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마의 이사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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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대공비
파르마의 이사벨라
Principessa Isabella di Par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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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스페인어
이사벨 마리아 루이사 안토니에타 페르난다 호세파 하비에라 도미니카 후아나 데 보르본파르마
(Isabel María Luisa Antonieta Fernanda Josefa Javiera Dominica Juana de Borbón-Parma)
이탈리아어
이사벨라 마리아 루이사 안토니에타 페르디난다 주세피나 사베리아 도메니카 조반나 디 보르보네파르마
(Isabella Maria Luisa Antonietta Ferdinanda Giuseppina Saveria Domenica Giovanna di Borbone-Parma)
독일어
이자벨라 마리아 루이제 안토니아 페르디난다 요제파 크사베리아 도미니카 요한나 폰 보우르본파르마
(Isabella Maria Luise Antonia Ferdinanda Josepha Xaveria Dominika Johanna von Bourbon-Parma)
출생
1741년 12월 31일
스페인 마드리드 부엔 레티로 궁전
사망
1763년 11월 27일 (21세)
오스트리아 대공국 호프부르크
배우자
요제프 2세 (1760년 결혼)
자녀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크리스티나
아버지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
어머니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형제
페르디난도 1세, 마리아 루이사
종교
가톨릭 (세례명:엘리사벳)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결혼
2.3. 사망
3.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와의 사랑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1. 개요[편집]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의 장녀이자 요제프 2세의 첫번째 아내. 요제프 2세가 황제가 되기 전 사망하여 황후가 되지는 못하였다.

희대의 동성연애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남편 요제프의 여동생으로, 자신의 시누이였던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과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게 사후에 밝혀졌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741년 12월 31일 스페인의 펠리페 왕자프랑스의 마담 루아얄[1]인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장녀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는 펠리페 5세, 외할아버지는 루이 15세였다.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트 12세 때 결혼하여 겨우 14세에 이사벨라를 낳았는데 난산으로 고생했다. 이사벨라 출생 직후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8살이 되기까지 못 보고 자랐고, 그래서 동생들인 페르디난도 1세, 마리아 루이사와는 나이차가 10살이나 난다. 둘 다 1751년생.

이사벨라는 어린 시절을 스페인 궁정에서 보내며 할아버지 펠리페 5세와 할머니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에게 귀애받았지만 어머니에게는 그다지 사랑받지 못했다.[2] 이사벨라는 활동적이고 장난기 많은 아이라 승마와 밧줄 타기 등을 너무 좋아해서 결국 가정교사가 말과 밧줄을 모두 없애버렸다고 한다.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외동으로 자란 이사벨라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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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외가인 프랑스에서 1년을 보내기도 했는데, 당시 루이 15세의 유일한 손녀였기에[3]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프랑스 공주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4] 이사벨라는 엄격한 스페인 궁정과는 정반대로 자유롭고 화려한 프랑스 궁정을 보며 어린 마음에 충격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녀는 오페라나 연극을 즐겨 보았고, 프랑스를 떠난 후에도 외가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2.2. 결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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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에서 가족 초상화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종결과 함께 체결된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아버지 펠리페 왕자파르마 공국의 공작이 되었고, 이에 따라 이사벨라도 파르마 공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을 보낸 스페인과 특히 프랑스의 궁정에 비해 단촐하고 열악한 파르마 궁정을 보고는 도착하자마자 떠나고 싶어 했다.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트도 파르마에 애정을 붙히지 못했고 딸들을 위한 좋은 혼처를 찾기 시작했으며, 이사벨라를 스페인이나 오스트리아에 시집보내려고 했다.

마침 당대의 오스트리아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프로이센 왕국에 대항하기 위해 부르봉 왕가와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 15세의 외손녀인 이사벨라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뛰어난 미모에다 4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고 교양도 뛰어난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다. 이성에 초연하고 어머니에 순응하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 요제프 또한 별다른 이견이 없어 1759년 여름 결혼 협상은 마무리되었지만, 그 해 겨울 이사벨라의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트가 천연두에 걸려 3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이사벨라는 우울증을 앓게 되었고, 자신도 일찍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혼식이 다가오고 이사벨라는 드디어 파르마 공국을 뜨게 된 것이 기쁘면서도 가족들과 헤어지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할 때에도 씩씩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펑펑 울고 말았다.

그리고 미래의 남편 요제프 대공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는데 이전까지 결혼 생활에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5] 신부를 사랑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던 요제프는 아름답고 지적인 이사벨라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버린다.

이사벨라에게 매료된 건 남편 뿐만이 아니었다. 시부모인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를 비롯해 거의 모든 오스트리아 궁정의 황실 가족들도 그녀를 좋아했다. 유일하게 요제프의 누나로 황실의 맏딸인 마리아 안나 여대공만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는 이사벨라를 싫어했다고 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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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와 요제프 대공의 결혼식
두 사람의 결혼식은 1760년 10월 6일에 성대하게 거행됐다. 이후의 결혼생활에서 요제프 쪽에서는 이사벨라를 매우 사랑해서 아낌없이 애정을 표현했으나 이사벨라는 남편에 대해 항상 시큰둥했다고 한다.

황태자비가 된 이사벨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후계자의 생산이었지만, 그녀는 임신출산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당시엔 출산 중 사망이 매우 흔한 시기였으니. 1761년 말 처음으로 그녀의 임신 소식이 전해졌을 때에도 모든 황실 가족들이 기뻐했으나, 그녀는 임신 기간 내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했다. 그리고 1762년 3월 20일, 이사벨라는 딸 마리아 테레지아(쁘띠 테레즈)를 출산했다. 황실 가족들은 첫 손주의 출생을 매우 기뻐했으며, 특히 남편 요제프는 딸을 아주 예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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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과 함께

2.3. 사망[편집]


첫 자녀가 딸이었기에 이사벨라는 이후로도 아들을 얻기 위해 1762년과 1763년에 재차 임신했지만 모두 유산했다. 반복된 임신과 유산은 이사벨라를 매우 우울하게 만들었으며, 건강도 악화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이사벨라는 다시 네 번째 임신을 하게 되었으나, 1763년 11월에 당시 오스트리아에 유행하던 천연두에 걸리고 말았고 결국 고열로 인해 딸을 조산했다. 태어난 여대공의 이름은 마리아 크리스티나로 지어졌으나 안타깝게도 태어난 날 사망했다.

요제프는 아이를 낳고 정신을 잃은 이사벨라의 곁을 울고 기도하며 지켰지만, 출산 5일 후 이사벨라마저 21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천연두 감염 위험으로 인해 유해는 별도 방부 처리 없이 딸과 함께 카푸친 교회에 급히 매장된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통적으로 심장을 따로 안장하는데 이러한 과정도 모두 생략됐다.

요제프는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아내가 죽은 것을 매우 애통하게 여겼고, 다시는 그녀만큼 사랑할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뜻에 따라 바이에른의 카를 7세의 4녀 마리아 요제파와 재혼하긴 했으나 전혀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했고 자식도 없었다. 자신과 이사벨라의 유일한 딸로 온 애정을 쏟았던 마리아 테레지아마저도 늑막염에 걸려 7살의 나이로 사망해 버린 뒤로는 안 그래도 냉정한 성격이던 요제프는 더욱 예민하고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다.


3.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와의 사랑[편집]


이사벨라는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개중에서도 한 살 연하였던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과 가장 절친한 사이였다. 둘은 같은 궁정에 거주하면서도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는 우정을 뽐내기도 했다. 실제로 크리스티나가 이사벨라에게 쓴 편지는 모두 태워졌음에도 남은 편지가 200통이 넘을 정도. 그런데 이사벨라의 사후 둘은 절친한 친구일뿐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음이 이사벨라의 편지에 의해 밝혀졌다. 재혼을 한사코 거부하던 요제프에게 크리스티나가 진실을 알려 주기 위해 보여줬던 것.

처음 연애 감정을 느낀 건 이사벨라로, 시집 와서 크리스티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랑에 빠졌고 그녀에게 많은 연서를 보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 것은 맞는데, 이사벨라 쪽이 먼저 좋아했고 더 많이 좋아했다. 크리스티나는 시간이 흐를 수록 이사벨라를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편지 내용에서 이사벨라는 크리스티나를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my most precious treasure)'이나 '나의 위로(my consolation)' 등 깊은 애정이 담긴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고, 남편인 요제프 2세는 그저 그 대공(the Archduke)이라 부르며 애정이 전혀 없음을 확실히 보여줬다. 이외에도 이사벨라는 자신과 크리스티나의 관계를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진 연인인 오르페우스에우리디케에 비유하기도 했다.[7] 둘은 요제프가 사냥을 떠나거나 자리를 비울 때면 몰래 데이트를 했고, 포옹키스와 같은 스킨십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연히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었던 금단의 사랑이었기에 철저하게 숨겼고[8], 실제로 유일하게 요제프의 누나인 마리아 안나 여대공 정도만 의심을 했다고 한다.

이사벨라가 항상 자신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보낸 남편 요제프에게 시큰둥했던 이유도, 자신이 진짜 사랑했던 상대는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사벨라는 이런 금단의 사랑을 하게 되어 동성애불륜이라는 이중의 굴레를 뒤집어쓴 데에 큰 죄책감을 느꼈고 진실로 사랑하는 이와는 평생 함께할 수 있는 관계가 될 가망이 없었기에 우울해했다. 이사벨라는 반복되는 임신과 유산에 이어 어긋난 애정관계 등, 많은 요소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으며 가톨릭 교리에 금하지만 않았다면 진작 자살을 했으리라 짐작되는 수준의 글이 많았다.

이사벨라의 죽음에 대한 크리스티나의 반응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사벨라가 천연두를 앓을 때 끝까지 곁을 지켰고 이사벨라가 남긴 유일한 딸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도 요절하기 전까지 잘 보살펴준 것을 보면 당연히 연인의 죽음에 걸맞는 감정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리스티나는 이사벨라가 죽고 3년 뒤 작센의 알베르트 카지미르 왕자와 연애 결혼을 했는데, 사후 그녀의 기도서에서 이사벨라와 그녀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그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사벨라가 죽은 뒤에야 크리스티나에게 쓴 연서를 보고 두 사람의 관계를 모두 알게 된 요제프 2세는 당연하게도 아내와 여동생에게 배신당한 것에 대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안 그래도 까칠하던 성격이 더욱 인간 불신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했다.

국내에서 이사벨라와 크리스티나의 사랑을 소재로 한 역사 소설로 <황제의 완벽한 사랑>이 있다. 참조 해당 작품은 약간의 작가적 창작을 더하긴 했으나 철저히 고증을 따져서 둘의 사랑을 설득력 있게 그려가며 이사벨라의 사후로도 이야기가 이어지며 서사를 뒷받침한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파르마의 이사벨라
(Isabella of Parma)
파르마 공작 필리포
(Philip, Duke of Parma)
펠리페 5세
(Philip V)
프랑스의 도팽 루이[9]
(Louis, Dauphin of France)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Maria Anna Victoria of Bavaria)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Elisabeth Farnese)
파르마의 공세자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Odoardo Farnese, Hereditary Prince of Parma)
노이부르크의 도로테아 조피
(Dorothea Sophie of Neuburg)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Louise Élisabeth of France)
루이 15세
(Louis XV)
부르고뉴 공작 루이[10]
(Louis, Duke of Burgundy)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11]
(Marie Adélaïde of Savoy)
마리아 레슈친스카
(Marie Leszczyńska)
스타니스와프 1세
(Stanisław I Leszczyński)
카타지나 오팔린스카
(Katarzyna Opalińska)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1녀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
(Archduchess Maria Theresa)
1762년 3월 20일
1770년 1월 23일
2녀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
(Archduchess Maria Christina)
1763년 11월 22일
1763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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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국왕의 첫 딸.[2] 루이즈 엘리자베트는 동생 루이사를 더 사랑했다.[3] 루이 15세는 많은 자녀를 두었지만 첫 딸이자 이사벨라의 어머니인 루이즈 엘리자베트를 제외한 모든 딸이 결혼하지 않았고, 도팽 루이 왕세자는 1750년에야 첫 아이를 낳았다.[4] 이사벨라는 루이 15세의 외손녀이기에 공식적으로는 프랑스의 공주가 아니었다.[5] 편지에 전투보다 결혼이 더 무섭다고 언급할 정도였다.[6] 마리아 안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녀였지만 곱사등이에 병약했던지라, 정략결혼의 수단도 되지 못하는 천덕꾸러기여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 심하게 차별받았다. 그래도 불행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 가장 지적이고 과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런 안나를 가장 사랑해 준 가족은 똑같이 과학을 좋아하던 아버지 프란츠 1세였기 때문에 아버지와 학술적인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런데 이사벨라가 시집온 이후로 프란츠 1세도 뛰어난 미모에 지적이고 똑같은 프랑스 혈통으로, 오스트리아 황실에 입성해 처지가 비슷한 며느리를 사랑해주자 질투했던 것이다. 이사벨라는 마리아 안나의 차가운 태도에 깊은 상처를 받아 다시는 그녀를 믿지 않았으며, 부인을 깊이 사랑했던 요제프 역시 마리아 안나와 멀어졌고 특히 이사벨라 사후에는 마리아 안나를 증오하게 되었다.[7] 당시 궁정음악가 글루크가 동명의 오페라를 썼다.[8] 시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보수의 끝판왕인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당시 시대상의 정서도 동성애를 금기시했으며, 인척인 시누이와 올케간의 불륜이었으니 만약 들통났다면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간의 혼인 동맹까지 뒤흔들 수 있는 정말 큰일나는 관계였다.[9] 루이 14세의 장남이자 펠리페 4세의 외손자이다.[10] 루이 14세의 손자이다.[11]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장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