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페아의 대관식(몬테베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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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대본
3. 오르페오와의 차이점
3.1. 제재의 차이
3.2. 음악의 차이
4. 평가
5. 의혹



1. 개요[편집]


포페아의 대관식(L'incoronazione di Poppea)율리우스의 귀환(Il ritorno d'Ulisse in partita)과 더불어 베네치아에서 작곡한 몬테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이다. 3막으로 구성되어 있고, 1642년에 베네치아의 산 조반니 에 파올로 극장에서 초연했다.


2. 대본[편집]


로마의 역사가들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s) 13~15권과 수에토니우스의 12명의 황제열전,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를 기초로 조반니 프란체스코 부제넬로가 대본을 썼다.


3. 오르페오와의 차이점[편집]



3.1. 제재의 차이[편집]


그의 최초의 작품이었던 오르페오와 비교했을 때 이 포페아의 대관식은 관현악의 규모도 축소되어 있고 발레나 다성양식의 합창등도 없기 때문에 화려함과 볼거리는 상대적으로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오르페오 못지 않게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양식과 기법은 오르페오와는 전혀 다르고, 또 오르페오와는 또 다른 독창적인 요소들이 많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페아의 대관식은 기존에 신화나 미화된 영웅담의 주인공을 소재로 했던 오페라와 달리 역사적 인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주인공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 게다가 내용도 기존의 도덕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데, 사악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포페아가 네로의 첫 아내이자 정숙한 여인인 옥타비아를 몰아내고 황후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권선징악이 아니라 오히려 권악징선(勸惡懲善)에 더 가깝다.[1]


3.2. 음악의 차이[편집]


이와 같은 소재상의 파격 외에도 음악 자체도 대단히 뛰어나다. 오르페오에서 볼수 없었던 3박자의 아리아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등장인물들의 성격묘사와 감정표현을 음악적으로 훌륭하게 처리하고 있다.[2] 이런 인간의 감정 표현에 있어서는 오르페오를 뛰어넘는 수작이다. 이 오페라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역사상 최초의 성격 오페라 또는 사실주의 오페라라고 할 수 있다.[3] 한편으로는 일전의 카메라타의 음악가들이 이상으로 삼았지만 본인들이 구현하지는 못했던 '극과 음악의 일치'라는 이상이 이 포페아의 대관식에서 비로소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4. 평가[편집]


이런 점 때문에 이 포페아의 대관식은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를 통틀어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와 같은 음악적 성취는 이전에는 당연히 없었고 심지어 몬테베르디 이후에도 한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바로크 후기에 접어들면서 오페라의 양식화가 고착되고 매너리즘 경향이 강해지면서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에 무대에는 개성이 없는 평면적인 인물들 위주로 채워졌으며, 카스트라토 가수들이 득세하면서 오페라 음악도 인물의 감정과 심리를 표현하는 것 보다 화려한 가창력을 선보이는게 주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런 탓에 이 포페아의 대관식에서 구현된 음악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글루크모차르트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5. 의혹[편집]


한편 이 포페아의 대관식의 악보는 몬테베르디 사후인 1650년대에 간행되었으며 현재 이 때 간행된 두개의 출판본이 남아 있다. 두 출판본은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판본으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이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악보 여기저기에 다른 음악가들이 작곡한 악절(passage)이 포함되어 있으며[4] 양식상으로 몬테베르디보다 후대의 것이 명백한 악절이 종종 드러난다는 점이다. 특히 오페라 맨 마지막에 네로와 포페아가 부르는 이중창은 몬테베르디가 작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현존하는 이 오페라의 악보에서 몬테베르디가 순수하게 창작한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 논란이 되고 있는데, 많은 전문가들은 이 작품을 몬테베르디 혼자 창작한 것이 아니라 여러 작곡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만든 작품이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당시 몬테베르디가 고령인데다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장편의 오페라를 책임지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오페라의 제작에 참여한 작곡가들로 프란체스코 사크라티 외에 베네데토 페라리(Benedetto Ferrari), 프란체스코 카발리(Francesco Cavalli) 등이 거론되고 있다. 다만 이들이 자신들이 창작한 작품에서 포페아의 대관식과 같은 음악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작곡의 중심역할을 몬테베르디가 맡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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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으로 포페아는 왕비가 된 이후 임신 상태에서 네로에게 배를 걷어차여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오페라는 포페아가 왕비자리를 차지하는 부분에서 끝을 맺는다.[2] 애초에 부제넬로의 대본이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3] 다만 실제 역사를 소재로 하긴 했지만 오페라의 내용 자체가 완전히 합리주의적 사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몬테베르디는 오페라에서 추상화된 덕목을 의인화정확하게는 의신화(疑神化)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 포페아의 대관식에서도 라 포르투나(행운의 신), 아모레(사랑의 신, 큐피드), 베네레(지혜의 신) 등이 등장한다.[4] 예를 들어 프란체스코 사크라티(Francesco Sacrati)의 오페라 미친 흉내(La Finta Pazza)에 있는 악절이 포페아의 대관식에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