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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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
李鍾萬[1]

파일:external/mimgnews2.naver.net/20170303144153_666_99_20170303150604.jpg

창씨명
츠키시로 쇼마 (月城鍾萬)
출생
1885년 1월 14일
경상도 울산도호부 외현면 용잠동
(現 울산광역시 남구 선암동)[2]
사망
1977년 1월 19일 (향년 92세)[3]
본관
경주 이씨

1. 개요
2. 생애
3. 친일 행적 문제
3.1. 일본군의 전쟁을 위해 헌금 지원
3.2. 친일 단체 활동
3.3. 친일 언론 활동
3.4. 다른 시각
4.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기업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북한정치인. 본관은 창씨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경주(慶州).[4]

배우 강동원의 외증조부이기도 하다. 강동원 어머니의 친할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의 아버지이다.

2. 생애[편집]


1885년 1월 14일, 경상도 울산도호부 외현면(현 울산광역시 남구) 용잠동#에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5]

이종만은 일제 강점기 '금광왕'으로 불렸다. 금광 개발에 성공하여 부를 축적한 뒤 일부를 처분한 돈으로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위한 광산, 학교, 공동농장 등의 '대동기업체'[6]를 운영했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 조선산업건설협의회 위원장으로 일하며 독립신보를 경영했으나 강제폐간당한 후 자진 월북하여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37년 6월 당시 평안북도 초산군, 자성군, 태천군, 강계군, 함경남도 정평군, 영흥군, 단천군, 회령군, 무산군, 갑산군, 경상북도 의성군, 경상남도 울산군 소재 광산 등 전체 면적 760,000,000평에 달하는 750광구를 소유할 정도로 대지주였으며, 정치가로서 노예도 많이 보유했다.

1937년 6월 6일 대동광업(大同鑛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같은 날에 대동광산중앙조합(大同鑛山中央組合)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49년 6월, 조국전선 중앙위원 및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6.25 중에는 외국으로 피난을 갔다.

종전 이후 귀국, 1954년에 과거 광산개발사업을 했던 경험으로 광업부 고문에 임명되어 자원개발사업을 했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이후 조국전선 의장까지 올라갔으며 1977년 1월 19일에 사망했다. 조국전선은 부고를 발표, "선생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와 그 구현인 조선로동당의 로선과 정책을 높이 받들고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치며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위업을 앞당기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라고 짤막하게 추모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는데 거물급 자본가 중에선 유일하다.

1990년,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3. 친일 행적 문제[편집]


이 내용은 상당 부분 디스패치의 기사를 참조했다. 링크


3.1. 일본군의 전쟁을 위해 헌금 지원[편집]



파일:매일신보 이종만씨 기사.jpg
매일신보 1939.07.06. 석간기사(2면)

이종만은 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군에 전쟁 위문품 등을 보냈다. 유명한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전쟁 독려글도 기고했다. 일본군에 전쟁 헌금을 내기도 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북지(황군)위문품대'로 1,000원(1억)을 기탁했다. 1938년 10월 정주경찰서에 '황군위문금' 1,000원, 1939년 7월 '위문대'에 1,000원을 기부했다.



3.2. 친일 단체 활동[편집]


친일 단체 활동도 했다. 아래는 친일 단체 활동 기록들

① 1939년 4월 '조선산금협의회' 위원이 된다. 조선총독부가 전시 총동원 체제를 위해 만든 단체다. 금(金) 사용 제한 강화 등을 논의했다.

② 그 해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임명됐다. 총독부가 친일(유림) 인사들을 동원해 만든 단체다. 회원 자격은 '성년 이상의 제국 신민으로 본 회의 취지에 찬동하는 자'다.

③ 1940년에는 '대화숙'(야마토주쿠)이라는 친일교화책에 가입했다. 대화숙은 내선일체를 강화하고, 사상 사건 관계자를 선도한다는 취지로 운영됐다.

④ 1941년 9월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들어갔다. 이어지는 10월에는 이 단체의 이사가 됐다. 조선인을 수탈해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보탰다.


3.3. 친일 언론 활동[편집]


이종만은 1939년 1월 1일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축전첩신년, 기무운장구' 시국 광고에 참여했다. '기무운장구'는 "무운이 오래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다. 일제의 승전을 축원하는 것이다.

1940년 7월에는 잡지 <삼천리>에 지원병 격려글-지원병과 혈한애의 인-을 기고했다. 조선인들에게 '천황을 위해 전장으로 나가 싸울 것'을 독려했다.

"지금 대아시아의 신질서건설의 성업에 조선 청소년이 참가하는 것을 참으로 높게 평가한다. 이 거룩한 사업에 우리 조선 청소년이 진심으로 지원병을 희망하여 몸을 위에 바치는 모양에 감사를 금할 길이 없다. 조선 청소년 제군은 혈과 한과 애의 인이 되라." (삼천리. by 이종만)


3.4. 다른 시각[편집]


다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한겨레오마이뉴스에서 나온 기사들이다.[7]
링크링크

이종만이 일제에 낸 돈은 일종의 보험금이었다. 그가 노동자 농민 교육사업으로 환원한 금액은 80여만원(지금 화폐가치로는 800여억 원)에 이르렀다. 자신의 땅 157만 평도 내놓았다. 누가 ‘일하는 사람이 다 잘사는’ 이상에 모든 걸 바친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곽병찬 대기자는 그 근거로 방기중 전 연세대 교수가 1996년 발표한 연구논문 ‘일제말기 대동사업체 경제자립운동의 이념’을 언급했다.

이종만이 자신의 전 재산과 기업을 바쳐 세운 대동기업체의 이념과 경영철학은 식민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모색하던 진보적 민족주의 계열이 도달한 사상적 모색의 한 전형이자 실천이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종만이 일제에 갖다 바친 돈보다는 노동자•농민 교육 사업과 공동농장 사업 등에 환원한 돈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또한 기업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는 점도 근거로 든다.
물론, 심영, 최승희의 사례처럼 애초에 북한이 친일 청산에 모범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친일행적은 둘째 쳐도 공산주의의 타도 대상인 자본가 출신의 민간인 이종만이 현충원 급의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는 것은 그만큼 김일성이나 박헌영 등 골수 공산주의자들조차도 그의 사회환원 활동을 인정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본가라는 사람이 자신의 전 재산을 탈탈 털어서 공산주의의 주체인 프롤레타리아들의 자활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었으니 인정하지 않을 리가.....

하지만 월북 인사라 관련 자료 수집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교차 검증을 위한 후속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여담으로 한겨레에는 이종만이 노동운동을 위해서도 자금을 썼다고 주장하는 기사가 있다.


4. 참고 자료[편집]


  • 민족문제연구소 (2009). 〈이종만 (1)〉. 《친일인명사전 3 (ㅇ ~ ㅎ)》. 서울. 131 ~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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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어 발음: 리종만[2] 1998년 10월 17일 용잠동이 선암동으로 편입됐다.[3] 92세 생일을 지내고 5일 뒤에 사망했다.[4] '월성'은 경주시의 옛 지명으로, 월성군을 거쳐 지금도 월성동이라는 행정구역 명칭으로 쓰인다.[5] #[6] 전봉관 교수의 럭키경성에서는 이를 '대동콘체른'이라고 일컫었다.[7] 이종만의 생애 관해 살림 출판사에서 펴낸 전봉관 교수의 <럭키경성>을 읽어보면 좋다. 위에 얘기한 친일행적은 물론, 금광개발과 자선사업에 대해 잘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