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철의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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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청나라 제10대 황제인 동치제의 황후. 중국 최후의 몽골인 황후이기도 하다.[1]
2. 상세[편집]
몽골 정람기인[2] 초치와 정친왕 단화의 딸 아이신기오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루터 초치는 동치 4년(1865년)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몽골인 출신으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한 유학자였고, 외조부인 정친왕 단화[3] 와 외종조부인 숙순은 정치적으로 서태후와 대립하여 신유정변 때 서태후에 의해 숙청되었다.[4]
동태후의 추천과, 효정현황후를 따랐던 동치제의 선택으로 황후가 되었다.[5] 가순황후로 알려져 있으며 시호는 효철가순공단헌천창성의황후(孝哲嘉順恭端憲天彰聖毅皇后)이다.
이후 동치제가 병상에 눕게되자 서태후와 가순황후는 크게 다투게 되었다. 이때 가순황후는 자신은 대청문을 통해 들어온 황후라고 했고, 이로 인해 서태후를 진노케 만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대청문이란 현재의 마오쩌둥 기념당 자리에 있었던 자금성의 정문이었는데, 이곳의 중앙문은 청황실의 황제와 대혼 때의 황후만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었다. 서태후는 후궁 출신으로 친아들 동치제가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정궁 황후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가순황후는 하필이면 서태후의 바로 이 후궁 콤플렉스를 건드린 것. 이로 인해 가뜩이나 가순황후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서태후는 이때부터 그녀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동치제의 죽음 이후 서태후는 황제의 죽음이 황후의 잘못이라며, 가순황후를 처소인 저수궁에 유폐시키고 음식조차 주지 않았다. 그와중에 광서제가 즉위했는데 동일 항렬이라도 선황제의 정실 황후의 자격으로 황태후로 진봉돼야했지만 그러지도 못 했다. 가순황후는 자신의 아버지 초치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버지 초치는 그저 '황후께서 아실 겁니다'라는 답장만 줄 뿐이였다. 이것에 가순황후는 절망하여 금덩이를 삼켜 자살했다고 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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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골 제민족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선통제의 아내이며 다우르족 출신이었던 효각민황후가 중국 최후의 몽골계 황후다.[2] 황후로 책봉되면서 만주 양황기로 옮겨졌다. 청에서 황후는 만주 상3기에 속해야 했기 때문이다.[3] 동태후의 고모가 정친왕 단화의 처이다. 즉, 동태후와 효철황후는 5촌지간이다[4] 단화가 그해 12월달에 천안문 옥탑기와에서 투신자살을 하긴 했지만 조정에서 자결명령을 내린 것으로 사실상 숙청에 가깝다고 볼수있다.[5] 서태후는 자신의 정적인 정친왕 단화의 외손녀가 며느리가 되는 것에 대해 매우 큰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다.[6] 참고로 서태후가 잔혹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훗날 광서제의 후궁인 진비를 직접 죽인것과 달리 가순황후는 직접 죽이지 않고 이렇게 심리적으로 압박해서 자살을 유도한것은 가순황후는 동태후의 추천으로 간택된 정실 황후라서 서태후가 마음 놓고 직접 죽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거기다 가순황후는 동일 항렬의 광서제가 후계자로 즉위해도 선황제의 정실 황후의 자격으로 황태후로 진봉이 되기 때문에 동태후나 초치가 적극적으로 도와줬더라면 살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