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Y 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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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Y 묘조(D3Y1-K 明星)
1. 제원[편집]
승무원 : 2명
전장 / 전폭 / 전고 : 11.51 m / 13.92 m / 3.30 m
익면적 : 32.84 m2
중량 : 3,133 kg~4,200 kg
동력 : 미츠비시(三菱) 킨세이 54형(金星54型) 공랭 14기통 엔진 (1,200 hp)
최대속도 : 426 km/h
항속거리 : 1,302 km (예정)
상승한도 : 9,000 m (예정)
무장 : 7.7mm 기관총 3정 / 60 kg 폭탄 2발 또는 30 kg 폭탄 4발
2. 모스키토의 클론[편집]
구일본 해군의 항공기술창(航空技術廠)에서 영국 공군의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의 활약에 자극을 받아 개발한 폭격기. 일본 해군항공본부는 99식 함상폭격기(九九式艦上爆撃機)를 나무로 만드는 방안을 떠올려 공기창에서 거의 독자적으로 재설계하는 작업을 거쳐 만들어졌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 1894~1989)가 해군의 요청에 따라 설립한 마쓰시타 비행기 주식회사(松下飛行機株式会社)의 목제 항공기 공장에서 4대가 완성되었으며, 시험비행을 하던 도중에 패전을 맞이했다.
3. 개발 배경[편집]
1943년, 연이은 패배로 전황이 급격히 기울자 일본 해군이 점령했던 남태평양 전선에서 자원 수송로의 유지가 어려워지자 두랄루민 소재의 부족이 심각해졌다. 이 때문에 해군에서는 영국의 목제 고속 폭격기 모스키토처럼 목제 항공기를 짧은 시간에 대량으로 생산하여 항공 전력을 보충하는 방안을 세우게 된다. 그 첫 번째 시도가 해군 공기창이 주목한 99식 함상폭격기를 기반으로 하는 목제 폭격기의 개발에 팔을 걷어부치게 된다. 이 개량 작업은 기존에 쓰이던 금속제 99식 연습폭격기 12형(九九式練習用爆撃機一二型 : D3A2-K)에도 병행하여 작업이 착수되었다.
4. 기체의 특징[편집]
기체 구조를 건드리지 않고 재료만을 바꿔 원형기를 그대로 나무로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강도 확보와 성능 유지를 목적으로 크게 재설계가 되었다. 99식 함폭의 특징인 우아한 타원형을 그리는 주익과 미익은 단순한 직선 형태의 테이퍼형 날개로 수정되고 익면적도 축소되었다. 또한 동체도 대략 1.3 m 늘리고 방풍창도 개량되었다. 이처럼 세부 구조와 형태가 목재라는 재료에 맞춰 단순화되었더라도, 엔진 및 프로펠러는 그대로 가져갔다.
묘조(明星)로 불린 이 기체는 소나무와 노송나무(ヒノキ)를 깎아 만든 골조를 볼트로 고정해 조립하고, 가벼운 발사(balsa) 목재를 수지를 발라 겹쳐 만든 합판을 외피로 덮었으며, 전간기까지 흔히 쓰이던 캔버스 천도 사용되었다. 원본이 된 영국의 모스키토 전폭기의 조립에 쓰인 에폭시 수지 접착제는 당시 일본에서는 막 생산 연구를 하던 초기 단계였던 까닭에 수지 접착제의 접착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 콩가루를 혼합하는 방안이 고안되었다. 치공구류는 공기창에서 목조 선박의 건조 경험이 있던 마쓰시타 조선(松下造船)에 파견된 회사 대표인 고노스케의 처남 이우에 토시오(井植歳男 : 전후 산요를 창업)가 감독하여 1943년 10월, 타데츠(盾津) 비행장 옆 오사카부(大阪府) 스미노도(住道)에 마쓰시타 비행기 주식회사를 건립했다.
5. 원형기 제작[편집]
마쓰시타 이하 공원들은 1944년 봄부터 실기의 제작에 착수했는데, 마쓰시타 비행기는 가전 등 목공 작업과 나무를 다뤄본 경험은 있었다 해도 항공기에 요구되는 엄격한 기준의 품질 관리와 성능에 대한 신뢰성에 관한 인식과 경험은 없었는데 이것이 독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시행착오는 계속되었고, 해군의 목제 군용기 계획은 속도가 붙지 않게 된다. 프로토타입 1호기는 1945년 1월 31일에애 간신히 완성되어 진공식이 열렸다. 곧이어 날려 본 1호기는 방풍창의 미세한 틈새로 빨려들어온 강한 기류에 동체 외판이 덜덜덜 떨리는가 하면, 마치 피리 소리 같은 잡음이 기내에 울려퍼지며 조종사의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따라서, 원형 3호기에서는 이 부분을 다시 수정하고 중량을 더 줄이는 개량을 꾀하였다.
6. 채용 탈락[편집]
나무로 만들어진 묘조 폭격기는 금속제인 99식 함폭에 비하면 중량이 20~30%나 더 무거워져 일반적인 비행 성능은 크게 떨어졌다. 350 km/h를 목표로 했던 순항속도는 어떻게 맞췄다 해도, 이처럼 생산 작업이 더디고 공정이 까다로운 상태에서는 해군의 목표인 1개월에 200대 완성은 도저히 가능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고노스케 회장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비행 상태로 완성된 묘조는 고작 4대가 전부였다. 그중 1대는 시험 비행에서 선회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뱅크 턴을 하다가 날개가 통쩨로 떨어져나가고 테스트 파일럿은 간신히 살아남는 추락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묘조는 실용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채 공기창의 귀중한 인력과 자원, 시간만 헛되게 낭비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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