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년 조선 UFO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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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왕조실록 중 광해군일기의 천문(天文)기사에 영두성(營頭星)(낮에 떨어진 운석)이 낙하한 현상이 기록된 것을 말한다. 영두성이라 기록이 되었다는 건 천문에 조예가 깊은 극히 일부 사람들은 이미 이 현상이 밤에 떨어지는 별똥별과 동일한 현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다만 별똥별의 정체가 사실은 운석이 지구 대기권으로 낙하하면서 발생하는 마찰열로 타오르는 현상이라는 것은 당연히 아무도 모르고 있었고 낮에도 별똥별이 떨어진다는 것 역시 당시 식자층에서조차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1] 낮에도 환하게 빛났을 만큼 큰 운석이었기에 '홀연히 어떤 물체가 하늘에 나타났다(忽有物在天)'는 기록이 많았다. 대부분의 옛 사람들 눈에는 매우 신기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이 현상은 1609년(광해 1년) 9월 22일 화요일(음력 8월 25일)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 사이(사시~ 미시)에 서울, 평안도 및 강원도 일대에서 확인됐다. 서울과 평안도 선천군의 목격 기록은 8월 25일 당일 기사로 수록되었으며, 강원 감사 이형욱이 관하 고을에서의 목격 기록을 모아 조정에 보고한 기록이 이로부터 한 달 뒤인 음력 9월 25일 기사에 수록되어 있다.
2. 기록 내용[편집]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20권, 광해 1년 9월 25일 계묘 3번째 기사에 수록되어 있다. 해당 내용은 한 달 전인 8월 25일에 있었던 일을 강원감사가 정리하여 보고한 것이다. 아래 내용 및 현대어 해석본의 출처는 모두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에서 인용한 것이며, 정초본이다. (출처)
사건 당일인 8월 25일 조에는 관상감에서 관측한 것으로 보이는 영두성(운석) 목격 기사와, 평안도 선천군에서 확인한 동일 사건의 기사가 남아있다.
3. 추측[편집]
3.1. 정체불명의 비행물체 설[편집]
얼핏보면 UFO의 비행과 유사해보인다.
위 기록을 종합하자면 먼저 강원도에서 오전 10시경 목격된 미확인 물체가 다시 오후 2시경 강원도 양양군에서 목격되었다. 이게 북쪽으로 조금 날아가다가 둘로 쪼개져 하나는 동남쪽으로 가다가 사라지고 하나는 제자리에 잠시 떠있다 사라졌다고 한다. 정말 10시경에 나타나서 사라졌다가 다시 오후 2시에 나타났다면 유성일 가능성은 없다.
또 유성이라면 전국 곳곳에서 아니면 최소한 한양에서는 목격되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춘천과 서울은 고작 70km 떨어져 있는데 춘천에서는 큰 동이처럼 보이고 경기도에서는 안 보이는 유성이 있을까? 정말 유성이었다면 조선왕조실록에 전국 팔도에서 특이현상이 목격되었다는 식으로 기록되어야 하지, 강원 감사와 평안북도의 보고만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1609년 8월 25일 사시(巳時, 오전9시~오전11시)에서 미시(未時, 오후1시~오후3시)까지 목격되었다고 하는데 유성은 슉~하고 지나가지 2시간 이상 보인다는 건 불가능하다.[3] 대기와의 마찰로 빛을 내는 별똥별이 아닌 독자적으로 빛을 내는 혜성이라면 지구에서 수백만km이상 떨어져 있어도 육안으로 보이므로 긴 시간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만 기묘한 움직임이나 큰 소리를 낸다는 기록과 일치하지 않고, 무엇보다 혜성이라면 전세계적으로 관찰되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여러 유성 관측 기록들은 대부분 밤 시간대에 떨어진 소형 유성들로 이런 대화구에 대한 관측기록은 드물다.
3.2. 운석설[편집]
일단 영상을 먼저 한번 보고나서 유성의 진짜 정체가 뭔지 몰랐던 시대에 이 현상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었을지 상상해보자
우선 광해1년 계유 기사에 나와있는 영두성이라는 표현에 주목해보자. 이는 낮에 보이는 유성이라는 의미로 이미 조선시대 사람들도 이 현상이 유성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과거 사람들은 유성의 진짜 정체는 뭔지 알지 못했기에 별똥별과 동일한 현상이라 인식조차 못한 사람들에겐 매우 신기한 현상이었을 것이다.[4] 관측자의 위도와 경도에 따라 다르게 보일수 있는 유성의 천구상 궤적을 두고 xx성과 xx성 사이에 유성이 흘러서 불길하다느니 하며 점을 치던 수준의 천문학 인식이 대세였던 시대였다. 이런 인식은 무수히 많은 기록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더구나 낮에도 또렷이 관측가능할 정도의 거대운석을 직접 보는 것은 인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극히 드문 경험으로 그게 일반적으로 밤하늘에서 보던 별똥별과 동일한 물리현상이라 인식하는 건 당시 일반인들의 천문학 수준으로는 납득이 어려웠을 것이다. 무지개의 정체도 몰라서 이를 용이 승천했다느니 상서로운 기운이 뻗쳐올랐다느니 하는식으로 묘사하던 시대였음을 감안해서 읽어야 할것이며 현대인의 관점에선 명백히 유성을 관측했을때 나타나는 현상과 동일한데도 과거의 기록을 입맛에 맞게 곡해하지 말아야한다.
또한 이 기록이 쓰여진 시대의 시간 개념은 2시간 단위였음을 역시 고려해야한다. 이 조차도 시간 경계선에 벌어진 현상이었다면 기록자에 따라 사시에서 오시로 쓰여질 수 있으므로 과거의 시간 기록에 현대의 시간개념을 대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정확한 시계라는 것의 수준이 해시계나 물시계 정도였던 시대였으므로 이 사건은 2시간 "동안"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사시에서 오시 즉, 4시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으로 인지해야함이 타당하다. [5] 또한 모든 기록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묘사를 기록하고 있을 뿐, 그 어디에도 2시간 내내 보였다는 묘사는 없는데 사시와 오시로 적힌 기록만 가지고 2시간 동안 나타난 현상이라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서울에서 눈에 띄는 관측기록이 없었던 건 해당 현상이 나타난 지역을 감안해보면 당연하다. [6] 운석이 대기권과의 마찰로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고도는 대략 80km~120km 사이로 해당 물체와 서울과의 직선거리를 삼각법으로 구해보면 춘천~동해안 사이(80km~100km)를 지나갔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113km 에서 144km 정도로 판단할 수 있으며 대략 서울에서 청주,대전 거리니 밝은 대낮에 강원도 하늘위를 지나간 화구는 폭발의 극대기에 동쪽 낮은 하늘에서 잠깐 반짝하는 수준으로 보였을 것이다. 만약 해당 화구의 폭발 고도가 더 낮았다면 서울에서 해당 물체의 관측 고도는 거의 지평선에 깔린 수준이 되며 동쪽이 산악지대임을 감안하면 평지에서 이를 관측할 확률은 더더욱 낮아진다. 청주까지 갈것도 없이 안성이나 천안 하늘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를 서울에서 볼 수 있겠는가? 울릉도에서 80km 떨어진 독도를 날씨가 최상급으로 맑은날 간신히 점하나 정도로 볼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자. 참고로 독도의 면적은 주도의 크기만 15만 평방미터에 높이는 168m에 달한다. 기록에 남겨진 정도의 화구의 크기라면 1m~5m 사이에 불과하며 더 컸다면 첼랴빈스크 운석 낙하에서 보여진 수준의 기록이 보여야하나 그 정도 크기는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저런 폭발형의 거대 화구를 실제로 관측해본 이들은 유성의 관측범위가 생각보다 좁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02년 사자자리 유성우 극대기 당시, 서울에서 40km 거리인 경기도 양평에 떨어졌던 거대한 폭발형 화구는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이 밤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음에도 관측할 수 없었으며 양평에선 한밤중 온 하늘을 환하게 밝히며 폭발음까지 발생했지만 극히 좁은 지역에서만 관측 가능했다. 산악지대가 많은 한반도에서 실제 안시 관측 고도의 한계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것보다 높고 낮은 고도일 수록 대기산란과 수증기, 구름등의 영향으로 천체의 밝기가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강원도 지역에서 목격된 물체가 밝게 빛난 시간이 밤도 아니고 대낮임을 감안하면 서울에서 이 물체를 목격하기 어려웠음은 당연하다.
목격담을 보면 대체로 오전 9시-11시 사이에 목격된 것들인데 일관되게 '항아리/단지 같은 불덩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흰 기운', '사라진 뒤에 들리는 우레 소리'를 언급한다. 이것은 크기가 큰 운석이 지구의 대기권과 마찰하며 떨어지면서 폭발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이다. 밝게 빛나는 불덩이는 보는 사람의 느낌과 시력, 설명 방식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빗대어질 수 있고 운석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흰 기운은 운석이 연소되며 남은 연기 및 잔해로 보인다. 그러다가 운석이 끝내 하늘에서 터지면 그 충격파와 소리가 잠시 뒤에 땅에 도달하면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데 크기가 10m를 넘어가는 거대 운석일 경우, 가까운 지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7]
하늘에서 사라지기 직전에 곡선으로 나부낀다거나 폭포처럼 펼쳐지는 모습은 운석이 터지면서 내부에 갇혀 있던 가스, 연기 및 잔해를 넓게 내뿜는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
뜰에 나타난 세숫대야 모양의 물체가 다채로운 색을 내며 떠올라 날아갔다는 기록은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운석이 연소의 마지막 즈음 밝게 빛나며 소멸한 것을 두고 "날아가버렸다" 고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애당초 이 시대에 현대 수준의 과학적 관측기록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광해군 시기에 관측된 폭발형 유성이라고 학계에서는 이미 정리가 끝난 현상이다. 114페이지 참고. 외계비행체가 없다고 확신할 그 어떤 근거도 없지만 너무나 정체가 명백한 이 현상을 두고 인간이 모르는 그 어떤 미지의 비행물체라 주장하는건 외계비행체의 존재를 가정하는데 있어 반박의 구실만 줄 뿐이다. 이런 기록 말고 정말로 그 정체를 도저히 추론할 수 없는 객관적 사료만이 외계비행체의 존재를 가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4. 여담[편집]
- 조선시대에 UFO가 목격되었다는 사례는 KBS 2TV에서 방영된 스펀지 86회에서 소개되었고, 드라마 기찰비록 1, 2화와 별에서 온 그대, 설희에서도 소재로 사용되었다. 한국사 RPG - 난세의 영웅에서도 이를 소재로 외계인이 등장한다.[8]
- 일본의 옛 기록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관련된 야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이상한 괴물, 비행 바구니, 날아다니는 탈것 등의 기록이 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조선에서의 목격담과 연도가 동일하다.#
- 제4공화국 시절에도 UFO 근접 조우 기록이 있다. 서울 UFO 격추미수 사건 문서로.
5. 관련 문서[편집]
[1] 사실 천문에 관심이 없는 대부분의 현대인들도 낮에 이정도 규모의 운석낙하 현상을 보고 별똥별임을 단박에 알아차리기 어렵다.[2] 나타난 위치 정도는 이 그림과 어느 정도 일치하지만 모든 기록에서 이동하다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고 되어있기 때문에 저런 단일 궤적으로 이동했다고 볼 어떤 근거도 없다. 정말 이런 궤적으로 이동했다면 춘천 지역에서 남긴 기록에는 밝게 빛나다 소멸되었다는 기록이 아니라 남쪽에서 나타나 북쪽으로 사라졌다는 식의 기록이 있어야한다.[3] 별똥별은 대기와 지구에 떨어지는 천체간의 마찰로 불꽃이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대기가 있어야 마찰이 생기니 중간층(약 해발 80km)에 진입해야 보인다. 그런데 지구는 초속 30km로 공전중이라 설사 우주에 그냥 떠있는 티끌이라해도 지구 중력에 잡히면 대단히 빠른 속도로 떨어지게 된다. 보통 유성은 느려도 초속 11km에서 빠르면 초속 72km의 속도로 떨어진다. 이게 지표면에 수직으로 떨어지는건 아니니까 조금 오래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2시간은커녕 2분이상 볼 수있는 유성도 거의 없다.[4] 첼랴빈스크 운석낙하 당시 이를 직접 목격한 이 지역 현대 러시아인들조차도 유성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미사일 공격이나 비행기 폭발 등으로 생각했음을 여러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물며 옛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5] 대부분의 기록이 사시에서 오시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홀로 미시라 적힌 양양 지역의 기록은 시간착오일 가능성이 높다. 모든 강원도 지역에서 사시에서 오시로 기록하고 있음을 감안하자.[6] 관상감에서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기사가 있기는 하나 서울에서 직접 관측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7] 첼랴빈스크 운석우 사건 문서에 있는 당시 유튜브 영상만 봐도 운석이 폭발하고 잠시 뒤에 충격파가 도달하면서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지는 등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8] 스펀지라는 방송이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실제 현상을 설명해주는 회차도 있었지만 서프라이즈처럼 괴담이나 신기한 현상을 흥미위주의 프레임을 짜고 방영한 회차도 많았다. 드라마는 더이상의 설명을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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