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S./활동/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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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정규 1집

S.E.S.
(1997.11.24)

정규 2집

Sea & Eugene & Shoo
(1998.11.23)

정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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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0.29)

정규 4집

A letter from Greenland
(200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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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4.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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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14)

리믹스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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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싱글

Love [story]
(2016.11.28)

스페셜 20주년 기념

REMEMBER
(2017.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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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진출 과정
4. 저조 원인 추측
4.1. 장르 차별화
4.2. 언어의 벽
4.3. 기획사 선정
4.4. 레이블 선정
5. 활동 결과
6. 레귤러 출연
7. 뮤직 비디오
8. 여담


1. 개요[편집]


S.E.S.의 일본 활동을 정리하는 문서이다.


2. 상세[편집]


S.E.S.는 1997년 데뷔한 이후 여성판 H.O.T.라고 일컬어지며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당시는 한류가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서서히 퍼져나갈 무렵이었고, 1998년 당시엔 경제적으로도 한국이 IMF 외환위기로 어려웠던 시기였던만큼 연예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염두에 뒀거나 진출을 노려보던 시기이기도 했다.#

S.E.S.는 처음부터 재일교포 나 재미교포 출신 유진을 영입해서 만들어진 만큼 애초부터 해외 진출을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원래는 중국어가 가능한 맴버까지 포함시키려 했으나 결국엔 무산되었다.#

그러던 와중 국내에서 고작 데뷔 3개월이 지난 1998년 2월, SM은 S.E.S.의 일본 진출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으며, 1998년 하반기에 본격적으로 일본 활동을 진행하였다.

당시 일본대중문화 비평가 김지룡은 일본 진출에 있어 노래만 잘해서는 성공하기 힘들고 일본어는 필수라며 S.E.S.의 성공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3. 진출 과정[편집]


이수만 프로듀서는 앞으로 아시아에서 중국이 가장 큰 마켓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H.O.T. 때부터 중국에 진출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일본 음악 시장이 아시아에서 가장 컸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해보자는 의미에서 진출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 데뷔곡인 <I'm Your Girl>로 데뷔하려고 했으나, 현지 프로듀서는 "이런 음악은 안 통해. 우리 음악으로 진행하자"라며 조언 하였고, 그 방향대로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였고 이 경험에서 이수만은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S.E.S.는 국내 최고 인기 걸그룹이었기 때문에 팬들의 기대는 대단했다. 언론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앨범 판매 상황이나 '일본 최고 여성 그룹을 노린다'는 등의 여러 기사를 쏟아내었다.#

이런 기대감 때문인지 출처 불분명한 당시 일본 최고의 걸그룹이었던 SPEED의 프로듀서 이지치 히로마사가 S.E.S.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극비 내한을 통해 먼저 제의를 해왔다는 이야기와 회사 규모가 더 컸기 때문에 스카이 플래닝과 계약을 했다는 설까지 여러 이야기가 나돌았다.


4. 저조 원인 추측[편집]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S.E.S.의 일본 진출은 성공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4.1. 장르 차별화[편집]


S.E.S.가 한국에서 데뷔와 동시에 그렇게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월메이드 걸그룹이었다는 점이 효과적으로 어필했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들도 여자 가수들이 기를 못 피는 곳이 한국 시장인데, S.E.S.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앙증맞으면서도 당돌하며, 세련된 뉴잭스윙 장르로 음악시장을 공략했으며 # 빼어난 미모와 깜찍한 몸짓으로 인기를 끈다고 분석하였다. #

당시 한국 쪽 상황과 달리 당시 일본 쪽은 걸그룹 시장이 포화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 측에서 만든 곡을 그대로 부르는 가수였기 때문에 독창성이 떨어진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4.2. 언어의 벽[편집]


언어 쪽의 문제도 절대 해결됐다고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가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한다고 해도 S.E.S.는 그것 만으론 결코 만족스러운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S.E.S.의 리드보컬은 가 아니라 바다이며, 가 아무리 일본어에 능숙해도 노래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하이라이트를 맡아야 하는 바다가 가사 전달을 제대로 해낼 수 없으면 노래의 호소력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당시 바다의 미숙한 발음은 일본인들에게 많이 지적 받았던 부분이다. 'S.E.S.의 일본 노래를 일본에 사는 친구에게 들려줬는데 노래 가사가 어떤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팬클럽 게시판에까지 올라올 정도였으니 바다의 일본어 발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능한 대목이다.

언어 장벽이 문제가 되는 건 노래 부를 때 뿐만이 아니다. 곡을 띄우는 것 보다 가수 자체를 띄우는 게 목적인 S.E.S. 같은 아이돌 그룹은 노래만 잘해서는 쉽게 어필하기 어렵다. 이런 그룹들은 쇼프로를 나오든 광고를 나오든 할 것 없이 TV에 부지런히 나와 얼굴을 자주 보여줄수록 유리하다. 필요에 따라선 쇼프로에 나와서 얘기도 재밌게 해야 하고 웃기기도 해야 하고 연기도 잘해야 한다.

하지만, S.E.S.는 그런 점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매번 쇼프로에 출연할 때마다 혼자서만 떠들어대고, 유진바다는 자유자재로 의사표현을 하지 못 하는 모습이 일본 시청자들에게 크게 어필 됐을리는 만무하다. 얼핏 보기에 완벽한 듯 보였던 S.E.S.의 조건은 이렇게도 많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온 가창력까지 겸비한 걸그룹'으로 컨셉을 잡아 대형 프로모션 위주의 활동을 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수도 있으나. 그건 그것대로 후술할 '기획사'의 역량 문제와 얽혀있었다.


4.3. 기획사 선정[편집]


그동안 신중한 행보를 보여왔던 SM엔터테인먼트 역시 이 때 만큼은 신중하지 못했다. 이후 S.E.S.의 일본 진출에 대해 얘기할 때 SM엔터테인먼트는 중대한 두 가지 실수를 범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첫 번째 실수는 S.E.S.의 일본 내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기획사로 '스카이 플래닝'을 선택한 것이다. 한국 신문들은 일본 연예업계 5위권 내의 거대 기획사와 계약했다며 흥분된 어조의 기사를 매번 보도했지만 이 계약부터가 그리 현명하지 못한 것이었다. 애초에 스카이 플래닝은 연기자, 모델 중심의 회사였지 가수를 전문적으로 매니지먼트하는 회사가 아니었다.[1]

당시 세계 2위 규모였던 일본 음반 시장에서 홍보는 절대적인 변수였다. 차트가 몇 백 위까지 매겨지고 하루에 발매되는 싱글의 수만 해도 엄청난 일본에서 뮤직비디오 제작과 음반 발매만으로는 곡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가수들이 다 타이업하고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가수 매니지먼트에 익숙하지 않았던 스카이 플래닝에 몸담았던 S.E.S.가 그런 홍보에서 불리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데뷔곡 〈めぐりあう世界〉가 지상파 닛폰 테레비의 <빙글빙글 나인T나인> 엔딩 테마로 두 달간 사용됐다고 하지만, 각종 인기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CF, 영화, 게임 등의 삽입곡들이 순위를 휩쓰는 일본에서 이 정도의 홍보가 그다지 약발이 먹히지 않았음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스카이 플래닝에서 담당했던 S.E.S.의 이미지 연출에 대한 얘기 역시 빼놓고 지나갈 수 없다. TV 연예정보 프로에서 S.E.S.의 일본 활동 모습을 처음 접했던 한국 팬들의 실망감은 이로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에서의 S.E.S.는 한국에서 활동할 때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단정했던 유진의 생머리는 색색의 머리끈과 함께 요란하게 틀어올려졌고, 바다의 귀여운 애교머리는 부풀려진 채 양쪽으로 묶여졌다. 의상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민소매의 탑을 걸치고 배꼽까지 노출되는 반짝이 의상을 입은 S.E.S.의 모습은 그때까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팬들의 기대와 달라 실망이 대단했다.


4.4. 레이블 선정[편집]


SM엔터테인먼트의 두 번째 실수는 VAP라는 레코드 회사와 음반 배급 계약을 맺은 것이다. 계약 기간 등의 문제로 당초 계약을 진행했던 소니뮤직과의 교섭이 결렬되자[2] 다른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할 것이라며 계약을 체결했던 레이블이 바로 VAP이다.

하지만, VAP는 메이저 레이블이라고 할 수 없는 규모의 레코드사였으며 S.E.S.를 영입하기 전까지 이 음반사의 싱글차트 최고 기록은 93위에 불과했다. 시장 점유율이나 판매율에서 소니같은 레이블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회사였던 것이다.

한국 음악계에서는 기획사가 거의 모든 지원을 하고 음반사는 말 그대로 음반의 유통만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본 음악계에서는 음반사가 음반을 직접 홍보하고 방송 프로모션 일정도 조정하는 등 음반사의 역할이 매우 크다[3]. 한국에서야 중소규모 음반사를 통해 음반을 발매해도 크게 지장이 없지만 일본에 진출하면서 VAP와 같은 소규모 음반사를 파트너로 선정한 것은 매우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여성 아이돌 가수의 성공 실적이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S.E.S.를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없었다. 빵빵한 회사에서 팍팍 밀어줘도 승산이 있을까 말까한 상황에서 계약까지 제대로 맺지 못했으니 장밋빛 성공을 보장받은 것처럼 보였던 S.E.S.의 앞날은 이렇게 험난한 가시밭길을 예고하고 있었다. [4]


5. 활동 결과[편집]


1집 활동 이후부터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는 했지만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5]

S.E.S.는 한국에서는 세련된 음악과 신비로운 요정 이미지로 정상급 인기를 누리는 최고의 걸그룹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이수만의 희망과 달리 현지의 여느 걸그룹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S.E.S.의 일본 내 마케팅 포지션 및 파트너의 역량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S.E.S.의 일본 소속사였던 스카이 플래닝이 일본 시장에 S.E.S.를 맞추기 위해 그저 그런 수준의 걸그룹으로 S.E.S.의 개성과 특징을 하향시킨 탓이었다.

더군다나 S.E.S.의 일본 내 활동을 위한 계약에는 치밀한 검토가 부족했던 탓에 S.E.S.의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SM엔터테인먼트로 들어오는 수입은 보잘 것 없었다. 이수만이 S.E.S.를 일본에 진출시켜서 누리는 혜택이라고는 현지의 시장 상황에 대한 정보를 한국 내 경쟁업체들보다 먼저 취득할 수 있다는 정도뿐이었다. 일종의 테스트 파일럿이었던 셈이다.

이후 SM엔터테인먼트는 다른 가수들을 차후에 일본으로 진출시킬 때는 S.E.S.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고, S.E.S.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내내 부딪치게 된 언어상의 한계를 직접 목도하면서 SM엔터테인먼트가 추후 일본에 내놓을 다음 가수에게는 데뷔하기 전에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갖춰 놓도록 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비록 S.E.S. 자체는 큰 성공을 이루지 못했지만, SM 입장에선 다음 주자인 보아의 성공을 이끄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 활동이 마냥 허송세월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라, 4집 <감싸 안으며>는 일본에서의 라이브 활동이 바탕이 되어 많은 무대를 라이브로 선보였다.


6. 레귤러 출연[편집]


  • 1998년 4월 한 달 동안 NHK의 신설 음악 프로그램 《青春のポップス (청춘의 팝스)》에 레귤러로 출연하여 엔딩테마 라이브 무대를 선보였었다. 영상.

  • 일본 진출 초창기부터 활동 마무리 시점까지 니혼 TV의 간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THE 夜もヒッパレ(요루모힛빠레)》에 자주 출연하였다. 공연 영상 정리글.

  • 1999년 4월부터 일본 계약이 끝날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FM 라디오국 중 하나인 Bay FM의 《Precious harmony》의 레귤러로 발탁돼 코너 〈Artist Paradise〉를 진행하였다. 해당 코는 매주 토요일마다 10분 정도 간단한 토크와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였다. 동년 9월부터는 인기에 힘입어 시간대가 금요일로 변경되었고, 방송 시간도 대폭 늘어난 30분을 배정받았다.

  • 1999년 5월부터 약 6개월 가량 후지 TV의 신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戀ボ-ル 戀ガ-ル(코이보루코이가루)》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였다.


7. 뮤직 비디오[편집]








  • 싱글 3집 愛という名の誇り (1999)



  • 싱글 4집 T.O.P. (1999)

  • 싱글 5집 Sign Of Love (1999)



  • 싱글 6집 Love (2000)

  • 싱글 7집 Lovin' You (2000)




8. 여담[편집]


  • 1998년 08월 28일, 도쿄 롯폰기에 위치한 클럽 벨파레에서 데뷔 싱글 발매를 기념하는 단독 쇼케이스를 개최하였다. 해당 공연에는 악천후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관객, 음악 프로듀서, 매스컴 관계자, 음반 도매상 등 각계 각층에서 1천 여명의 관객이 운집하였다.

  • 1998년 10월 21일에 발매된 데뷔 싱글 〈めぐりあう世界〉가 발매 첫 주 오리콘 주간차트에서 37위를 기록하였다. 이는 조용필, 계은숙, 김연자 등의 엔카 계열의 한국 가수 외에 J-Pop 장르로 진출한 한국 가수 중 역대 최고의 기록이었다. 또한, 그 주 발매된 신인 가수들의 싱글 중에서 유일하게 차트에 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 めぐりあう世界〉가 싱글 발매 첫 주에 일본 타워 레코드 시부야 점 싱글 판매 주간차트에서 3위를 기록하였다.

  • 도매점 출하량 기준으로 한국 가수가 일본에서 50,000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돌파한 것은 서태지에 이어 두 번째다. 앞서 서술된 것처럼 해당 기록은 오리콘 차트 판매량 기록이 아니다.

  • 2번째 싱글 〈夢をかさねて〉가 일본 니혼 TV 계열의 음악 차트 프로그램 《CD GROOVE XX》에서 2주간 1위를 기록하였다.

  •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으며 레이블 홍보에 크게 기여한 점을 높이 사 VAP 레코드로부터 감사패를 수상하였다.

  • 5번째 싱글 〈Sign of Love〉가 제78회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 이미지 송으로 선정되었다. 해당 기록은 외국 가수로서는 사상 최초의 사례였다.

  • KBS 국제방송에서 실시한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한국 가수 설문조사에서 3위에 뽑힌 적이 있다.[6]

  • 2000년 5월, 일본 소속사 스카이 플래닝 측에서 모집한 일본 공식 팬클럽 HANA가 결성되었다.

  • 일본 2집 앨범 《Be Ever Wonderful》이 San Jose 키노쿠니야 미쯔와점(레코드점)의 2000년 상반기 앨범 매상에서 14위를 기록하였다.

  • 후지 TV가 기획한 뮤지컬 《동아비련》에 가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돼 일본 6인조 그룹 V6의 멤버 이노하라 요시히코와 함께 무대에 섰다. 이 때의 인연으로 이노하라 요시히코는 <Just a Feeling>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였다. 는 일본 남성과 비극적인 사랑을 하다가 죽은 뒤 다시 태어나 옛 연인과 재회하는 한국인 여자 역으로 분해 열연을 펼쳤다. 《동아비련》은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초연된 이후 6개 도시에서 앙코르 공연을 가지는 등 총 11만명의 관객 동원 기록을 썼다. 서울에서도 공연된 적이 있다.

  • Heyx3에 출연하여 친한 일본 연예인으로 知念 里奈(ちねん りな, 치넨 리나)를 꼽았다.

  • 당시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걸그룹이었던 S.E.S.와 SPEED는 일본 방송에 함께 몇 번 출연한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하였다.

  • 2011년 6월 24일 'babypunksbabypunks'라는 닉네임을 쓰는 일본인 네티즌이 유튜브에 <(愛)という名の誇り> 음원을 올렸는데, 현존하는 음원들 중에서는 음질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해당 음원 링크

  • 일본에서 발매한 곡들은 저작권 문제로 한국 음원 사이트에서는 제공되지 않고 있다. 많은 팬들이 한국 음원 사이트에서도 들을 수 있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지만, 저작권에 엄격하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본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하여 쉽지는 않아 보인다
(VAP측에서 한국지역에서 일본 정규1집 REACH OUT의 유튜브 뮤직 스트리밍 지역제한을 풀어 유튜브 뮤직으로 들을 수 있다 )
해당 음원 링크
[1] 마치 개그맨 전문 기획사에서 영화배우를 데뷔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업종도 다르고 접근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2] 전속기간이 짧아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계약이 무산되고 만다. 소니 측에서는 S.E.S.와 7년의 계약 기간을 요구했지만 SM엔터테인먼트와 S.E.S.의 계약 기간이 5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요구 조건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3] 그래서 일본 가수들은 기획사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와 음반사에서 운영하는 사이트로 공식 홈페이지가 두 개인 경우가 많다.[4] 여기에서 교훈을 얻어 뒤에 일본에 진출하는 보아나 동방신기는 대형 음반사인 에이벡스 트랙스와 계약을 하게 된다.[5] 정규 앨범 발매 후 곧 베스트 앨범이 발매되는 성공하지 못한 가수의 흔한 절차를 밟게 된다.[6] 1위는 조용필, 2위는 김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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