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종(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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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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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혜종(惠宗)
시호
강정황제(康靖皇帝)
연호
건도(乾道) 1067년 ~ 1068년
천사예성국경(天賜禮盛國慶) 1069년 ~ 1074년
대안(大安) 1075년 ~ 1085년
천안예정(天安禮定) 1086년
능묘
헌릉(獻陵)

이(李)

병상(秉常)
생몰기간
1060년 ~ 1086년 (26세)
재위기간
1067년 ~ 1077년 (1차)(10년)
1084년 ~ 1086년 (2차)(2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서하의 제3대 황제. 휘는 병상(秉常). 묘호는 혜종(惠宗), 시호는 강정황제(康靖皇帝). 의종 소영제의 적자이다.


2. 생애[편집]


1067년, 아버지 의종이 북송군과의 전투 도중 날아온 화살을 맞고 급서하자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모후인 공숙장헌황후 양씨[1]섭정을 했으며, 양을매(梁乙埋)[2]외 세 명이 국상(國相)이 되었다. 재위 당시 북송과의 충돌이 잦아 혼란스러웠던 시기가 있었다.

1076년 그의 나이 만 15세가 되자 혜종이 친정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양태후는 섭정을 거두고 막후에서 서하 혜종을 꼭두각시로 부렸다.

1077년, 북송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다가[3] 1081년 태후 양씨와 국상 양을매에 의해 유폐되었지만[4], 1084년에 복위했다. 하지만 복위 이후 오래 재위하지 못하고, 1086년 26세의 젊은 나이에 붕어했다.[5]

[1] ?~1085. 한족 출신으로, 조정 통제를 위해 당항족 귀족들을 중용했다. 호전적인 성격이었고 수시로 북송의 국경을 약탈했는데,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2] 양태후의 남동생[3] 한족들의 영향으로 한족 문명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4] 한족 출신의 장수 이청이 북송 간 전쟁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국고가 비었다고 한 뒤 서하 혜종에게 황하 이남을 돌려주고 황하를 양국 경계로 삼아 화의를 맺어야 한다고 했으며, 북송과 연합해 양태후를 퇴진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를 알아챈 양태후가 측근들과 함께 궁중 정변을 일으켜 이청을 죽인 뒤, 서하 혜종을 흥경부에서 5리 밖에 떨어진 목책 안에 감금시켜 버린 것이다. 이에 장수들이 반기를 들고 양태후 일족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토번 수령 우장화마가 송에 군사를 일으켜 태후를 징벌하면 서하 군민들이 호응할 거라는 밀서를 보냈다. 북송군이 이를 틈타 5개로 군을 나누어 서하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실패했다. 이후 1082년 영락성 전투에서 송군이 대패한 뒤 서하의 양태후도 실각하고 만다.[5] 양태후는 이병상 죽기 1년 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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