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 AFC 아시안컵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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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아시아 축구 연맹 주관의 AFC 아시안컵 10회 대회이며 8개국(8강)이 본선에 진출했다.
2. 경기장[편집]
- 개막전과 3-4위 결정전, 결승전은 모두 히로시마에서 개최되었다.
3. 진행 방식[편집]
- 본선 진출국이 10개국에서 8개국(8강)으로 줄었다.
- 개최국 일본과 지난대회 우승팀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자동 진출권이 주어졌고 남은 6장의 본선 티켓을 놓고 20개국이 예선에 참가하였다.
- 아시안컵 예선은 6개조로 나뉘어 각 조 1위팀이 본선에 진출한다.
- 본선에선 4개팀씩 2개조로 나뉘어 8강 조별리그를 실시하여 각 조 상위 1, 2위팀이 4강에 진출한다. 4강부터는 토너먼트로 실시.
- 1992년 10월 29일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결승전인 11월 8일까지 약 2주간 진행되었다.
4. 8개국 본선 진출국[편집]
5. 출전 선수 명단[편집]
자세한 내용은 1992 AFC 아시안컵 일본/참가팀 정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진행 경과[편집]
6.1. 결선 조별리그[8강][편집]
6.2. 토너먼트[편집]
7. 그 외[편집]
- 처음으로 대회를 유치한 일본은 아시안컵에서도 바로 첫 우승컵을 드는 겹경사를 누리게 됐다.
- 일본은 1992년부터 J리그를 야심차게 창설하면서 일본 축구 역사상 최초의 황금세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고, 자국에서 개최한 아시안컵까지 우승하면서 크게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94 미국 월드컵 24강 본선 진출을 노렸다. 하지만, 경기 종료 1분 전 이라크에게 충격과 공포의 동점골을 한 방 얻어맞는 바람에 그만 아시아 예선 3위로 일본 축구 역사상 최초의 본선(24개국) 진출이 눈 앞에서 좌절되어버린다. 결국, 본선진출 실패로 인해 당시 일본의 아시안컵 첫 우승을 이끈 한스 오프트 감독은 감독직을 사퇴하게 된다.
- 대한민국은 아시안컵 예선 6조에서 1승 1패를 기록, 2승을 기록한 태국에게 밀리며 최종 2위로 결국 본선에도 오르지 못하는 촌극을 맞봤는데, 당시 한국은 이 예선에 실업/대학 선수들로 구성된 사실상 2군 멤버들을 출전시켜 팬들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이걸 주도한 사람이 바로 허승표와 신문선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때문에 이들은 대한축구협회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고 한다.[4] 대부분 태국 쇼크하면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때의 충격패를 기억하지만, 이 예선전도 그 못지 않게 컸다. 당시 AFC도 분노하며 명색이 아시아 최고를 겨루는 대회 예선에서 또다시 이런 짓거리를 하면 월드컵 예선 실격같은 징계를 하겠다고 강력 경고하기까지 하게 되었고, 이게 독이 되었는지 이후로는 예선에서 2군에 해당되는 B팀을 따로 보내지 않게 되었다.
- 북한은 첫 진출이었던 1980년 대회 이후 12년만에 본선에 다시 진출하였지만 1무 2패 조 최하위를 하고 최종 대회 8위로 쓸쓸히 대회를 마감하였다.
- 모든 팀이 승점 1점 이상 얻었다.
- 대회 최우수 선수는 일본의 신동으로 불리던 미우라 카즈요시가 차지했다.
8. 결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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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A B [1] 1988아시안컵 10위(10강 조별리그)[JPN] 1988[KSA] 1984, 1988[2] 1984아시안컵 5위(10강 조별리그), 1988아시안컵 5위(10강 조별리그)[QAT] 1980, 1984, 1988[3] 1984아시안컵 6위(10강 조별리그)[UAE] 1980, 1984, 1988[IRN] 1968, 1972, 1976[PRK] 1980[CHN] 1984[THA] 1972[4] 이런 전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축사국이라고 불리는 이 사태를 모르는 또는 알면서도 외면하는 일부 반축구협회 성향 축구팬들이 '이들도 피해자', '비주류 개혁가'로 칭송하는 바람에 상당히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