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센카셀의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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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프레데리크 6세의 왕비.
프레데리크 5세의 외손녀이자 크리스티안 9세의 이모다. 영국의 조지 2세의 외증손녀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767년 10월 28일 헤센카셀 방백국 하나우에서 헤센카셀의 카를의 첫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카를은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이자 빌헬름 8세의 손자로, 그녀가 태어날 무렵에는 덴마크군에 소속되어 있었고, 1769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의 총독을 맡게 되면서 마리는 슐레스비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리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역사에 재능이 있었다. 성인이 된 마리는 어렸을 때 매우 행복했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2.2. 왕세자비[편집]
1784년에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프레데리크 왕세자가 법적으로 성년이 되었다. 당시 프레데리크 왕세자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7세는 광증으로 인해 통치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크리스티안 7세의 동생인 프레데리크 공이 섭정을 맡고 있었다. 프레데리크 왕세자는 즉시 섭정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덴마크 왕실에서는 차기 국왕으로써 자리매김을 한 왕세자의 결혼 상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신부감 후보 중에는 헤센카셀의 마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리는 프레데리크 왕세자의 고종사촌이었으며[2] 덴마크에서 성장한 이력이 있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좀 더 외교상의 이익이 있는 혼사를 선호했고, 자유분방하게 자란 마리가 왕세자비가 되는 것을 염려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리크 왕세자는 자신의 독립성을 보여주기 위해 헤센카셀의 마리를 아내로 선택했다.
1790년 7월 31일에 마리와 프레데리크는 슐레스비히의 고토르프 성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처음 코펜하겐에 입성했을 때 마리는 덴마크어를 잘하지 못했다. 거기에 내성적인 성격이 더해지면서 잘 말을 하지 않자 몇몇 궁인들은 마리가 오만하다고 수근거렸다. 그러나 마리는 사랑받는 왕세자비였다. 비록 독일식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독일어가 모국어였지만, 덴마크 대중은 마리를 덴마크인으로 인식했기에 열렬한 애정을 드러냈다. 마리의 인기는 프레데리크의 여동생인 루이세 아우구스타를 위협할 정도였다. 루이세 아우구스타는 자신의 오빠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며, 당시 궁중의 실세였다. 루이세 아우구스타의 파벌은 왕세자비가 오만해서 시누이를 무시한다고 마리를 비방했다. 얌전한 성격의 마리는 자세를 숙이고 루이세 아우구스타와 잘 지내고 싶다는 뜻을 비추었다.
고민거리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덴마크의 올덴부르크 왕조는 구성원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에 마리는 후계자를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마리는 남편과 금슬이 좋았기에 결혼하고 1년만에 임신하면서 꾸준히 아이를 가졌다. 불운하게도 아이를 8번 낳았지만 2명의 남자아이를 포함한 6명의 아이가 유아기에 요절하고 두 딸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2.3. 왕비[편집]
1808년 3월 13일에 크리스티안 7세가 사망하면서 프레데리크 6세가 즉위하고 마리는 왕비가 되었다. 1808년에 마지막 출산 이후 몸이 크게 상하면서 마리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었다. 프레데리크 6세는 애인을 만들기 시작했고, 부부 사이는 정치적인 파트너로 변했다.
왕비가 된 후에도 여전히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다. 덴마크인들은 마리를 우아하고 친절한 왕비라고 평했다.
프레데리크 6세가 빈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을 때 섭정을 맡았다. 섭정 기간 동안 직무를 잘 수행했다는 평을 받았다.
2.4. 말년[편집]
1839년 12월 3일 프레데리크 6세가 숨을 거두었다. 공직에서 물러난 마리는 왕족으로써 존경을 받았다.
1848년에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발발했다. 마리는 복잡한 사상의 충돌과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에 크게 슬퍼했다.
1852년 3월 22일에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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