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문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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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읍할
도적

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편집]


문을 열고 절을 하며 도둑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삼국지》에서 유래한다.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화를 불러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2. 상세[편집]


건안 5년 손책이 죽으면서 대사大事를 손권에게 맡겼다. 손권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손책의 장사長史였던 장소張昭가 손권에게 말했다.

"효렴孝廉(손권을 지칭)은 지금이 울고 있을 때입니까? 주공周公이 예법禮法을 세웠으나 그의 아들 백금伯禽이 따르지 않은 것은 아버지를 어기려 해서가 아니라, 당시에 부득이하게 예를 따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지금 간악한 자들이 각축角逐을 벌이고 있고 승냥이와 늑대 같은 자들이 길에 가득한데, 오히려 친형의 죽음에 예를 다 지키려 함은 문을 열어 도적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손권의 옷을 갈아입히고 말에 올라 밖으로 나가 군대를 순시하도록 했다.

五年策薨以事授權權哭未及息策長史張昭謂權曰孝廉此寧哭時邪且周公立法而伯禽不師非欲違父時不得行也況今姦宄競逐豺狼滿道乃欲哀親戚顧禮制是猶開門而揖盜未可以為仁也乃改易權服扶令上馬使出巡軍

삼국지 오서吳書 오주전吳主傳#


손책은 자신이 강동을 병합할 무렵, 오군태수에서 쫓겨났던 허공이 조정에 「손책을 도읍으로 소환하여 관리해야 한다」라고 상서上書한 사실을 파악하고 그를 교살했다.[1] 이후 손책은 허공의 빈객賓客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증상이 악화되면서 후사를 동생 손권에게 맡겼다.[2][3] 손책의 사후 강동의 지배구조는 불안정했지만, 권력을 승계한 손권은 상주인 까닭에 운신運身이 어려웠다.[4]

손책의 막료였던 장소가 통치체재를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임을 간하여 손권으로 하여금 상복을 벗고 군무軍務를 보게끔 했다. 또한 주유와 더불어 손권이 새로운 주군임을 확인시키고 그에게 심복心服했다.[5] 손권은 장소에게 사부師傅의 예를 갖추었고, 장수들의 업무를 나누어 맡게끔 조정하고 산월을 진무시키며 불복하는 자들을 토벌했다.[6]


3. 기타[편집]


  • 손책으로부터 대사를 맡은 손권이 곡을 하는 중에 장소가 찾아와 주례周禮를 언급했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서술은 손권이 상주喪主로 임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 후한은 유교 국가로서 상례喪禮는 출사 또는 통치 정당성에 주요한 기준이었다.[7] 손권은 갑작스럽게 권력을 승계한 까닭에 상례를 멈추고 통치행위를 시작할 경우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에게는 손견, 손책과 달리 예법을 극복할 무력기반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였다.

  • 장소는 예기 증자문曾子問에서 「주공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백금이 상주가 되었는데 변란이 일어나자 곡을 멈추고 전장에 나갔다」라는 공자의 발언을 인용함으로써 손권에게 군무 활동의 정당성을 마련했다. 이는 「지금 삼년상을 지내다가 이익을 따라 전쟁에 임하는 사람을 보며 예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라는 뒷구절을 편집한 것으로 장소가 강동에서 영향력이 높은 선비였기에 가능했다.[8][9][10]

  • 장소는 당시 회계태수직을 승계한 손권을 효렴이라 칭했다. 이는 오군태수 주치가 과거 손권을 효렴孝廉으로 추전했던 사실을 상기시켜 지지세력으로 포섭할 것을 간하거나, 우군으로 확보했음을 알리는 발언으로 추정한다. 주치는 손책을 도와 강동 병합에 공을 세우고 자신의 군세軍勢를 가지고 있었으며, 향거리선제에 따른 추천은 정치적 동맹 또는 공동체의 의미를 내포했다.[11]

  • 장소는 손권의 권력 구축에 공을 세웠지만, 적벽대전 시기에 항복을 주장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변화했다.[12] 손권은 황제 즉위식에서 장소를 공개적으로 힐난詰難했고, 공손연과의 수교에 반발하는 그에게 살해 위협을 가했으며, 승상직에 제수除授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13][14][15] 그러나 장소를 대체할 인재가 부재한 까닭에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했다.[16]

  • 제나라의 마지막 왕 전건이 정확히 여기에 부합한다. 전건은 후승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그의 빈객들을 우대했는데 이들은 진나라에게 매수된 상태였다. 이들의 말을 듣고 대책을 세우지 않은 전건은 나라를 잃고 공읍共邑으로 유폐幽閉되어 굶어죽었다.[17] 이를 두고 사마광은 「어떻게 자신의 울타리를 철거하여 도적에게 아양을 떨면서 '도적이 나를 사랑해서 공격하지 않을 거야.' 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사리에 어긋나지 않겠는가.」라고 평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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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서 손견전; 배송지주 강표전 「吳郡太守許貢上表於漢帝…策候吏得貢表以示策策請貢相見以責讓貢貢辭無表策即令武士絞殺之」[2] 오서 손견전 「策單騎出卒與客遇客擊傷策」[3] 오서 손견전 「呼權佩以印綬」[4] 오서 오주전 「是時惟有會稽吳郡丹楊豫章廬陵然深險之地猶未盡從…未有君臣之固」[5] 오서 오주전 「張昭周瑜等謂權可與共成大業故委心而服事焉」[6] 오서 오주전 「待張昭以師傅之禮…分部諸將鎮撫山越討不從命」[7] 예기집설 삼년문 「故三年之喪人道之至文者也夫是之謂至隆是百王之所同古今之所壹也未有知其所由來者也」[8] 예기집설 증자문 「子夏曰金革之事無辟也者非與孔子曰吾聞諸老耼曰昔者魯公伯禽有為為之也今以三年之喪從其利者吾弗知也」[9] 오서 장소전 「孫策創業命昭為長史撫軍中郎將升堂拜母如比肩之舊文武之事一以委昭」[10] 오서 장소전「昭容貌矜嚴有威風權常曰孤與張公言不敢妄也舉邦憚之」[11] 오서 주치전「權年十五治舉為孝廉後策薨治與張昭等共尊奉權」[12] 자치통감 권65 「張昭等曰曹公豺虎也挾天子以征四方動…愚謂大計不如迎之」[13] 자치통감 권71 「夏四月丙申呉王即皇帝位…張昭舉笏欲襃賛功德未及言吳主曰如張公之計今已乞食矣昭大慙伏地流汗」[14] 오서 장소전 「權不能堪案刀而怒曰…而數於衆中折孤孤嘗恐失計」[15] 오서 장소전 「權當置丞相衆議歸昭權曰方今多事職統者責重非所以優之也…而此公性剛所言不從怨咎將興非所以益之也乃用顧雍」[16] 오서 장소전 「後蜀使來稱蜀德美而羣臣莫拒權歎曰使張公在坐彼不折則廢安復自誇乎」[17] 자치통감강목 제2 后勝相齊與賓客多受秦間金勸王朝秦 不修戰備 不助五國攻秦…建遂降秦遷之共處之松栢之間餓而死[18] 자치통감강목 제2 「司馬公曰…烏有撤其藩蔽以媚盜曰盜將愛我而不攻豈不悖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