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영화)/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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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동원 출연에 대한 논란
2. 가해자 미화 논란
3. 자유한국당의 소유권 주장
4. 여성계의 '여성 민주화운동 과소평가' 주장
5. 동아일보의 자화자찬


1. 강동원 출연에 대한 논란[편집]


이한열 역을 맡은 배우 강동원의 외증조부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온 친일파로 밝혀지면서 친일파 후손이 출연한다는 이유로 영화가 평점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외증조부인 이종만이 친일파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친일 논란’ 강동원 외증조부 이종만, 그는 노동운동가였다?

하지만 본인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였고 영화 개봉 이후에는 강동원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모가 밝혀지지도 않았던 2016년 여름 감독을 제일 먼저 찾아와 불이익을 감수하며 영화에 참여한 것이 알려지면서 호의적인 반응이 늘어났다. 특히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진행 중이라 영화가 엎어질 뻔해서 소자본 독립영화를 고려했던 상황에서 강동원이 용기를 내어 참가하면서 많은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다는 점도 영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2017년 4월 언론들이 '친일파 후손 강동원이 1987에 참여해도 되는가' 하고 기사를 내자 이한열기념사업회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가 "강동원이 1987에 나오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고 그 이후로도 수시로 감사를 표했다. 이한열의 어머니인 배은심은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고민도 많이 했지만 시대가 바뀐지 오래인데 조부도 아니고 외증조부가 친일파였던 것을 연좌제로 매도하는 건 말도 안 된다"며 "본인이 성실하게 잘 살아왔고 또 열심히 하겠다고 했으니 그는 이제 나의 또다른 아들이나 다름없다." 는 입장을 밝혔다.

거기에 강동원은 단순히 영화만 촬영한 게 아니라 이한열 묘소, 이한열 기념관을 수차례 들르며 본인의 배역에 다가가고자 노력했고 촬영을 마칠 때까지 이한열의 어머니 댁에 수시로 들렀다. 단순한 쇼맨십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을 정도로 촬영에 임했기에 평가가 좋아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내용은 강동원이 1987에 특별출연한 배역이 개봉 직전까지 비공개였다가 개봉 이후에야 기사화되면서 알려졌다. ‘극중 아들’ 강동원에게 김치 선물한 이한열 열사 어머니 이후 2019년 1월에는 이한열기념사업회에 2억을 익명기부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기사

그리고 2022년 1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의 빈소에 조문하며 이러한 논란은 거의 불식되었다고 보면 된다. 기사

사실상 대중들이 친일파의 후손들에게 분노하는 이유는 단순히 매국노의 후손이어서가 아닌 조상의 악행에 대한 반성이 부족한 태도가 문제였던 것이라[1] 강동원의 노력으로 이러한 논란은 거의 없어진 편. 또한 강동원은 독립운동가의 자손이기도 한데 외조모가 구포 만세운동 노원필의 장손녀라고 한다. 즉, 노원필의 후손인 강동원 외할머니는 이종만의 며느리이다. 한마디로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집안이 결혼으로 가족이 되었던것으로 같은 가족간에도 다른 노선으로 활동하던게 드물지 않았던 당시로선 이러한 결혼이 있었다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2. 가해자 미화 논란[편집]


5.18 민주화운동 참여자이자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로 14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바 있는 강용주는 이 영화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하였다.

영화에서 원칙주의자로 상관인 박처원에게도 항의하고 이부영에게 사건을 알릴 기회도 주는 의인으로 그려진 교도소 보안계장 안유가, 실제로는 90년대 장기 비전향 수감자들에게 고문을 가한 고문가해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전에도 재야 인사와 대학생 등 공안 사범을 감시하던 인물인데 이러한 묘사는 없이 선한 역할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영화 자체에서는 절대선보다는 입장을 바꾸는 방향으로 묘사되었다. 작중에서도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나는 사람'이라고 언급되긴 했다.

이에 안유 본인은 인터뷰에서 “나는 의인이 아니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그때 대학생들은 저를 가리켜 ‘전두환의 사냥개’라고 했다.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2010년 황용희 교도관과 이부영이 이젠 공개하자고 설득했는데 끝까지 거부하였고, 그럼에도 <가시 울타리의 책>이 나와 그의 행적이 강제 아웃팅 되었다. 공개 당시 교도관들은 도저히 그럴 사람이 아닌데[2]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과, 평소 민주화 사범들에게 잘해 주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으로 의견이 갈렸다.

이에 관하여 이부영 전 의원은 영화 관람 후에 오히려 안유는 자신의 직업 때문에 가혹행위를 용인한 점은 있지만 사안에 대해서 인지하자마자 자신을 찾아와서 '형. 나라가 망하게 생겼어.'라며 영화와 달리 즉시 사실을 전했으며 투옥되어 있는 운동권 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사비로 약을 구입해서 나눠주는 사람이라고 언급하였다. 당시 과격파이던 학생들이 옥중에서 구호를 외치고 소란을 일으키려는 조짐을 보이자 학생들이 요구하는 운동권 서적을 정부의 지침을 어겨가면서 반입해 주는 등 익히 알려진 것에 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이라고 얘기하였다. 또한 강용주의 보이콧 선언이 나오자,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전향공작은 전국 교도소에서 있던 일로, 안유는 보안과장으로서 업무상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2018년 1월 11일 방송된 썰전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프로그램의 패널인 유시민 작가와 게스트로 출연한 우상호 의원[3]은 영화를 보고 "최환 검사가 그전부터 공안 검사로 수많은 우리의 선후배들을 잡아 가두었고, 고문이 자행되는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보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고 하였다. "물론 그분이 박종철의 시신 화장을 막고 부검을 진행한 것은 잘 한 일이지만, 우리의 눈앞에서 쓰러져 간 후배를 생각하면, 머리로는 이해를 하려 해도 감성적으론 잘 용납이 안 된다"며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들이 검사나 교도관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사람은 살다 보면 한 번 쓰이는 때가 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 미워할 만한 99번의 일이 있었더라도 그 99번이 한 번의 일을 위해서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의견도 밝혔다.

이후 유시민 작가는 방구석 1열에 출연하여 최환 검사의 행동에 대해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겪은 후 이 사건마저 관례대로 처리했다간 검찰조직에 피해가 올거라 생각하여 조직 보호 본능에 따라 행동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작중에서도 그런 논리로 지검장을 설득하는 모습이 나온다.

우상호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과 같이 영화를 관람할 당시 한재동 교도관은 이한열의 모친 배은심에게 "내가 편지를 전달은 했지만, 그 이전부터 수많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을 가두는 일을 했다. 아들을 잃은 분들 앞에선 차마 할 말이 없다."며 사과했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상술했듯이, 작중에서 최환 검사의 박종철 부검에 대해 묵인하는 역할로 나오는 정구영 서울지검장의 경우, 실제로는 이를 적극적으로 은폐하는 데 힘쓰던 인물이다.


3. 자유한국당의 소유권 주장[편집]


“대통령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그거 보고 울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거 누가 밝혔습니까? 보수 정부에서 밝힌 거다”

1월 8일 신년인사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당시 보수정권이 언론과 국민들의 진실규명 요청에 응답해 2차례에 걸친 수사를 통해 가해자들을 구속하고, 피해 사실을 규명한 것”

1월 9일#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자유한국당 내에서 불만이 나왔다. 곽상도 의원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그 당시 밝힌 사람들이 "오늘날의 보수정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 왜 문 대통령이 우느냐"는 주장을 내놨다. 김성태 원내대표 역시 "문재인 정부가 1987년을 독점하려 한다"며 "적폐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배하고 있는 문 대통령의 독단적 국정운영 방식이 과연 국민을 위하고 대한민국을 위한 길인지 되돌아봐야 할 영화"라고 평했다. 다만, 문재인은 당시 결성되었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의 부산 지역 상임집행위원이었기 때문에 곽상도의 주장 마냥 연관이 아예 없진 않다.

4. 여성계의 '여성 민주화운동 과소평가' 주장[편집]


연희를 제외한 주요 배역이 모두 남성이라는 이유로, 일각에서는 여성의 민주화운동 참여를 외면한 영화라는 비판을 제기했다.
  • 경향신문 칼럼

일각에선 <1987>의 인물들 중 여성의 비중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도 있다. 김태리 씨가 맡은 연희는 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 중 거의 유일한 여성이다. 실제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여성이 많았음에도 <1987>에서 여성의 역할이 ‘연희’로 한정되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

<1987> 개봉과 함께 당시 민주화의 성취를 특정 세대와 계층이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의 민주화가 대학생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엘리트 계층, 검사, 종교인 등 특정한 인물들의 노력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6월 이후에도 ‘7·8·9 노동자 대투쟁’ 등 사회 각계에서 민주화 성취를 위한 노력이 계속됐다.

천정환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영화를 보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는 586들은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면서 “이 영화를 보며 감동을 느끼면서 불편해하기도 하는 여성·청년세대·노동자들, 또 그들이 ‘586 헤게모니’에 대해 가진 분노에 대해서도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커버스토리 - 1987 그리고 나]“엘리트의 노력만으로 얻어진 건 아니다…불편해할 여성·노동자를 생각하자” #

그러나, 우선 이 영화가 심도있게 다루는 주제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관련자가 모두 남성이므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도 주요인물 대부분이 남성일 수밖에 없다. 만약 이 주장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실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관련된 주요 여성들 중 배제된 인물이 있든지 하는 실제 사례가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비판은 페미니즘에 기반한 일반론적 주장만이 있을 뿐 구체적인 예시가 전혀 없으며 문헌적인 기록 조차 남아있지 않다.

운동권 서사를 운운하는 것도 이한열, 김정남, 이부영을 제외하면 영화 내에 운동권 비중이 높지도 않다. 주요 인물들 중 최환은 검사, 한병용은 교도관, 윤상삼은 기자이며 주요 인물들 중 유일한 여성인 연희는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새내기 대학생이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위를 밝혀내는" 부분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건 한병용, 연희, 윤상삼 3인방이며, 김정남은 영화 내내 안절부절하며 소식을 기다리는 모습만 나오고 실제로 사건의 진위를 추정해 그림을 그렸던 이부영의 역할은 오히려 축소되어 있다. 이한열 역시 반전을 위해서였지만 이름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주연이 아닌 철저히 조연에 그친다.

물론 민주화운동에서 여성들이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며,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닌 대중들의 노력을 묘사하는 이 영화에서도 이를 반영하기 위해 주연급 배역이 아닌 조연 내지 단역에서는 당시 여성의 민주화 운동 참여를 다각도로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영화 내 시위 장면에서도 남성들 못지않게 여성들도 많이 등장했다.

작중 등장한 미도파 백화점 앞 3·3 평화대행진[4], 연세대학교 정문 6·9 궐기대회, 서울시청 앞 6월 항쟁 시위에서 모두 여성들의 적극적인 시위 참여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3·3 평화대행진에서 연희를 숨겨준 신발가게 주인, 5·18 다큐 상영회를 주관한 만화사랑 동아리의 부장, 한병용과 통화하면서 김정남의 소재를 알린 연락책, 6·10 항쟁에서 버스 위에 있던 방송 선창자(문소리)가 모두 여성으로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동조했던 여성들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 당시 끌려가서 고문 받은 여성들도 많았음을 드러냈으며, 그 예로 박처원이 한병용을 취조하러 가는 장면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를 잘 들어보면 여자들의 비명소리도 섞여 있으며 이 장면에서 얼굴에 검은 포대자루가 씌워진 채 취조실로 끌려가고 있는 사람도 비명소리와 체격으로 미루어 젊은 여성임을 알 수 있다.[5]

더욱이 장준환 감독도 성비 문제를 인식하고 주연급에서도 김정남의 배역을 여성으로 바꾸려는 생각까지 해봤지만, 실화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많은 남성들이 나오는 영화가 되었다고 밝혔다.# 엄연한 실존인물인 김정남의 배역을 만약 정말로 여성으로 바꿨다면, 1987은 시대배경을 무시한 역사왜곡물이 되었을 수도 있다.


5. 동아일보의 자화자찬[편집]


동아일보는 이 영화를 인용하여 자신들이 6월 항쟁에 업적을 세웠다며 연신 자화자찬을 하다가, "너희들이 그럴 자격이 있냐"고 빈축을 사기도 했다.#

실제로 동아일보 소속이었던 윤상삼 기자가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며, 당시 동아일보에서 큰 역할을 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아일보사는 전두환 측근을 비롯한 인사들이 대표를 역임하고, 신문은 권력 비판적인 논조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등 급속하게 변질되었다. 또한 1980년대 당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기자들을 비롯하여 당시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 전 의원, 5공보도지침에 반발하여(동아투위 사건) 해직된 기자들을 영화가 개봉된 2017년 12월 27일 시점까지도 복귀시키지 않는 등 당시와는 반대되는 길을 계속해서 걷고 있다.

현재 논조나 평가 등을 떠나서 사실 역사를 제대로 따져보면, 이 영화로 자화자찬할 언론사는 한겨레 신문사이다. 독재 정권과 펜으로 싸우던 기자정신이 투철한 기자들이 동아일보로부터 해직되고,해직기자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신문사가 바로 한겨레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동아나 한겨레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1987에 나온 동아일보 기자들의 헌신은 실질적으로 한겨레에 이어져 있다.

[1] 아버지가 친일파임이 분명히 밝혀졌음에도 이를 감추고 변명하기에만 급급했던 국회의원 김무성 같은 사례가 대표적.[2] 평소 수용자들이 대들면 문 따고 들어가 격투기로 두둘겨 패는 파이터 스타일이었다고 한다.[3] 2010년 황용희 교도관의 <가시 울타리의 증언>이 출판 될때 영등포 교도소 수감당시 친분이 생긴 이부영 의장과 우상호 의원이 추천사를 써주었다.[4] 정확하게는 3·3 평화대행진이 벌어진 시점(박종철 49재)에 그보다 앞서 있었던 2·7 추도회가 전의경과 충돌한 장소(미도파 백화점 앞)를 결합한 장면이다. # [5] 물론 이 여성들이 배역 이름조차 없고 비중이 낮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피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차별이 심하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적었던 당시 시대상, 여성을 들러리 삼았던 87세대의 한계를 비판할 일이고, 그러한 관점으로 현실적 한계를 반영한 영화까지 비판하는 것은 논리 비약이다. 때문에 이 영화를 기존의 운동권 서사와 동일시한다면 평론가로서는 저급한 감식안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더욱이 굳이 시대적 한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창작의 자유'라는 측면 또한 엄연히 존재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해리 포터 시리즈도 주연 3인방 중 2명이 남자지만 여성의 비중이 적다고 비판받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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