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시야 (문단 편집) == 즉위와 역사적 배경 == 아버지는 [[아몬(유다)|아몬]]이었으며 할아버지는 [[므나쎄(유다)|므낫세]], 증조부는 [[히즈키야]]였다. 할아버지 므낫세가 죽은 뒤 아버지 아몬이 왕이 되었지만, 재위 2년만에 궁정 쿠데타로 인해 살해당했다. 하지만 쿠데타 세력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요시야는 쿠데타 세력을 척결한 뒤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즉위할 때 그의 나이는 고작 8세였다. 요시야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으로도 성경을 비롯한 유대 기록에서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는 무관하게, 므낫세 시대에 재건된 국가 경제의 성장과 인구 증가는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다.[* 예시로 요시야의 업적도 므낫세 시대의 성장이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요시야의 치세는 새로운 국제 질서의 태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 오리엔트의 초강대국 신[[아시리아]] 제국은 긴 흥성기가 끝나고 쇠퇴 일로에 접어든 상황이었다. 아시리아 최후의 명군 [[아슈르바니팔]]의 통치 말기부터 아시리아는 [[스키타이]]와 이란 고원의 [[엘람]], [[메디아]]와 끝없는 항쟁을 벌였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국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627년 아슈르바니팔이 사망하면서 제국을 분할상속한 그의 두 아들은 왕위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이는 아시리아의 쇠퇴를 가속화하였고, 끝내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 아시리아가 쇠퇴하자 중동 전체는 힘의 공백에 빠졌고, 새로운 강국들이 아시리아를 대체하기 위해 일어서기 시작했다. 동쪽의 이란 고원에서는 아시리아의 적국이던 메디아가 반격에 나섰고, 아슈르바니팔에게 정복당한 엘람 역시 다시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신흥 강국은 따로 있었다. 고대의 전통적인 강국이었던 [[이집트]]와, 아시리아에게 정복당한 뒤 끝없이 독립을 추구하던 숙적 [[신바빌로니아]]였다. 독립에 성공한 신바빌로니아는 메디아와 연합한 뒤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아시리아는 동지중해 지역(시리아와 레반트 지역)에 배치했던 병력을 동쪽으로 빼내야 했다. 아시리아가 물러난 동지중해는 이집트 제 26왕조의 파라오 프삼티크 1세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아시리아가 포기한 지역을 이집트가 날로 먹었다고도 볼 수 있고, 이후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공조가 이루어지는 것을 바탕으로 양국 사이에 아시리아가 동지중해 지역을 이집트에게 할양하는 대신 군사 원조를 받기로 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의 즉위(기원전 641년)부터 그의 치세 전체는 이러한 중동 전체의 격동기와 정확히 겹친다. 이는 요시야의 고조부 [[아하스]] 시절부터 시작된 남유다에 대한 아시리아의 종주권이 끝났다는 것 뿐만 아니라, 오래 전에 멸망한 뒤 아시리아의 직할령이 된 옛 형제국 북이스라엘의 고토가 무주공산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치세는 많은 남유다인들에게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가 온 시대였다. 북이스라엘의 고토를 회복하여 히스기야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왕국을 재건할 절호의 기회를 잡은 시대였던 것이다. 요시야 역시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읽고 있었고, 통일 이스라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기 시작했다.[* 요시야 대에 유다가 옛 영토의 일부를 탈환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도 612년, 아시리아는 신바빌로니아, 스키타이, 메디아, 킴메르,'''유다''', 엘람, 킬리키아 연합군에게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