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 (r2판)

편집일시 :


이름
요시야
생몰 년도
기원전 648년 ~ 기원전 609년
재위 기간
기원전 640년 ~ 기원전 609년
부모
아몬(유다)
자녀
여호아하즈, 여호야김, 시드기야
종교
유대교
국적
남유다 왕국
이전 국왕
아몬(유다)
다음 국왕
여호아하즈
BC 648-609. 성경의 등장인물로 남유다의 16대 왕. 사실상 남유다의 마지막 왕.[1] 성경에 따르면 남유다 최후의 선한 왕으로, 시조인 다윗처럼 야웨를 신실히 섬기면서 종교 개혁을 이루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그 뜻을 다 펼쳐보지 못하고 비명횡사했으며, 요시야 이후 남유다는 외세의 간섭과 무능한 군주들의 콤보로 멸망하고 만다.

1. 즉위와 역사적 배경
2. 종교 개혁
3. 므깃도에서의 허무한 최후
4. 평가
5. 참고 문헌


1. 즉위와 역사적 배경[편집]


아버지는 아몬별빛으로 속삭이는 그분이 아니다이며 할아버지는 므낫세, 증조부는 히스기야이다. 할아버지 므낫세가 죽은 뒤 아버지 아몬이 왕이 되었지만, 재위 2년만에 궁정 쿠데타로 인해 살해당한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은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요시야는 쿠데타 세력을 척결한 뒤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즉위할 때 그의 나이는 고작 8세였다. 요시야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으로도 성경을 비롯한 유대 기록에서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는 무관하게, 므낫세 시대에 재건된 국가 경제의 성장과 인구 증가는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다.

요시야의 치세는 새로운 국제 질서의 태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 오리엔트의 초강대국 아시리아는 긴 흥성기가 끝나고 쇠퇴일로에 접어든 상황이었다. 아시리아 최후의 명군 아슈르바니팔의 통치 말기부터 아시리아는 스키타이와 이란 고원의 엘람, 메디아와의 끝없는 항쟁을 벌였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국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BCE 627년 아슈르바니팔이 사망하면서 제국을 분할상속한 그의 두 아들은 내전을 일으켰다. 이는 아시리아의 쇠퇴를 가속화하였고, 끝내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

아시리아가 쇠퇴하자 중동 전체는 힘의 공백에 빠졌고, 새로운 강국들이 아시리아를 대체하기 위해 일어서기 시작했다. 동쪽의 이란 고원에서는 아시리아의 적국이던 메디아가 반격에 나섰고, 아슈르바니팔에게 정복당한 엘람 역시 다시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신흥 강국은 따로 있었다. 고대의 전통적인 강국이었던 이집트와, 아시리아에게 정복당한 뒤 끝없이 독립을 추구하던 숙적 바빌로니아였다. 독립에 성공한 바빌로니아는 메디아와 연합한 뒤 아시리아를 멸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아시리아는 동지중해 지역(시리아와 레반트 지역)에 배치했던 병력을 동쪽으로 빼내야 했다. 아시리아가 물러난 동지중해는 이집트 제 26왕조의 파라오 프삼티크 1세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2]

요시야의 즉위(BCE 640)부터 그의 치세 전체는 이러한 중동 전체의 격동기와 정확히 겹친다. 이는 요시야의 고조부 아하스 시절부터 시작된 남유다에 대한 아시리아의 종주권이 끝났다는 것 뿐만 아니라, 오래 전에 멸망한 뒤 아시리아의 직할령이 된 옛 형제국 북이스라엘의 고토가 무주공산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치세는 많은 남유다인들에게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가 온 시대였다. 북이스라엘의 고토를 회복하여 히스기야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다윗솔로몬의 위대한 왕국을 재건할 절호의 기회를 잡은 시대였던 것이다. 요시야 역시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읽고 있었고, 통일 이스라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기 시작했다.


2. 종교 개혁[편집]


요시야 시대의 가장 큰 치적은 바로 종교 개혁이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요시야의 치세 이전부터 남유다 백성들의 대다수는 혼합주의(Syncretism)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이들은 현대 유대교처럼 오직 야웨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야웨도 믿고 가나안의 토착신이나 다른 지방의 신들 역시 함께 믿고 있었다.[3] 그러나 북왕국의 고토를 회복하여 통일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사업 자체가 "야웨의 뜻"이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는 일이었고, 이를 위해 국가의 역량을 결집하고 백성들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정신적 고양과 선전이 필요했다. 따라서 요시야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규모 사업을 일으켜 혼합주의를 뿌리뽑고 야웨만을 섬기는 일신주의를 확고히 정착하려 했다.

종교 개혁의 시작은 율법책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열왕기하에 따르면 요시야 재위 18년에 성전을 수리하던 도중 우연히 성전 안에 있던 율법서를 발견했고, 이를 읽은 왕이 조상들의 죄를 디스하며 회개하고 율법서를 기반으로 이방 신상의 철거, 예배 방식의 정화, 유월절 같은 유대교의 절기 준수 등의 대규모 개혁을 행하였다고 한다. 이때 "발견된" 율법서는 구약 성경의 핵심인 모세오경, 그 중에서도 신명기의 원형으로 여겨지는데, 모세오경 중에서도 신명기에서 묘사된 성소에서의 유월절 제사가 율법서 발굴 이후 그대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4] [7]

이러한 종교 개혁은 옛 북왕국의 영토였던 벧엘에서도 이루어졌다.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시조인 여로보암 1세가 초기에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여로보암은 이곳에 자신만의 성전을 세웠는데, 요시야는 이 짜가성전의 제단과 산당을 헐고 무덤을 파내 해골을 제단 위에서 불태우면서 고인드립을 시전했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오직 예루살렘의 성전만이 야웨 일신주의 신앙의 정통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자연스럽게 권력을 예루살렘에 있는 왕에게 집중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또한 이를 통해 요시야 시대 남유다가 북왕국의 고토를 어느 정도 수복하였고 그 배경이자 원동력에는 종교적 열정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상당히 강력했던 요시야의 개혁도 근본적으로 민중들의 영적 세계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민중들의 일상생활 속에 혼합주의적 다신교는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우선 고고학적으로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정말로 성경에 기록된 것만큼 크고 철저하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위에서 서술한 정화 의식과 고인드립이 행해졌던 벧엘의 제단과 산당은 현재까지도 전혀 발굴되지 않고 있기도 하고. 또한 7세기 말엽의 거주지에서는 여전히 가슴을 손으로 받친 채 서있는 여신[8]의 작은 조각상이 발굴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남유다 민중들의 신앙을 하루아침에 일신주의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9] 오히려 종교 개혁은 요시야 당대가 아닌 후세에 더 잊혀지지 않을 업적이 되었다. 이 시대에 확립된 모세오경은 이후 유대교가 체계적인 일신교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유대교를 뿌리로 한 기독교와 이슬람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종교 개혁의 의의는 정치적, 사회적인 성과에서도 찾을 수 있다. 먼저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종교적 권위를 통합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전하였다. 이는 종교적인 중앙집권화이자 왕권의 강화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신명기에서 나타나듯, 종교 개혁은 사회 제도의 개혁을 동반하였다. 여러 선지서에서 이야기하듯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나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빈부의 격차,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 힘 있는 자들의 횡포가 문제가 되었는데, 신명기에서는 약자를 보호하고 법에 따른 사회 정의를 구축하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신명기가 요시야 시대에 쓰여진 것이라면, 종교 개혁은 단순히 신앙적인 개혁이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복지와 정의, 공정함을 세우려고 했던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므깃도에서의 허무한 최후[편집]


요시야의 치세는 그 이전 어떤 유다 왕의 치세보다 성공적이었다. 그는 벧엘과 같은 옛 북이스라엘 지역으로 어느 정도 영토도 확장하고, 이를 위해서 국가와 종교 시스템의 개편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요시야는 야웨 신앙의 선지자들뿐 아니라 상당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야말로 남유다를 구원할 살아있는 메시아 수준으로 여겨진 듯하다. 이 때가 말 그대로 요시야의 리즈시절이었다.

그러나 요시야의 전성기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끝나고 만다. BCE 610년 이집트의 파라오 프삼티크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네코 2세가 뒤를 이었다. 이 당시 중동의 정세는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 연합군의 공격에 망해가던 아시리아는 BCE 612년 결국 수도 니네베를 잃어 결정타를 맞았다. 아시리아의 잔당들은 현재 터키 동남부에 있는 고대 도시 하란으로 달아나 항거하며 이집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마침 프삼티크 1세가 사망하고 갓 네코 2세가 즉위한 이집트는 제때 구원을 갈 수 없었고, 결국 하란 역시 BCE 609년 함락되고 근교에 있던 이집트 주둔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네코 2세는 즉위 이후 정국을 안정시키자마자 군대를 끌고 동방으로 출정에 나섰다. 목표는 이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아시리아의 잔당과 힘을 합쳐 하란을 되찾고, 아시리아를 도와 상승세를 탄 신바빌로니아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파라오의 출정은 엉뚱하게도 남유다와 요시야의 운명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열왕기하의 기록에 따르면 네코 2세의 이집트군이 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려고 할 때 요시야가 그를 만나러 갔으나, 므깃도에서 파라오가 그를 만난 뒤 죽였다고 서술한다. [10] 한편 역대하에서는 좀더 자세하고 비장하게 기록되어 있다.

요시야가 이렇게 성전을 바로잡은 다음이었다. 이집트 왕 느고가 유프라테스 강가 가르그미스[칼케미쉬] 전투에 참가하려고 출병하였다. 그를 막으려고 요시야가 출동하자 느고는 사절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유다 왕이여, 당신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소? 나는 오늘 당신을 치러 온 것이 아니고 나와 싸움이 벌어진 왕실을 치러 가는 것이오. '어서 가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가는 길이오. 나와 함께 하시는 신의 손에 멸망하지 않으려거든 길을 막지 마시오." 그러나 요시야는 길을 비켜주기는커녕 도리어 변장하고 싸우려고 하였다. 느고의 말은 친히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는데 그 말을 듣지 않고 므기또[므깃도] 골짜기로 진군하다가 요시야 왕은 적의 궁수들이 쏜 화살에 맞았다. 왕은 부하들에게 명하였다. "나를 여기에서 빼내어라. 내가 크게 다쳤다." 왕은 부하들의 부축을 받아 병거에서 내려 부사령관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숨을 거두었다. 그는 온 유다와 예루살렘이 슬퍼하는 가운데 선조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 역대하 35장 20-24절(공동변역 개정판)


위의 인용처럼 역대하에서는 요시야가 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행군하는 네코를 가로막았고, 이에 네코는 요시야와 싸울 의지가 없음을 표하며 길을 내달라고 했지만, 요시야는 이를 듣지 않고 므깃도에서 이집트군과 전투를 벌인다. 전투 와중에 요시야는 화살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기록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기록이 요시야의 진짜 최후에 가까운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성서학자들은 대체로 역대하의 기록처럼 므깃도에서 실제로 전투가 일어났다고 보고 있으며, 일부는 요시야가 외교적인 혜안으로 신바빌로니아의 승리를 예견하고[11] 미리 신바빌로니아 쪽에 줄을 서서 네코의 이집트군을 막으려고 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학자들은 열왕기의 "만나다"라는 단어 역시 전장에서의 조우를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열왕기의 기록에 더 무게를 둔다. 이들이 열왕기의 기록을 더 신뢰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남유다의 군대는 당대 강국 중 하나인 이집트군과 전투를 벌이기에는 규모와 장비 면에서 크게 부족했다. 남유다는 이미 죽은 프삼티크 1세 시절에 사실상 이집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는 상태였다(물론 반독립 상태이긴 했지만). 남유다의 군비 역시 이집트에게 직접 통제를 받았거나, 직접적인 제한이 없었다고 해도 이집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크게 팽창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 역대기의 전투 묘사와 요시야의 최후가 지나칠 정도로 이전에 묘사된 아합의 최후와 비슷하다. 아합이 선지자 미가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투를 벌였듯이, 요시야도 네코의 전언을 통해 나온 야웨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투를 벌인다, 아합이 전투 직전 동맹인 남유다 왕 여호사밧을 자기로 꾸미고 자신은 일개 병졸로 변장했듯이, 요시야 역시 전투 전에 변장했다고 서술된다. 이뿐 아니라 둘 다 화살에 맞아 죽었으며, 화살에 맞은 뒤에 하는 말도 매우 유사하다.[12] 이러한 유사성을 봤을 때 요시야의 므깃도 전투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닌, 아합의 최후를 문학적으로 변주한 것에 불과하다.
  • 아직까지 므깃도 전투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전무하다.

대체로 고고학자들은 열왕기의 기록을 신뢰하는 편이다. 에릭 클라인(Eric H. Cline)은 므깃도에서 실제로 전투가 없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핑켈슈타인이나 나답 나아만(Nadav Naaman) 같은 경우는 열왕기의 기록대로 아예 전투가 없었을 것으로 여기며,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네코와 만난 것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네코가 동지중해 연안의 봉신들에게 주종관계를 재확인하고 충성 서약을 받기 위해 요시야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면, 왜 요시야가 살해당했는지는 알 수 없고,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요시야가 신바빌로니아와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가 슬금슬금 북이스라엘 고토로 영토를 넓히던 것이 파라오의 심기를 건드렸을지도 모른다. 바룩 핼펀(Baruch Halpern)은 네코가 아라비아와의 무역에 독립적으로 뛰어들려던 요시야의 정책에 불만을 갖고 그를 죽였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이 모든 미스터리 중에서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요시야가 네코에게 죽었다는 것이며, 그와 함께 통일 이스라엘과 메시아의 재림이라는 꿈은 그대로 끝장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BC 609년 요시야가 39세를 일기로 네코 2세에게 살해된(혹은 전사한) 뒤, 왕위는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 치세는 3개월 만에 이집트군의 공격을 받아 끝장났다. 네코 2세는 남유다에 엄청난 공물을 부과하고 여호아하스를 폐위한 뒤, 그의 동생 엘리아김을 여호아김으로 개명하고 꼭두각시 임금으로 앉혔다. 이후 남유다는 독립적인 지위를 잃고 외세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놓였으며, 바야흐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4. 평가[편집]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 분명 시대는 잘 타고났고 요시야 본인도 그러한 시류를 잘 읽어 종교 개혁과 중앙집권, 영토 확장같은 업적을 남겼고, 좀더 오래 살았다면 다윗이나 솔로몬급의 명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요시야는 그가 가진 원대한 꿈을 아직 다 펼쳐보이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죽었고, 최후의 명군을 잃은 남유다는 급격히 멸망으로 기울고 말았다. 만약 요시야가 일각의 주장대로 신바빌로니아와 연계하여 이집트와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라면, 그가 조부 므낫세에 버금가는 외교적 혜안을 지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후 오리엔트의 패권국이 된 것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신바빌로니아였기 때문이다. 제대로 판세를 읽었음에도 결국 국가간 체급의 차이와 군사력의 격차를 뒤집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을 듯. 물론 므깃도 전투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종교 개혁으로 내정을 정비하고 사회 제도를 재편했으며 영토를 확장해보려 했던 것은 분명한 치적이다.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치적을 남겼지만 성경에서는 폭군으로 단죄된 조부 므낫세와는 달리, 요시야는 완벽하게 선한 왕으로 성경에서 극찬을 받는다. 아니, 다른 나름대로 선하다고 평가받는 왕들에 비해서도 거의 독보적인데 초대 군주인 다윗의 경우, 밧세바와의 간통, 인구조사 등으로 사고를 쳤고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는 3대로 처음에 그럭저럭 정직하게 사는듯 하다가 말년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대대적인 종교개혁으로 좋은 평가를 들었던 조부 히스기야조차도 외국에 자신의 재부를 자랑하는 바람에 꾸중을 들었는데 요시야 만큼은 부정적인 평가를 성서에서 찾을 수 없다. 그의 시대에 종교 개혁이 일어나 일신주의가 흥성하게 된 것을 보면 당연한 성경적 평가라고 할 수 있다.[13] 핑켈슈타인은 그의 시대에 모세오경이 쓰여졌던 점과 일신교적 성격이 강조된 것에 착안하여, 요시야 시대에 현재의 유대교가 처음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을 보면 성경 전체에서도 결코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는 인물.

자식 농사는 완전히 말아먹었고 다들 그 끝이 별로 좋지 못했다. 여호아하스, 여호아김, 그리고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까지 모두 외세에 의해 옹립되거나 폐위되어 끌려가는 꼴을 면치 못했고, 셋 모두 아버지만한 능력이나 외교적 안목도 없어서 위기에 몰린 나라를 그대로 말아먹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자식들이 잘못한 것이니 요시야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 어쨌든 이런 후손들의 말로를 보면, 요시야가 독립국의 군주로서 실권을 행사했던 실질적인 남유다(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참고 문헌[편집]


Finkelstein, Israel and Silberman, Neil A. The Bible Unearthed: Archaeology’s New Vision of Ancient Israel and the Origin of Its Sacred Texts. New York: Free Press, 2001. p243-250

Hardmeier, Christof. "King Josiah in the climax of the Deuteronomic history (2 Kings 22-23) and the pre-Deuteronomic document of a cult reform at the place of residence (23.4-15) : criticism of sources, reconstruction of literary pre-stages and the theology of history in 2 Kings 22-23" in Good Kings and Bad Kings. Edited by Lester Grabbe, 2005.

Na'aman, Nadav. "Josiah and the kingdom of Judah" in Good Kings and Bad Kings. Edited by Lester Grabbe, 2005

Sweeney, Marvin A. King Josiah of Judah : the lost messiah of Israel.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1] 요시야 이후에도 4명의 왕이 더 있긴 했지만, 모두 외국의 입김에 의해 즉위하거나 폐위당했다. 결국 요시야는 독립국의 군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마지막 군주이다.[2] 아시리아가 포기한 지역을 이집트가 날로 먹었다고도 볼 수 있고, 이후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공조가 이루어지는 것을 바탕으로 양국 사이에 아시리아가 동지중해 지역을 이집트에게 할양하는 대신 군사 원조를 받기로 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3] 좀 더 부연하자면, 가나안의 토착신이며 주신이던 바알을 야웨로 동일시하거나 대체해서 믿는 등, 야웨를 아예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야웨를 주신(主神)으로 삼아 다른 여러 신들을 함께 섬겼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아예 초기 유대교는 다신교였으며, 야웨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여러 신들의 주신이었고, 일신교적 성향이 강해지면서 다른 여러 신들은 천사 등으로 격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4] 그러나 이 갑툭튀 율법서가 정말 요시야 이전 시대에 기록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고고학자 핑켈슈타인(Finkelstein)에 따르면 신명기에서 묘사되는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 언약의 문학적 형태가 BCE 7세기 아시리아와 종속국 사이의 조약문과 유사하며, 성서역사학자 모세 와인펠드(Moshe Weinfeld)는 연설문과 행사를 통해 신의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명기와 초기 그리스 문학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요시야의 율법서는 그 시기에 우연히 발견된 옛 문서가 아니라, 요시야의 치세 혹은 그 직전에 작성된 당대의 문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5] 유다, 너는 네 형제들의 찬양을 받으리라. 네 손은 원수들의 멱살을 잡겠고 네 아비의 자식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지휘봉이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참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분이 와서 만백성이 그에게 순종하게 되리라 - 창세기 49장 8~12절, 공동번역성서[6] 아시리아가 망조가 든 뒤 누가 남유다를 포함한 동지중해 지역을 석권했는지 생각해보자.[7] 이러한 설은 모세오경의 내용에서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유독 유다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12아들 중 하나인 유다가 축복을 받는 것이나 [5] 출애굽기는 강력한 이집트의 파라오에 맞서 승리하고 해방을 맞이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6]을 보면...[8] 보통 가나안의 토착신인 아세라로 여겨진다[9] 그래서 기독교측에서는 요시야의 개혁이 불완전했으며, 므낫세가 이 정도 개혁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야웨의 용서를 받아 멸망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10] KJV나 개역개정 등에서는 요시야가 네코(한글 성경에서는 느고로 나옴)와 "맞서러 나갔다(went against)"고 서술되어 있다. RSV와 NRSV에서는 단지 만나러(meet)이라고 써 있고, 불가타 역본에서는 occursum(만나다, 조우하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대체로 열왕기의 묘사가 요시야가 네코와 싸우러 올라갔다기보다 단순히 만나러 갔다고 해석한다. 히브리어 원본이나 직역성경 등을 가진 분들의 추가바람[11] 네코 2세는 요시야를 죽인 뒤 북상하여 아시리아의 잔당과 합류하고 하란을 탈환하려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BCE 605년 다시 출정한 네코 2세의 이집트군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직접 끌고 온 신바빌로니아군과 칼케미쉬에서 전투를 벌여 대패한다. 이것으로 아시리아는 완전히 멸망하고, 네코 2세는 이집트로 철수한다. 이후 시리아와 동지중해는 신바빌로니아에게 정복되어 이집트의 패권은 무너진다.[12] 둘 다 "내가 부상을 당했으니 나를 전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한다.[13] 물론 요시야가 아무리 열심히 야웨를 섬겼어도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므낫세가 너무 똥을 많이 퍼질러서 화가 단단히 난 야웨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다만 야웨는 요시야 시대에 나라가 망하는 꼴만은 면하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