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피츠앨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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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토머스 피츠앨런.jpg
성명
토머스 피츠앨런
Thomas Fitzalan
생몰년도
1381년 10월 13일 ~ 1415년 10월 13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 서식스 아룬델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 서식스 아룬델 성
아버지
리처드 피츠앨런
어머니
엘리자베스 드 보훈
누이
엘리자베스, 조앤, 앨리스, 마가렛
아내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
직위
아룬델 백작, 서리 백작, 가터 기사단 기사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과 맞섰지만 아르플뢰르 공방전 도중 걸린 질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2. 생애[편집]


1381년 10월 13일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 서식스 아룬델 성에서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과 초대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의 딸인 엘리자베스 드 보훈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엘리자베스[1], 조앤[2], 앨리스[3], 마가렛[4]이 있었다.

1397년, 아버지 리처드 피츠앨런이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에 의해 긴급 체포된 뒤 참수되었고, 피츠앨런 가문의 작위와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었다. 토머스는 리처드 2세의 이복 형제였던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의 피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존 홀랜드는 그를 매우 형편없이 대했다. 당대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존 홀랜드는 그에게 자기 신발을 닦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결국 토머스는 존 홀랜드의 영지에서 도망쳐 윌리엄 스콧이라는 상인의 도움으로 유럽 대륙으로 피신했다. 이후 위트레흐트에서 리처드 2세와의 갈등으로 잉글랜드를 떠난 전 켄터베리 대주교였고 삼촌이기도 한 토머스 아룬델과 만났다.

토머스 피츠앨런과 토머스 아룬델은 함께 파리로 가서 리처드 2세에 의해 추방된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합류했다. 1399년 7월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로 원정을 떠난 틈을 타 잉글랜드로 건너갔을 때 따라갔고, 그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적극적으로 도왔다. 반란이 성공하고 리처드 2세가 강제 퇴위한 뒤,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이후 토머스는 기사 작위를 받았고, 아룬델 백작위와 영지를 돌려받았다. 10월 13일 새 군주의 대관식이 열렸을 때 집사를 맡았다.

토머스는 헨리 4세에게 리처드 2세를 신뢰할 수 있는 비밀 경비병의 감시 하에 두도록 조언했다. 또한 1400년 1월 리처드 2세를 복위하려는 인사들이 주현절에 헨리 4세와 자식들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었을 때, 그는 군대를 일으켜 음모에 가담한 인사이자 자신을 못살게 군 후견인이었던 존 홀랜드를 체포했다. 그는 존 홀랜드를 조롱한 뒤 즉시 목을 벤 뒤 창에 홀랜드의 머리를 꽂고 런던을 행진했다. 이후 헨리 4세가 웨일즈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와 전쟁을 벌일 때 참여했으며, 1405년 요크 대주교 리처드 르 스크루프와 4대 노퍽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에게 반란을 일으킨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 위원회를 이끌었다. 헨리 4세에 의해 켄터베리 대주교로 복직한 토머스 아룬델은 이에 대해 교회의 왕자들은 영적 법정에 의해서만 재판을 받을 수 있다며 반발했지만, 그는 왕을 지지했다. 이로 인해 그와 토머스 아룬델간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1411년, 웨일스 왕자 몬머스의 헨리의 지시에 따라 1,200명의 부대를 이끌고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과 합류했다. 그들은 파리를 공략하고 아르마냑파를 루아르 강 너머로 밀어냈다. 1412년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의 관리인이자 도버 성주가 되었으며, 1413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413년 몬머스의 헨리가 헨리 5세로 등극한 뒤 재무장관을 맡았으며, 1415년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지만 아르플뢰르 공방전에 참가했다가 중병에 걸려 잉글랜드로 후송된 뒤 1415년 10월 13일 아룬델 성에서 병사했다. 사후 아버지가 지은 아룬델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토머스는 생전에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사생아인 베아트리스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베아트리스는 그가 사망한 뒤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5]와 재혼했다. 토머스가 사망한 뒤 서리 백작위는 왕실에 돌아갔고, 아룬덱 백작위는 토머스의 사촌인 존 피츠앨런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미망인이었으며,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피츠앨런이 자신이 아룬델 여백작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자녀들이 아룬델 백작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1421년 존 피츠앨런이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은 존 피츠앨런 대에서도 쭉 이어지다가 1433년이 되어서야 존 피츠앨런이 의회에서 아룬델 백작으로서의 직위를 확인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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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75년 이전 ~ 1425, 기사 윌리엄 몬타구와 초혼, 제3대 노벅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와 재혼, 기사 호버링엄의 로버트 구셸과 삼혼, 기사 제라드 애플릿과 사혼.[2] 1375 ~ 1435, 초대 베르게베니 남작 윌리엄 뷰챔프의 부인.[3] 1382년 이전 ~ 1415년 이전, 제4대 셜튼 남작 존 셜튼의 부인. 윈체스터 주교이자 잉글랜드 추기경이며 잔 다르크를 심문한 것으로 유명한 헨리 보퍼트와 불륜 관계를 맺고 딸 조앤 보퍼트(1402 ~ 1453)를 낳았다는 소문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음. 조앤 보퍼트는 기사 에드워드 스트래들리의 부인이 됨.[4] 1382 ~ ?, 햄튼 고트의 기사 롤랜드 렌탈의 부인.[5] 토머스 피츠앨런에게 살해된 존 홀랜드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