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구조 및 재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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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모양과 구조
2.1. 서양식 노 구조라는 학설 부활
2.2. 기타 가설
2.2.1. 김세랑[1]의 주장
2.2.2. 한호림의 주장
2.2.3. 기타 주장
3. 용두의 형태와 위치
4. 철갑 문제
5. 서양의 연구


1. 개요[편집]


거북선의 구조와 재질에 대한 추측과 논쟁, 연구를 다루는 문서.


2. 모양과 구조[편집]


거북선에 구체적인 모양과 구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는 상황으로 아직 확실하게 결론이 난 부분은 없는 상황이다. 이는 거북선 자체가 한가지 고정된 구조와 형태로만 유지되지 않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개조되고 계속 변화했기 때문이다.

신(臣)이 일찍이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거북선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도 돌진해 들어가서 대포를 쏠 수 있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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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포파왜병장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龜船)을 만들었습니다. (중략..) 이번 싸움에 돌격장으로 하여금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들어가 천자포, 지자포, 현자포, 황자포 등 각종 총통을 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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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 6월14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


"지난 겨울에 별군직(別軍職) 윤필은(尹弼殷)이 상소하여 전선(戰船)의 제도를 바친 것으로 인하여 신이 왕명을 받들고 이삼(李森)과 더불어 전선거북선(龜船)을 개조하였는데, 전선의 2층 위에 장식이 너무 무거워서 바람을 만나면 제어하기가 어렵겠으므로 위층의 방패(防牌)를 별도로 제도를 만들어서 때에 따라 눕혔다 세웠다가 하고, 선두(船頭)에는 곡목(曲木)을 덧붙여서 그 모양이 마치 오리의 목과 같으나 조금 뽀족하여 비록 풍랑을 따라서 나가더라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주 빠르며, 혹시 암석에 부딪히더라도 곡목이 먼저 파손되기 때문에 매우 편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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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1월 20일 신묘 1번째기사 형조 판서 장붕익이 전선과 거북선 개조에 대한 것을 아뢰다


"신이 전선(戰船)귀선(龜船)의 제도를 상세히 보았더니, 전선은 매양 개조(改造)할 때마다 그 몸뚱이가 점차 길어져 결코 운용(運用)하기가 어렵고 귀선에 있어서는 당초 체제(體制)는 몽충(艨衝)[2]

과 같이 위에 두꺼운 판자를 덮어 시석(矢石)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신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기록한 바를 보았더니, 귀선의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銃) 쏘는 구멍을 내었는데 지금은 각각 여덟 개의 구멍을 내었으니, 거북선이 종전에 비해 지나치게 커진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으므로 개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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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실록 73권, 영조 27년 2월 21일 기축 4번째기사 호남 균세사 이후가 호남 해도의 상황을, 영남 균세사 박문수가 전선의 일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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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에서 복원한 거북선은 3층 구조지만 대포가 2층에 배치되어 있다.

현재 외부 형태만큼 쟁점이 되고 있는 사항은 바로 내부 구조다.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1층설과 2층설과 3층설, 2.5층 설이 혼재되어 있는데, 최초로 제기한 것은 구한 말 선교사였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아들이자 역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살았던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가 1934년에 쓴 '한국의 배'라는 책에서 제창한 형태이다. 하지만 언더우드 학설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으니, 바로 서양식 노에 입각한 거북선 모델이기 때문에 언더우드가 제창한 구조에서는 전투 공간과 노를 젓는 공간이 합쳐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 사격을 하면 이동이 불가능한 사태가 벌어진다.[3]

이 때문에 제기된 학설이 3층설이다. 남천우 등이 제기한 이 학설은 전투 공간과 노를 젓는 공간이 겹쳐지는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1층을 더 올린 것인데, 이것 또한 고증에 어긋난다. 기본적으로 거북선은 판옥선 위에 지붕을 올린 것이라는 기록과 차이가 발생하고, 2번째로 발생하는 문제점은 층수가 높아져서 흘수가 높아진다는 문제가 있다.[4]

그러나 일본 측에서 실험을 해본 결과 3층으로 증축을 해도 오히려 무게가 늘어나서 흘수 자체나 복원력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3층설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기록과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3층설도 문제가 있다.

때문에 위의 학설들을 절충한 2.5층설이 제기되었는데, 내부에 전투 공간을 따로 확보한 반층 정도되는 공간을 마련해 따로 전투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 이 설은 임진왜란 당대의 기록인 <간재집>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현재로써는 통층설이나 2층설 자체는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가 되었고, 3층설의 보완과 2.5층설 자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다만 조선후기에 그려진 수군조련도들의 모습을 보면 다양한 형태의 거북선들이 존재하였고, 이로 미루어보아서 1층설(통층설)과 2층설, 2.5층설, 3층설 모두 맞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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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구 교수팀이 추정해 그린 거북선 그림.# 임진왜란 당대의 인물인 간재 이덕홍의 책에 실린 거북선 그림에 의거한 거북선 단면 8각형설에 기초해 그린 것이다.

2015년 현재 홍순구 교수팀의 연구팀에 의해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높이에 관한 치수 기록을 처음으로 해석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모두 3층 구조였고, 기존의 2층의 낮은 높이에 대한 논란은 방패판의 크기였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2015년 8월 18일 기사 :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모두 3층 구조"

2015년 10월 15일 새로운 기사가 나왔다."현존 거북선 모형은 '엉터리'… '명량'식으로 발포하면 배 뒤집혀" 홍순구 교수의 3층설 연구에서 화포 운용에 대한 내용을 추가로 다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거북선은 측면에서는 황자 총통과 현자 총통같은 중소 구경의 화포만을, 천자 총통, 지자 총통과 같은 중, 대형포는 함수 전면에서만 제한적으로 운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학설도 오류가 있는데, 당시 판옥선 등의 군선은 선체 바닥에 돌을 깔아 무게 중심을 맞췄다는 것을 간과하고 이를 실험에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포를 쐈을 때 배가 뒤집히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간단한 해결방법이다.

혹은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3층에도 당연히 벽과 난간이 존재했던 판옥선의 특성상 그 위에 뚜껑을 올린 거북선의 지붕은 자연스럽게 바로 그 3층 벽 위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타당하다. 위에 제시된 거북선 3층설의 그림들을 토대로 생각하면 판옥선의 3층이 무슨 벽도 난간도 없는 구조가 되어 말그대로 2층의 지붕 위에 병사들이 올라타서 싸운 것이 되는데 이랬을 리는 없고 당연히 병사들의 추락 방지 및 적군의 화살, 총탄에 대한 방호 용도로 화포를 쏠 구멍만 뚫어 놓은 벽이 둘러처져 있었으니, 바로 이 위에 뚜껑을 덮은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 여러 모로 합리적이다. 위의 거북선 3층설의 그림들에 나온 3층의 구조처럼 비스듬하게 누운 벽에 뚫린 화포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보통 판옥선처럼 수직으로 세워진 벽에 뚫린 화포 구멍을 통해 밖을 보는 것이 더 편한 것은 당연한 것이며 천장 높이도 위에 제시된 형태의 거북선들보다 더 높아 탑승자들이 편리할 것이고, 또 위와 같은 거북선을 만들려면 이미 있던 3층의 벽을 다 뜯어내야 했을 문제 등의 이유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거북선을 3층으로 합리적으로 고증하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는 현대의 매체들에서는 거의 다 이런 형태로 거북선을 디자인한다.

그런데 이렇게 추정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이순신은 장계를 통해 왜적들이 지붕으로 침입할 것을 우려하여 칼과 송곳을 박았다고 분명히 명시했다. 헌데 3층 높이의 판옥선에 그대로 지붕을 씌우게 되면 지붕의 높이가 높아져 왜적들이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고,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기어오르려는 시도 역시도 쉽지 않다. 실제로 판옥선의 경우 왜선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최소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는 왜군이 함부로 기어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조총과 화공의 방호를 위해 지붕을 덧씌운 것만으로도 충분하므로 굳이 번거롭게 칼과 쇠못을 박아 방어수단을 추가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거북선의 작전시 주요 임무는 적들의 조총 엄호사격에 대한 1차 방어선 역할을 통한 판옥선 엄호 그리고 적 지휘선 우선 격멸을 위한 선봉 돌격이었다. 따라서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워지면 수심이 얕은 해안에서는 거북선을 운용하기도 어렵고 설령 무게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선체의 높이가 너무 높아지면 무게 중심도 덩달아 높아지므로 급선회시 선체가 뒤집힌다거나 하는 문제가 생길 위험성이 커져 기동력에도 큰 허점을 노출할 수도 있다.[5]

이런 점들을 고려하자면 실제 거북선의 전고는 왜선과 근접했을 때 적들이 지붕으로 침투할 위험성이 높을 정도로 낮은 편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기록을 보면 ‘거북선의 크기는 판옥선만 하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는 거북선의 전장이 판옥선과 거의 같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전고가 다르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상술된 홍순구 교수의 논문과 후술할 채연석 교수의 논문 내용을 모두 참고해 보더라도 거북선의 주무장인 총통은 기동중이라면 함수의 전면이나 후면을 통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지 측면의 포혈까지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측면 포혈을 아예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측면 포혈을 통해 총통을 발사하는 때는 학익진에 편입되어 함선의 위치가 고정된 후였거나 선봉 돌격선이라는 임무 특성상 적선에게 포위당하는 위급상황일 때로 한정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기의 근거를 종합해보자면 현재 학계에서 외면받고 있는 조선식 노를 사용한 2층설이 완전히 말이 안되는 학설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설사 3층 구조가 맞다 하더라도 3층의 용도는 함포사격보다는 화공을 위해 화살을 쏘기 위한 장소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실제로 나대용은 창선을 고안하면서 ‘거북선에서는 활을 쏘기가 불편했다’는 언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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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기업인 윤원영 씨가 2009년 7월 17일 공개한 300여년 전 거북선 고서화 속 그림

2005년 기사에 따르면 이 고서화는 뉴욕 주 롱아일랜드 소재 서진 무역 윤원영 사장이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미국인 엘리자벳 마우리 여사로부터 지난해 1월 구입했으며, 16일 뉴욕 한국 일보를 통해 공개됐다. 평양 숭실 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한 선교사 데이빗 마우리의 손주 며느리인 마우리 여사에 따르면 이 고서화는 1867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인근 나가오카 성벽을 허물 때 처음 발견된 것으로 1970년 일본 골동품 반출 협회의 허가를 받아 미국에 반입됐다. 재미 한국 고미술 연구가인 최영래 씨는 "최근 조지아 대학에 의뢰해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이 그림이 그려진 연대가 최고 1640년대로 추정됐다“며 “임진왜란(1592년∼1595년) 후 거북선 기지창을 직접 보고 그린 실경화로 보인다" 라고 했다. 그리고 채색 부분은 그림을 그릴때 사용했던 석채(광물성 물감)가 용머리, 방패 등 일부에 남아있고, 나머지는 일본에 건너간뒤 덧칠한듯 보인다는 정보가 있다.

최근에는 과거 거북선에 설치된 총통 복원에 참여했던 채연석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UST) 교수(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가 거북선 실물 복원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할 거북선 함포 배치구조를 과학적으로 밝힌 연구 결과를 최근 한국과학사학회지에 공개했다. 채연석 UST 교수 "거북선 19개砲 갖춰 막강화력… 전면부 대형 화포는 획기적 발상" 채 교수는 2015년 연구에서 천자·지자·현자·황자총통이 모두 19기 장착됐고, 노는 좌우 8개씩 총 16개가 설치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화포를 운용하려면 거북선은 3층 구조라는 분석을 내놨다. 더 나아가 이번 연구에서는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 등 사료를 바탕으로 총통의 구체적 배치 위치를 과학적으로 규명했다. 채 교수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활동한 거북선은 하층을 제외한 1층과 2층 전면에 모두 4문의 대형포가 설치됐다고 한다. 용머리와 뒷면, 옆면에는 그보다 작은 소구경포가 배치됐다는 것이다.


2.1. 서양식 노 구조라는 학설 부활[편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2021년 11월 발표한 '판옥선 학술 복원 보고서'에서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파일:판옥선 노 구조.png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보고서에 실린 도판
좌측은 기존 학설, 우측은 새로운 학설.
기존에는 대부분의 한선들처럼 당연히 판옥선, 그리고 판옥선의 개조형인 거북선의 노는 노 하나에 노꾼 여럿이 붙어 선 자세로 8자를 그리며 뒤로 젓는 노를 사용했다는 것이 정설이었고, 이런 노 젓는 모습은 영화 명량에서 잘 재현되었다. 그러나 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판옥선의 노는 서양 갤리선의 노처럼 노꾼들이 앉은 자세로 옆으로 뻗어나온 노를 앞뒤로 왕복하며 저었을 것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나온 것. 앉은 자세에서 옆으로 젓는 노는 서양식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한선에서도 없던 것은 아니라고 하며, 옆으로 젓는 노의 경우 지구력은 서서 젓는 노보다 떨어지지만 순간 가속력이 좋아 기록에 나온 판옥선/거북선의 가속력을 설명하려면 옆으로 젓는 노가 타당하다는 것이다. 아래에 나온 것처럼 김세랑, 한호림 등 재야 연구가들의 주장과 비슷한 결과가 나온 것으로, 앞으로 학계의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내용이다. 특히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가 '한국의 배'라는 책에서 최초로 주장한 학설과도 같은데, 그동안 한국 학계에서는 언더우드의 연구 결과를 서양인이라 한선을 잘 몰라서 그런다고 폄하했지만 언더우드는 고종 때 실물 거북선, 판옥선을 본 사람이다.

2.2. 기타 가설[편집]



2.2.1. 김세랑[6]의 주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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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폐간된 국산 모형 전문 잡지인 <취미가>[7]의 제호 중에 역사 전통 기획 시리즈로 이순신 장군 흉상과 거북선 특집('1995년 12월호)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후일 전자책으로 별도 발매).

거북선의 경우 필진인 김세랑이 알고 지내던 거북선 연구가에게 사사한 지식으로 '지금 알려진 거북선은 중국과 일본의 동시대 함선을 비교하여 만들어진 모습으로, 조선 시대 판옥선 제작 기술과 전법을 고려하면 지금과는 한참 더 모양이 달라진다' 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졌다. 제작 동기는, 우연히 한참 예전에 절판된 거북선 프라 모델을 입수한 것을 계기로 자신이 배운 지식을 최대한 적용하여 거의 새로 만들다 시피 개조한 외형이었는데, 당시의 설명으로는 상당히 합리적인 부분이 많은 형태였다.

드라마 <임진왜란 1592>의 용머리 화포 설에 따른 발사 장면(gif).
[1] 미술 전공자로 플라모델피규어 조형사로 유명하며, 모형잡지 취미가네오의 핵심 필진이었다. 그가 만든 이순신 장군 12인치 피규어는 충무공의 정신을 구현한 걸작품으로 유명하다.[2] 몽충(艨衝) : 좁고 긴 병선(兵船).[3] 실제로 2층구조면 노를 서서 젓든, 앉아서 젓든 전투 공간과 노를 젓는 공간이 합쳐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 사격을 하면 이동이 불가능한 사태가 벌어진다. 이 때문에 통층설이나 2층설은 거의 사장되었다.[4] 하지만 현재 판옥선이 3층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나와, 고증에 어긋나지 않는다.[5] 물론 조선의 판옥선과 거북선은 평저선이기 때문에 첨저선이 대다수였던 왜선보다는 선회기동 시 안정성이 훨씬 높기는 했다.[6] 미술 전공자로 플라모델피규어 조형사로 유명하며, 모형잡지 취미가네오의 핵심 필진이었다. 그가 만든 이순신 장군 12인치 피규어는 충무공의 정신을 구현한 걸작품으로 유명하다.[7] 모형잡지 취미가네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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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uiseon_gif2.gif



1. 거북선 머리의 경우 당시 일본 함선들의 지휘부가 있는 누각이 높이 있는 것을 감안, 지휘부를 직사로 공격할 수 있는 대포를 탑재하기 위한 용도였다고 가정하고 있다. 때문에 거북이 머리의 사이즈가 상당히 크며, 실제로 거북선이 수십, 수백척씩 사용되고도 후세에 이어지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거북이 머리 대형화와 함선 높이로 인해 함선 균형의 불안정'을 이야기하고도 있다. 사실, 지금 알려진 거북선의 거북이 머리는 사이즈가 너무 작아 그 용도를 억지로 끼워맞추려면 '적에게 심리적 위압감'이나 '연막 살포용'으로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8][9]

2. 함수 아래쪽의 도깨비 문양은 위치가 애매하여 그 자리에 도깨비 문양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한가지 가능한 추론은 이게 사실 충각의 일부분이라는 이야기다. 유사시 적함을 들이받는 전술은 전세계적으로 근대까지도 사용되었는데, 현재의 거북선 모양대로라면 그대로 들이받을 시 함체가 충격을 받는 형태이며, 도깨비 문양이 있는 바로 그 자리가 홀수선 근처라 충각으로 들이받으면 적함에 물이 들어가기 쉬운 위치라는 점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려면 지금보다 훨씬 커야 하기 때문에, 아예 충각으로 설정하고 대형화하고 돌출시켜 놨다.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등장하는 개량형 2층 거북선에 이 귀면 충각 가설이 반영되어 등장했다. 참고로 충무공 전서의 통제영 귀선에는 귀면이 없다. 전라 좌수영 귀선에 도깨비 문양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거북선의 모습은 이 전라 좌수영 귀선을 모델로 한 것.

3. 돛의 경우 근거리 전투시에는 총탄이나 화살에 맞아 구멍이 날 가능성이 높으므로, 전투시에 눕힐 수 있도록 설계한 뒤에 100% 노를 저어 추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접을 수 있게 설계.

4. 거북선의 철갑선 이야기에도 의문을 제시하고는 있다. 일반 철일 경우 바다에서 녹이 슬어 사용할 수 없다는 점과, 못 등으로 고정 시켰을 경우 나무 사이가 벌어지거나 빠져 파손 가능성이 높음을 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근거리에서 적함의 적병이 뛰어들어와 함상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을 아예 원천 봉쇄하기 위해 최소한 지붕은 있었음이 분명하고, 거기에 적병이 뛰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칼이나 창을 박았다는 기록이 있어 여기에 도색을 했으면 철갑으로 오해하지 않았을까? 라는 가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철갑선 이야기도 무시할 수는 없어 일단 나무 지붕 위에 '놋쇠'로 압정 같은 형태의 장갑판을 무수히 박은 것으로 설정했다.

단,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거북선이 돌격선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철갑이 아니면 조총의 사거리에서 그 갑주가 죄다 파괴될 것임을 이유로 들어 철갑의 타당성을 든다. 이 경우도 판형 갑주가 아닌 비늘형 갑주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구한 말 시기 재래 무기 정리시 기록이나 조선 왕조 실록에 귀선철개라는 기록이 있어, 철장갑 설도 힘을 얻은 상황. 사실 조선 시대 성문에서는 얇은 방화용 겸 방어력 증가용 쇠조각들을 겉에 씌운 사례가 흔하다. 이 경우 녹은 도료를 칠해 방지. 실제로 방화를 막기 위해 철을 씌운 조선 시대 성문들도 철판 겉에 도료가 칠해져 있다.

5. 현재의 알려진 거북선 형태는 누각 높이가 너무 낮아 기록에 남아있는 무수한 총안구와 대포 발사구와 노의 숫자가 설명이 안 된다. 게다가 전투원들의 전투 공간을 아예 예상 못 했기에, 대략 3단 갑판 형태로 포마다 승무원과 총통이 배치되어 외부를 조준하고 맨 밑층엔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있으며, 서로의 작업 공간에 문제가 없도록 설계를 해봤다. 이렇게 됐을 때는 결과적으로 높이가 상당히 높아 1번의 거북이 머리와 더불어 상당히 언밸런스 하게 생긴 탓에, 전투에서의 효율성을 위해 함선 균형을 희생했을 가능성에 더욱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나오기 훨씬 전에 남천우가 주장한 3층설과 관련해서 일본에서 실험해본 결과 높이가 올라가도 무게가 증가하기 때문에 자연히 복원력과 흘수는 정상 수준으로 내려간다. 단 남천우 교수의 3층 설은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거북선의 구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10]

결과적으로 완성된 거북선 형태는 훨씬 전투적이고 강렬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외형 자체가 좀 예쁘지가 않아 주류로서 인정받긴 힘들다는 것을 제작자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설명에서 납득할 만한 부분들이 꽤나 많아 음모론까진 아니더라도, 이 부분은 좀더 연구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자금이나 연구 지원 등이 있었으면 하는 부분.

위에 나온 것처럼 최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수평으로 쓰는 노가 오히려 맞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거북선은 원양 항해 성능이 떨어지는 평저선이 아니라 첨저선과 평저선의 하이브리드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아직까진 학술적 근거가 부족한 주장이며, 오히려 현재는 중국에서 외양용 한선인 봉래고선의 발굴과 정크선 중 한선과 유사한 평저선인 사선 연구의 발달로[11] 평저선도 원양 항해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설이 우세하다.[12]

2.2.2. 한호림의 주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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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림 디자이너가 출판한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 (유튜브) 주간조선 기사
영어단어 학습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로 유명한 그래픽 디자이너 한호림이 기존의 학술연구 및 수치계산, 자신의 해군 수병 복무 경험 등을 동원하여 내놓은 거북선 도안. 1층에 앉아서 노를 젓고 2층에서 포를 쏘며 3층에는 십자로가 있으며 장대와 활을 쏘는 사수등이 있는 3층구조를 제시하고 눕힐 수 있는 돛대, 권양기를 설치한 닻과 닻을 보호하는 뿔, 풍구를 단 용머리등 여러 학술 결과등을 종합하여 기존의 안보다 더 설득력있고 디테일한 도안을 제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한호림은 수직으로 놓고 서서 젓는 조선 전통 노는 지구력은 강하지만 순간 고속을 낼 수 없어 조운선 같은 비전투 선박에서나 쓸 노이지 고속이 필요한 전투용 선박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노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2021년 11월 발표한 '판옥선 학술 복원 보고서'에서 한호림의 주장과 같은 논리로 판옥선의 노는 서양 갤리선의 노처럼 노꾼들이 앉은 자세로 옆으로 뻗어나온 노를 앞뒤로 왕복하며 저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나왔다.

2.2.3. 기타 주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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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선체 함수의 귀면상은 충각이 아닌 능파성[13]을 높여 속도를 올리기 위한 돌출물이라는 이론도 존재한다. 이 경우 충각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지나치게 돌출될 필요가 없고, 판옥선과 거북선을 비롯한 모든 조선 수군의 전선은 서양 배처럼 배를 지지하는 용골이 충격을 받아주는 구조가 아니다.[14] 용골이 없고 저판 전체와 장쇠가 용골을 대신하는 구조라서 적함과의 충돌시의 충격을 그대로 선체의 구조강도로 부담해야 하는 문제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고려 시대 과선이 평저선이면서 쇠뿔을 달고 충각 공격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시간적 차이가 큰데다 과선의 쇠뿔에 대한 상세한 내부 구조도 불명이라 거북선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그리고 거북선 3층설의 경우 이미 거북선과 판옥선 자체가 평저선치고는 무게 중심이 높은 편이기 때문에 거기서 전고가 더 올라갈 경우 항해 성능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고, 실제로 일부 거북선 / 판옥선 복원품은 안전성의 문제가 지적된 바 있다. 다만 이는 복원시 충분한 사전 연구가 부족했고, 조선 시대 배에 밸러스트를 적재했던 것을 고증하지 않은 문제도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건조된 거북선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목재 건조와 신설계, 그에 따른 여러가지 꽃피고 싹틔우는 애로 사항 때문에 실제로는 판옥선에 뚜껑만 덮은 판옥선 개장형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판옥선과 큰 구조적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4번 각주에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다. 단 이런 주장에는 판옥선과 거북선의 기록을 보면 수치와 포문수의 차이가 있는 점이 문제가 되는데, 이 문제는 같은 판옥선이라도 크기와 포문수가 제각각이었을 수 있다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시간대나 지역별 차이, 혹은 재료 수급 등등의 이유로 판옥선은 규격화되지 않은 여러가지 형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 용두의 형태와 위치[편집]


수년 전까지만 해도 거북선의 용머리는 목을 빼고 지붕 위까지 솟아올라와 있었으나, 최근에는 목이 없는 거북선으로 많이 그려지고 있다.[15] 판옥선이 그러했듯이, 거북선 역시 오랜 시간동안 개량을 거듭해오며 그 형태가 달라졌는데 용머리 형태 역시 시대가 변하며 개량되며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최소한 조선 후기에는 머리를 뻗은 거북선이 존재했었으나[16] 임진왜란 당시에는 거북선에는 목이 없으며 머리의 입은 대포와 동일한 높이 있어 용의 머리에서 대포를 발포할 수 있었다. 다만 실제로 거북선이 충파(함선으로 들이박는 전술)를 적극적으로 했을 가능성[17]은 적으므로 용두는 기선제압 용이지 충파를 위한 관통자의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18] 또한 용두의 재질은 금속인지 나무[19]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4. 철갑 문제[편집]


상이 이르기를,

"귀선(龜船)의 제도는 어떠한가?"

하니, 남이공이 아뢰기를,

"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니, 수전에 쓰는 것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많이 만들지 않는가?"

하니, 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

"소신이 황해도에 있을 때에 한 척을 만들어 검(劍)을 꽂고 거북 등과 같이 하였는데, 그 제주가 아주 신묘(神妙)하였습니다."

하고, 남이공이 아뢰기를,

"전선은 가볍고 빠른 것이 상책입니다. 지금은 군사가 없는 것이 걱정이지 배가 없는 것은 걱정이 아니니, 바닷가에 사는 공천과 사천을 오로지 수군에 충당하면 국가의 계책에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

- 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1월 7일 기해 1번째기사 경연을 열다. 유성룡·이덕형 등과 왜적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거북선이 철갑이라는 기록은 일본 측의 기록에 나오는데, 정말 철갑선인가에 대해서는 한국 주류 학계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실제로 실록에서도 '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등 같았다'라고만 나오지 어디에도 '철갑선'이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 역사는 제법 오래돼서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 "최초의 철갑선이면 자랑스럽겠지만 철갑선이 아닌 걸 맞다고 할 수 없다"라고 기술하였다. 이에 대한 신채호의 근거는 아주 간단한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측의 그 어떤 기록들에서도 거북선을 철갑선이라고 서술한 기록들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다른 문제는 철의 보급 문제. 당시 조정은 이런 금속 자원에 대한 보급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식량이야 자체 조달이 가능해도 아무리 이순신이라지만 맨땅에서 철을 뽑아낼 순 없다. 다만 거북선에 쓸 만한 양의 철이 부족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 이순신이 부족하다고 한 '철'은 쇠(Fe)가 아니라 쇠붙이(금속 전반), 그 중에서도 구리(Cu)고 그 근거로 해당 장계에서 말하는 '철'의 용도로 총통 제조를 들고 있다.링크[20] 사실 이순신에게 있어 재료 확보보다는 가공시 드는 비용 문제가 더 컸다고 보인다. 링크는 한국의 군사사 전문가 중 하나인 신재호 블로그.

일본 측 기록에서는 철갑이라고 나오는데 이 것이 철갑을 두른 것인지 철갑을 두른 것처럼 강했다는 것인지(물론 일본에 텟코센이 있기는 했지만), 철못을 박았다는 것인지 해석이 엇갈리고, 거북선이 강해서 자기가 졌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적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명량 해전 때는 13척이 다 거북선이어서 졌다고 할 정도다.[21]

다만 위에서 보듯 당시 판옥선을 거북선처럼 개조했다는 기록에 근거해 왜군이 헷갈렸다는 주장도 있다. 그로부터 1년 정도 지난 기록을 보면 일본에서도 철갑을 두른 배를 만들라고 지시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거북선이라는 철갑선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한국에서 최초로 이걸 주장한 건 유길준인데 이 역시 일본의 정한위략을 보고 그랬다는 것. 사실 실록이나 여타 기록 중에 귀선철개라 하여 거북선용 철갑으로 추정되는 기록은 있는데, 문제는 관련 기록 중 하나는 1748년 작성된 경상 좌수사의 장계 초본에 "이른바 거북선은 누각을 만들지 않고, 판으로써 덮개를 하고 그 위에 거듭 인갑을 하였고(所謂龜船則不以爲樓以板爲蓋仍作鱗)..."하는 기록이고(출처), 다른 기록은 흥선대원군 시절 기록이다.

즉 둘다 임진왜란 당대 기록이 아니다. 포인트를 못집고 거북선이 고종때까지 존재했으니 후대의 기록이라고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는 사례가 있는데 후대의 기록이라 문제가 아니라 거북선이 선조부터 고종시기 300년 가까이 존재한 만큼 바리에이션이 있거나 중간에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해 문제다. 이순신이 직접 운용했던 왜란 시기 거북선이 철갑선이냐를 논할때 거론할 논거로는 부족한 것이다.

정약용은 정조 대에 영국 배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에 표류한 사건에 대해 기록하면서, 프로비던스 호가 "배 위에 널판지를 깔아 마치 거북선 같았다"고 묘사했는데, 이를 통해 철갑선 설을 부정할 여지도 있다.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는 1882년에 펴낸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에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조선군의 군함을 설명하면서 "금속으로 표면을 감쌌다(covered with metal)"라고 적었고, 또다른 선교사였던 호머 헐버트는 미국의 "Harper’s New Monthly Magazine"의 1899년 6월호에 거북선을 거북배(tortoise-boat)라고 표현하면서 철판(Iron Plate)으로 감싼 구조라고 적으며 거북선을 철갑선(Ironclad)의 일종으로 간주했다.

고종때 까지도 거북선이 존재했으니 사진과 간략한 기록이라도 남겨놓았으면 최소한 조선 후기 거북선이 철갑선인지 아닌지는 결론났을텐데 그러질 못해 논쟁만 계속되고 있다. 철갑을 씌웠다는 기록은 부족한데 그나마 철갑선 언급이 있는게 대부분 일본 쪽 기록이지만 검은색으로 칠한 나무판을 멀리서 봐서 착각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22]

다만 목갑이었다면 일본의 화공을 어떻게 버틴 것인가에 의문이 생긴다. 당시 일본도 화공용 폭탄(포락옥)과 짚단을 사용한 데다, 물에 적신 거적을 겉에 덮는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말라버리고, 이동 중이나 포락옥같은 폭발물에 맞으면 떨어질 수도 있다. 거기다 적이 항상 쳐들어 오기 전에 사람이 다니기 힘든 거북선 등에 짚단 덮을 시간을 내준다는 보장도 없다. 철갑선 시기가 올때까지 화공은 함선에게 치명적이였고 나무로 배를 만들던 시기에 화공을 막는다는건 불가능한 시기였다. [23] 심지어 거북선보다 훨씬 후대에 활약했던 목재 프리깃, 전열함의 시대에도 가열 포탄이 배에 떨어지면 조기진화를 하지 못하면 배가 홀랑 타버리는건 시간문제였는데 그보다 전 시기에 활약한 거북선이 철판으로 방화력을 확보하지 않았다면 바다 위의 불쏘시개가 되었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돌격선인 거북선 특성상 거리가 멀어서 포락옥을 못던질리도 없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판옥선과 달리, 거북선은 상갑판에 수병을 신속하게 보낼수 없는 구조였고. [24] 이는 다시 말해 상갑판에 불이 한번 붙으면 소화를 시도할 인원을 보낼수가 없으니 불을 절대로 끌수 없이, 거북선 안에서 산채로 타 죽어야만 했다는 뜻이다. 이러니 방화 구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다만 화공이 생각만큼 그리 쉬운 전술은 아니었다. 모든 나라의 목재선이 다 그렇듯 조선 수군도 화공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으며, 화공용 폭탄이라고 해서 기름붓듯 불이 번지는 수준도 아니었다. 애초에 불만 붙이면 장땡이라고 생각했다면 일본도 조선도 그냥 멀리서 포만 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일정 거리에서 서로를 향해 치열한 함포전을 벌였던 것이고, 일본은 특기인 백병전에 치중한 것이다.

김경륜 기자는 기고문에서 "금속판으로 덮는 것이 별 문제 없이 가능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자 임용한에 의하면 학계에선 대부분 철갑선이 아니라고 결론내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철갑선이라는 것에 집착할 필요 없으며, 철갑선이 아니리고 해서 거북선의 활약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다 라고 당부했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거북선에 대해 연구한 논문들 대다수가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것에 부정적이라는 것을 볼 때, 사실상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다라는 설은 거의 사장되어 가는 중임을 알 수 있다.

홍순구 순천향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1883년 발간된 영국 해군 보고서는 ‘고려에는 철판을 덮은 전선(戰船)이 있다’고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이순신 장군이 창제한 거북선은 세계 최초 철갑선이라고 기술하였지만 일제 식민사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하야시 다이스케가 1901년 저술한 ‘조선근세사’를 통해 영국 해군 보고서는 고려 전함은 거북 껍질처럼 판자로 덮은 것을 말한 것이고, 일본에 세계 최초 철갑선이 있었다는 내용을 발표하여 이순신 장군 거북선의 철갑을 부정했으며, 또다른 식민사학자인 아오야기 쓰나타로 또한 이순신 장군의 철갑 거북선이 식민사학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판단하여 그가 속한 조선연구회가 1916년 일본어판, 1917년 한글과 한문 등으로 ‘이순신전집’을 출판하면서 ‘이충무공전서’의 원본 그림을 사용하지 않고 저급한 표현을 의도적으로 넣어 변조했다고 주장했다.


5. 서양의 연구[편집]


한편, 외국에서도 멋있게 보이는지 묘하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파일:attachment/거북선/e0063976_4bf5661db119a.jpg

서양의 한 학자는 거북선의 모양을 위와 같이 추정하고 있다.[25] 용머리에서 포를 쏘려면 이런 구조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 이에인 딕키 외 4명이 쓴 <해전의 모든 것>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것으로 비전문가의 예측일 뿐이다. 엄연히 거북선 그림이 국내 사료에 남아 있는데 이런 당치도 않은 추정을 하는 것은 고증 오류에 불과하다. 덕분에 이 책은 훌륭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한국 독자들에게 고증 오류로 까이는 중.

저자는 이런 거북선 복원도를 내세우면서 기존의 한국 복원은 불확실한 그림 자료에만 의지했다고 주장하나, 전라 좌수영 / 통제영 귀선도가 실린 이충무공전서는 정조의 명령으로 편찬되었고 유득공의 엄격한 검수까지 거친 엄연한 관찬 서적이고[26], 이것 외에도 거북선을 묘사한 삽화 자료들 자체는 은근히 많다.[27] 전후 사정을 고려해보면 이들이 민화풍 수군 조련도만 보고 멋대로 판단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면 실록에도 이순신 당시 거북선은 도면이 전혀 남아있지않으며 이순신 당시 거북선과 많은 차이가 있다고 나온다.

네이버 캐스트의 거북선 구조 관련 글[28]

사족으로, 거북선이 서양에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에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는 거북선이 이렇게 그려져 있었다.

파일:external/kookbang.dema.mil.kr/10869.jpg

워싱턴 DC에 위치한 미 해군 박물관에 전시 중인 거북선 모형.@ 아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한국 거북선의 초기 형태는 늘씬한 게 이 모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미 해군 연구소 산하의 소식지인 USNI News에서 독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함은 어느 배냐라는 설문 조사에서는 태평양 전쟁 당시 큰 전공을 세운 미 해군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꺾고 2위를 차지했다. 1위를 차지한 배가 설문 조사 대상인 미국인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미군의 프리깃 함 USS 컨스티튜션함임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순위이다. 영문 기사번역본 참조.

[8] 오늘날 널리 알려진 거북선의 모형은 정조 대에 작성된 충무공 전서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에는 통제영 귀선과 전라 좌수영 귀선의 그림이 나오는데 통제영 귀선이 충무공이 만든 것과 닮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그림에는 거북이 머리가 비교적 크고 낮은 위치에 붙어있다. 이순신 장군의 종가에 보관된 기록에는 아예 거북 머리가 없는 것도 있다. 한편 이순신 장군이 올린 장계에는 거북이 머리에서 현자 총통을 발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9] 다만, 해골선도 그렇고, 용골이 없는 평저선이 대다수인 조선의 전투함에서 머리가 존재한 두 함의 공통점은 돌격함이라는 점이다. 즉 자리잡고 쏘는 다른 배들과 달리 상대 전열로 전진하는 몇 안되는 전함이라는 것. 즉 용머리는 아군에게 이쪽으로 전진한다는 기준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 수군은 첨저선이 주력이라 당연히 적함의 선수가 보이면 적함이 접근한다고 인식할 것이고, 그 방향에 용머리를 두어 시선을 유도하거나(충각으로 착각할 여지도 만든다) 심리적 압박을 유도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10] 참고로 남천우 박사는 사학과 출신이 아니라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의 물리학 박사다.[11] 원래 중국 북부 지역에서 주로 쓰였던 배지만, 중국 남부나 동남아 쪽에서도 사선 사용을 묘사한 사료들이 발견되었다.[12] 사실 따지고 보면 근세 유럽의 전열함이나 네덜란드의 원양 화물선인 플류트선도 바닥이 평평한 편이며, 현대 원양 화물선들을 보면 선수는 첨저라도 뒤로 갈수록 뱃바닥이 넓적하다.[13] 함수가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능력[14] 여담으로 서양 배도 용골이 있다고 항상 꽝꽝 받고 다니던 것은 아니었다. 용골이 배를 지지해 주어서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나마 그리스 / 로마의 갤리선도 조선 기술이 발달하면서 선체가 견고해지자 점점 충각이 쇠퇴해 버렸고, 이집트의 충각 공격은 예전부터 배 자체를 부수는 게 아니라 충격으로 적선의 선원들을 떨어뜨리고 빈 배를 접수하려는 목적이 주를 이루었다.[15] 목이 없는 거북선은 영화 명량 이후로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16] 박영효가 1888년에 올린 상소문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 법을 끝내 익혀서 새롭게 만들지 못했고, 배를 손질하여 더욱 정밀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그 병법과 함선이 함께 없어졌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즉, 조선 후기에도 거북선이 있기는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만큼의 거북선을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와 형태나 구조가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17] 삼나무 왜군배와 소나무 조선배가 부딪히면 조선배가 유리하겠지만,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에 따라 거북선이 운동에너지를 거의 잃지 않고 왜군배가 바스라지듯 부숴지지 않는 이상 거북선에 충격이 가해질 것이고 승무원들에게도 고스란히 충격이 전달될 것이다. 돌격선인데 충돌로 인해 속도를 손실한 것은 덤.[18] 만약 머리의 주 역할이 위압적인 형태를 이용한 기선제압 이었다면 반드시 포를 쏠 필요가 없으므로 입에서 포를 쏠 수 없는 목이 있는 거북선도 충분히 있을 법하다. 그리고 관통자로서 역할을 하려면 아래쪽에 부착시켜 배의 하면을 파괴해 침몰시켜야 하므로 배의 파손을 노린 관통자라고 보기에는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19] 확인되지 않았기에 단언할 수 없지만, 거북선 자체가 철갑선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다가 등갑에 철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무게 중심이 불안정해지는데, 가장 앞쪽에 거대한 쇳덩어리를 다는 것은 무게 중심을 더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을 것이기 금속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20] 당시기 동서양을 막론하고 강철을 주조법으로 만드는 기술은 발달하지 않았고, 주조법으로는 주철밖에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포의 재료는 대부분 청동이었다.[21] 실제 명량 해전에서는 그 직전에 일어난 기록적인 패전 때문에 이순신 휘하 함대에 거북선이 없었다.[22] 거북선에 철갑을 씌웠다는 일본 기록을 그대로 믿으려면, 거북선 외에도 조선 군함 상당수가 철갑으로 배 곳곳을 덮었다는 기록도 믿어야 한다. 이러면 논란이 더 커진다.[23]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것으로 "배는 물 위에 있으니까 화재에 비교적 안전하지 않나? 불 붙으면 금방 바닷물로 끄면 그만인걸." 이라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배, 특히 목재선의 시기에 화재는 크게 나면 상당히 골치아팠다. 당시 포탄이야 그냥 쇠구슬이라 큰 타격은 못줬지만 화재는 바다의 뜨거운 태양빛에 목재는 바싹바싹 말라붙기 마련이고 불쏘시개가 되기 쉬운 뱃밥, 방수재, 심지어 포를 쏘기 위한 화약까지 널부러져있는 배에 불이 붙으면 그냥 끝이었다.[24] 적병이 올라타지 못하도록 창칼을 박아둔데다가 장갑판을 덮어버려, 설령 올라가는 통로가 있다고 한들 해치 구조였을것이다. 좁아터진 해치를 통해 인원이 올라가서 창칼이 고슴도치마냥 박힌 상갑판 위에서 기민하게 움직이며 불을 끈다는건 불가능한 이야기다[25] 출처는 해전의 모든 것[26] 실록에서 확인 가능할 정도로 정조는 대단한 이충무공 덕후였다. 왕조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정조는 직접 "조선 천지에 이 충무공의 집안만큼은 가히 명족(名族)이라 할만하다"고 대놓고 말하기까지 했을 정도다.[27] 거북선을 그린 도자기도 있고, 이순신 종가 소장 거북선 그림도 있다. 수군 조련도 역시 일반인들에게 흔하게 알려진 민화풍 외에도 전 이의병 수군 조련도처럼 세밀하게 그려진 것도 있다.[28] 대부분 민족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거의 퍼다나르다 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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