프로축구 컵대회 경기에서 유일한 결승골을 터트린 서정원의 골 세리모니 사진
  • 날짜: 1990년 10월 22일, 출처: 동대문운동장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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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01~2008[편집]


80년 이상의 세월을 지내온 만큼 낡은대로 낡아서, 안전상의 이유로 정상적인 운동장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10] 가장 단적인 예로 동대문야구장의 철거 직전이었던 2007년에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두산 베어스가 정규시즌 일부 경기를 고별경기 형식으로 치르려 기획했다가 노후된 경기장 시설 때문에 철회됐던 적이 있었다. 참고로 저 세 팀은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팀(삼성 vs MBC)과 한국시리즈 맞상대팀(OB vs 삼성)이었다. 또한 두 서울 연고구단이 MBC와 OB는 각각 1982년과 1985년에 동대문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2001년 일부 부지가 체육공원과 도로[11]로 조성되면서 수영장[12], 씨름장, 테니스장은 소멸하게 된다.

2003년 3월 주경기장이 폐쇄되었으며, 철거 직전까지 풍물시장과 주차장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청계천 공원화 사업으로 청계천 등지에서 노점상이 장사할곳이 없어지자 동대문운동장으로 자리를 옮겨 장사를 하기도 했다.[13] 경기장 안에 시장과 주차장이 있는 기묘한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하는 사람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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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기장(축구장)과는 달리 야구장은 철거직전까지 고교야구-대학야구 등 아마추어 야구대회를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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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윤현석이 너에게 날리는 홈런을 그렸을 당시에 취재를 갔던 사진들이 있다. 보러가기


4. 철거DDP 건립[편집]


일시적으로 어중간하게 조성된 재래시장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동대문운동장은 결국 정리대상이 되었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가 서울특별시장으로 당선되자, 선거기간 동안 공약했던 디자인플라자 조성 부지가 바로 동대문운동장 일대였던 것이다.

동대문운동장 부지의 공원화 사업 계획이 발표 되었다. 80년간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성지였던 만큼, 체육계에서 반대를 표명하였다. 이런저런 일로 반목하던 축구계와 야구계가 뜻을 모은 사례이기도 하다. 또, 운동장 주변 지하상가 상인[14]들과 풍물시장에서 장사하는 상인들도 철거를 반대 하였다. 단순한 철거 반대라기 보다는 생존권 보장 차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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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함께한 공간인만 큼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임시정부 환국봉영회,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 김구 선생 국민장(장례식) 거행, 신탁통치 찬반 집회[15] 등 광복 직후의 정치집회[16]가 있었던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장소였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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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은 결국 2007년 12월 18일 철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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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내에서 장사했던 풍물시장 상인들은 옛 숭인여자중학교 운동장 부지[18]에 새롭게 조성된 현재의 서울풍물시장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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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내용은 DDP 문서 참조.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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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 도로명주소로 서울특별시 중구 흥인문로 35, 지번주소로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7가 143번지.[2] 현재 이 자리에 들어선 DDP의 도로명 주소이다.[3] 서울 동쪽(城東)의 넓은 벌판(原頭)이라는 뜻이다.[4] 광복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펼쳐졌던 실외 국제 스포츠 대회 중계방송의 첫머리는 늘상 이 멘트였다. 실외경기의 메카가 서울운동장이었다면 실내경기의 메카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장충체육관이다.[5] 개장 당시의 정식명칭은 '동궁전하어성혼기념 경성운동장(東宮殿下御成婚記念 京城運動場)'이었다.[6] 당시 다이쇼 덴노의 건강 문제로 히로히토 황태자가 섭정(조선으로 치면 대리청정)하고 있을 때여서 사실상의 천황이였다. 실제 천황에 즉위한것은 1926년 12월 25일이다.[7] 축구장 윗편의 학교는 덕수중학교와 덕수상업고등학교(현 덕수고등학교)이고, 축구장 아래에 있는 학교는 한양중학교한양공업고등학교다. 덕수중과 덕수상고는 각각 을지로4가역한양대역 부근으로 교사를 이전했다. (현재 덕수고는 위례신도시로 다시 이전)[8] 일제가 서울을 경성으로 부른 것은 맞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사용한 바가 있다.[9] 북한의 대남 도발이 이뤄지면 어김없이 이 운동장이나 여의도광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다. 또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당시 이 경기장에서 희생자 영결식을 치른 뒤 북괴 만행 규탄대회를 함께 치렀다.[10] 당시 필드 상태도 불규칙적이고 엉망이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올림픽 팀의 국내 평가전에서 이관우가 불규칙적인 필드 때문에 발을 크게 접지르는 부상을 당해 올림픽 출전이 무산되었다. 대신 발탁된 선수가 바로 이천수.[11] 도로명은 을지로45길.[12] 다만 수영장의 경우 이미 1993년에 폐쇄된 상태였다.[13] 일본 오사카에서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인 난카이 호크스가 1989년 후쿠오카로 연고지 이전을 한 이후, 난카이의 홈구장이었던 오사카 구장 내부에 모델하우스를 설치한 적이 있다. 화차(소설)에 이런 기묘한 상황이 표현되어 있다.[14] 운동장 주변이라는 특성상 주로 스포츠 용품점들이 많았다.[15] 1945년 12월 30일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우익측이, 1946년 1월 3일에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좌익측이 집회를 열었다.[16] 1946년 노동절 대회는 우익측(대한노총)은 축구장, 좌익측(전평)은 야구장에서 각각 집회를 열었다.[17]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DDP가 건설된 후인 2020년 광복절 경축식장으로도 쓰였다.[18] 숭인여중은 남녀공학의 숭인중학교로 바뀐 후 2005년 답십리동으로 이전하였다. 풍물시장 조성으로 사라진 운동장과 달리 학교 건물은 그대로 남아 2023년 현재 서울특별시 교육연구정보원 별관으로 활용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