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코스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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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코스텔로
Frank Costello


파일:프랭크 코스텔로 2.jpg

본명
프란체스코 카스탈리아
Francesco Castiglia
출생
1891년 1월 26일
이탈리아 왕국 칼라브리아 카사노 올아이오니오
사망
1973년 2월 18일 (향년 82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국적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직업
마피아
신체
173cm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어록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

일명 암흑가의 수상(Prime Minister of the Underworld)

러키 루치아노의 후계자다.


2. 생애[편집]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태어나 4살 때 미국으로 이민 온 프랭크 코스텔로는 13살 때 형의 권유로 갱스터가 되었다.

프랭크 코스텔로는 자연스레 같은 이탈리아 출신 갱스터 러키 루치아노와 친구가 되었다. 루치아노의 지인들은 시칠리아 출신이 아닌 사람과 일하는 것에 회의적인 구식 마피아들이었다. 그들은 루치아노에게 더러운 칼라브리아인(Dirty Calabrian) 코스텔로와 함께 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프랭크 코스텔로는 금주법을 거치며 승승장구했고 1925년엔 미국 시민이 되었다. 코스텔로는 카스텔람마레 항쟁을 전후로 자신의 친구 러키 루치아노가 암흑가의 패권을 쥐는 순간을 함께했다.

러키 루치아노비토 제노비스를 부두목, 프랭크 코스텔로를 3인자 직책인 상담역(Consigliere)[1]으로 지명했다. 코스텔로는 이윽고 루치아노 패밀리의 최고 소득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36년 러키 루치아노가 30~50년의 부정기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자 비토 제노비스가 두목 대행을 맡지만 1년 만에 살인죄 기소를 피해 이탈리아로 도피하면서 프랭크 코스텔로가 두목 대행(Acting Boss)이 되었다.

1946년 가석방된 러키 루치아노가 이탈리아로 추방되면서 프랭크 코스텔로가 패밀리의 공식적인 두목으로 추대되었다. 코스텔로는 마피아계 최고 선임자인 루치아노를 변함없이 존중했고 그의 의견과 지시를 잘 수행했다.

이 시기 프랭크 코스텔로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일화로 당대 암흑가에선 "코스텔로의 승인 없이는 뉴욕 시의 어느 누구도 판사가 될 수 없다.(Nobody in New York City can be made a judge without Costello's consent.)"라는 말이 있었다.

1951년 미국 내 조직범죄에 대한 의회 차원의 청문회이자 영화 대부 2편 케스타트 청문회의 모티브가 되는 키포버 청문회에 프랭크 코스텔로가 출석했다. 그의 등장은 청문회의 하이라이트로, 그는 언론에 의해 미국 제1의 조직폭력배(America's #1 gangster)이자 태머니 홀의 실질적 지도자(de facto leader of Tammany Hall)[2]로 선전되며 전미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청문회에 출석했던 다른 마피아 두목들과 달리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고 연방상원의원들의 질문에 답변을 했지만 신경질적인 태도와 목소리를 유지했다. 그는 청문회 도중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의회모독죄로 14개월을 복역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소득세 7만 3417달러를 탈루한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5년과 벌금 2만 달러를 선고받지만, 항소하는 과정에서 6개의 연방 교도소와 주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제대로 된 형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7년 어느덧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비토 제노비스는 과거 자신의 하급자였던 프랭크 코스텔로가 두목 노릇을 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부하에게 코스텔로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코스텔로는 얼마 안 있어 맨해튼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머리에 총격을 당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이때 코스텔로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젊은 총잡이가 미래의 마피아 두목 빈센트 지간테다.

총격 사건으로 프랭크 코스텔로는 비토 제노비스에게 패밀리를 넘겨주고 은퇴했다. 이탈리아에 있던 러키 루치아노는 이러한 하극상에 격분했다. 얼마 안 있어 제노비스는 마약사범으로 몰려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하지만 패밀리를 완전히 장악한 뒤였기에 교도소에서 대리인을 통해 조직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프랭크 코스텔로는 여전히 마피아 세계에서 영향력을 유지했고 말년을 바쁘게 보냈다. 카를로 감비노토마스 루케시 같은 후배 마피아 두목들이 그를 찾아와 중요한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오랜 친구인 유대인 조직폭력배 마이어 랜스키와도 계속 연락했다. 코스텔로는 정원 가꾸기에 몰두했고 지역 원예 전시회에 자신의 꽃 일부를 전시하기도 했다.

1973년 프랭크 코스텔로는 자신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여담[편집]


  • 프랭크 코스텔로는 영화 대부비토 콜레오네의 모티브 중 한 사람이다. 말론 브란도가 대부 촬영 당시 코스텔로의 육성을 들으며 연기에 참고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 프랭크 코스텔로에겐 윌리 모레티라는 친구이자 사촌이 있었다. 모레티는 불세출의 연예인 프랭크 시나트라를 사실상 만들어낸 인물로, 1937년에 코스텔로가 루치아노 패밀리의 두목 대행이 되면서 모레티는 부두목이 된다.[3] 훗날 매독 후유증으로 뇌에 이상이 생긴 모레티는 전국에 생중계되는 키포버 청문회에서 연방상원의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협조하는, 말하자면 오메르타를 공개적으로 어기는 실수를 했다. (그는 연방상원의원들을 상대로 당대 유명 코미디언 흉내를 내며 농담 따먹기를 했다.) 그동안 모레티를 두둔해왔던 코스텔로마저 이 건은 덮어줄 수 없었고 결국 위원회의 결정으로 살해된다. 암살자들은 모레티를 뒤가 아닌 정면에서 쐈는데 이는 마피아 세계에서 존경과 애정의 표시다. 생전에 모레티는 모든 마피아를 통틀어 가장 유머감각을 보유한 인물로 손꼽혔고 그로 인해 모든 폭력배들이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이들도 눈물을 흘렸고 진심 어린 후회를 했다고 한다.

  • 키포버 청문회에선 코스텔로 측의 반발로 TV 생중계에 얼굴은 방송되지 않았고 손과 목소리만 전파되었다. 하지만 그때 찍은 영상은 남아있기 때문에 코스텔로의 얼굴이 찍힌 청문회 영상을 유튜브 등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프랭크 코스텔로는 목격자에 의해 신원이 확인된 자신의 저격범 빈센트 지간테의 재판에서, 피고인이 자신을 쏘지 않았다고 진술했고 지간테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코스텔로 스스로 마피아 세계를 떠났을지언정 침묵의 계율 오메르타는 지킨 것이다. 기자들이 자신을 쏜 빈센트 지간테에 대해 물어보자 노코멘트 하겠다는 영상도 있다.영상

  • 얼굴이 리처드 닉슨과 닮았다. 둘 다 미국 사회의 양지와 음지에서 정점에 올랐고, 외부에서의 압력으로 스스로 물러난 것도 비슷하다.

  • 1974년 프랭크 코스텔로의 무덤은 보나노 패밀리 두목 대행 카마인 갈란테의 지시에 의해 폭파되었다가 복구되었다. 생전 둘 사이의 원한이 이유로 보인다.

  • 당시로써는 드물게 80의 나이를 넘기며 상당한 장수를 하게 되었다.[4]



4. 어록[편집]


세금을 냈지요!

Paid my tax!

"코스텔로 씨가 국가를 위해 한 일이 무엇입니까?"라는 연방상원의원의 질문에 대한 답변.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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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콘실리에리. 영화 대부에서 젠코 아반단도톰 헤이건이 맡았던 직책이다.[2] 태머니 홀이란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뉴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부정한 정치 조직을 말한다.[3] 모레티와 시나트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마피아/기타 문서 참고.[4] 일본 같은 장수 국가 몇몇을 제외하면 남성의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긴 것은 2020년대에 들어선 최근의 일이며 이 당시에는 70세만 넘겨도 상당한 장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