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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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로브
Karl R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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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칼 크리스천 로브
Karl Christian Rove
출생
1950년 12월 25일 (73세)
미국 콜로라도 덴버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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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종교
개신교
직업
정치 컨설턴트, 월스트리트 저널 칼럼니스트, 뉴스위크 칼럼니스트
소속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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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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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컨설턴트. 리 애트워터와 함께 미국 역사상 최고의 선거 전문가로 불리며, 조지 W. 부시의 측근으로 그의 텍사스 주지사 및 대통령 당선에 큰 공을 세웠다.[1]


2. 생애[편집]


칼 로브는 1950년 12월 25일 콜로라도에서 불안정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을 반복했고 어머니는 그가 31세일 때 자살했다. 불우한 가정 환경 때문에 대학교를 6번이나 옮겼고 최종 학력도 형편 없었으나 정치를 잘 해서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을 지내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1970년에는 공식 선거운동원이 아니었는데도 일리노이주 재무장관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에 대한 악선전을 하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1971년, 그는 3학년 2학기에 유타 대학교를 중퇴하고 공화당 전국위원회(RNC)에 취직해 활동했다. 1973년, 칼 로브는 자신보다 2개월 어린 리 애트워터와 공화당 정치인 조지 H. W. 부시의 도움을 받아 상대 후보를 네거티브로 침몰시키고 대학생 공화당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인연으로 칼 로브는 리 애트워터와 함께 부시의 보좌관으로 활약하게 된다.

칼 로브가 처음으로 컨설팅한 선거 운동은 1978년 조지 W. 부시의 하원의원 재보궐 선거 캠페인이었다. 조지 W. 부시는 칼 로브보다 불과 4살 많았고 둘은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다. 비록 부시는 민주당 강세 지역 지역구에 출마했기 때문에 낙선했지만 47%를 득표하며 크게 선전했다. 1980년, 칼 로브는 조지 H. W. 부시의 공화당 경선 후보 캠페인을 도왔으나, 부시는 레이건에 밀려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지는 못했다. 이후 1980년대까지 텍사스 주 정계에서 활동하며 정치 컨설팅 회사 "칼 로스 앤 컴패니"(Karl Rove & Co)의 규모를 키우는데 집중한다. 1988년, 칼 로브는 조지 H. W. 부시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도왔다.

2.1. 1994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편집]


칼 로브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얻은 것은 1994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서 조지 W. 부시를 도우면서이다. 사실 조지 W. 부시의 텍사스 주지사 출마는 홧김에 이루어진 것에 가까웠고 아버지 부시마저 아들의 텍사스 주지사 출마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칼 로브는 부시를 힘껏 도와 경선에서 승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주지사였던 앤 리처즈는 인기 많은 주지사로 19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의 부통령 후보군으로 고려될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이 때문에 정치 신인이자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주로밖에 알려지지 않았던 조지 W. 부시가 당선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으나 칼 로브는 온갖 종류의 선거운동으로 이 구도를 반전시킨다. 바로 여론조사를 가장해 "앤 리처즈 후보가 레즈비언이라면 리처즈 주지사의 재선에 투표하시겠습니까?"라고 텍사스 주민 모두에게 전화를 돌린것. 당연히 앤 리처즈 주지사는 허위사실 유포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칼 로브는 여론조사를 한 것일 뿐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그렇게 황당하게 레즈비언 이미지가 씌인 앤 리처즈는 1994년 주지사 선거에서 53.5% 대 45.9%로 조지 W. 부시에게 완패하고 만다.

1994년 주지사 선거는 린든 B. 존슨이 다져놓은 텍사스 민주당의 지지 기반이 무너진 첫번째 선거로 여겨진다. 1994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이 예상 밖 완승을 거두며 텍사스가 주 정계 단위에서도 점차 부시 부자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공화당 우세주로 변했다고 평가받는데 칼 로브가 이에 공헌한 바가 적지 않다.

2.2.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편집]


1998년 주지사 선거에서도 조지 W. 부시 주지사는 68.2%를 득표하며 압도적으로 재선에 성공한다. 조지 W. 부시는 2000년 대선 출마를 고려하고 있었지만, 지지율이 높지 않았다. 1위를 기록하긴 했으나 잭 켐프, 엘리자베스 돌[2], 존 매케인, 스티브 포브스, 뉴트 깅리치 등 쟁쟁한 주자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특히 존 매케인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조지 W. 부시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하며 부시 대세론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칼 로브는 매케인을 향해 "베트남 전쟁에서 고문을 피하려고 동료의 정보를 술술 불었다"라는 거짓 정보를 유포해 강경 보수층이 매케인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때 만들어진 별명이 Songbird(송버드, 노래하는 새)로, 북베트남에 술술 미군의 기밀 정보를 자백했다는 것을 앵무새에 빗댄 것이다.[3] 압권은 존 매케인이 흑인 비서와 불륜을 해 흑인 아기를 낳았는데 이를 숨기고 있다는 것으로, 이 두 루머로 존 매케인 대세론은 침몰하고 조지 W. 부시가 압도적으로 경선에서 승리하게 된다.

본선에서 칼 로브는 앨 고어를 "리무진 리버럴"이라고 공격하며 이에 대비되게 조지 W. 부시를 친근한 이미지로 보이도록 마케팅했다. 비록 토론에서나 선거운동에서나 앨 고어가 지적으로나 능력으로나 부시를 앞질렀지만, 칼 로브는 이를 뒤집어 앨 고어를 "잘난척하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부시를 "호감 가는 친절한 이웃집 아저씨"로 대비시켜, 결과적으로 보수표가 부시로 결집시켜 부시가 승리하도록 했다. 2000년 대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칼 로브는 정치 컨설턴트로서는 이례적으로 백악관에 취업해 대통령 수석 고문의 자리에 오른다.


2.3.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편집]


2004년 대선을 앞두고 조지 W. 부시의 지지율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전쟁에서 대량 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으면서 부시 책임론이 대두된 것. 민주당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전쟁영웅 존 케리 상원의원이 대선 후보로 출마하며 조지 W. 부시의 안보관을 파고들었고 조지 W. 부시의 지지율은 케리에 비해 뒤쳐졌다. 칼 로브는 이를 뒤집기 위해 존 케리의 안보 경력에 정면 대결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른바 SBVT(진실을 위한 참전용사 조직)이라는 정체불명의 집단을 만들어, 마치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들이 존 케리의 공적이 "과장"된 것처럼 주장하며 진실 여부와 상관 없이 존 케리를 무공훈장을 따기 위해 미쳐 날뛰었던 "가짜 전쟁영웅"으로 공격한 것이다.[4] 존 케리는 격분해 SBVT의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이 조직이 공화당과 연관된 것으로 드러나며 부시는 망신을 샀지만 이미 여론은 부시 쪽으로 기운 후였다.

칼 로브는 이 외에도 존 케리를 Flip flopper, 즉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일관성 없이 정책을 펴는 사람으로 매도했다.[5] 그리고 400만표에 달하는 복음주의 투표가 결집하면 대부분의 경합주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일부러 동성혼과 낙태에 있어 강경한 입장을 펴 강경 기독교 신자들의 투표를 유도했으며, 히스패닉의 보수표를 이끌어내 2004년 선거에서 처음으로 히스패닉이 공화당의 손을 들어주게 만들었다.[6] 칼 로브는 존 케리가 여론조사에서 앞설지라도 경합주 미네소타, 오하이오, 미시간, 위스콘신, 플로리다, 뉴멕시코를 모두 따야 승리할 수 있는 반면 조지 부시는 이중 한 두 주만 따도 이길 수 있다는 논리로 큰소리를 쳤는데 이게 현실화되면서 존 케리는 결국 대선에서 석패하게 된다.

2004년 대선 이후, 칼 로브의 몸값은 더 올라갔고 부시는 그를 비서차관으로 임명한다. 이 당시 칼 로브의 위세를 꺾을 수 있는 인물은 딕 체니 말고 아무도 없었다고 전해지며, 사실상 딕 체니에 이은 백악관 서열 2위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2.4. 몰락[편집]


조지 W. 부시와의 사적인 우정까지 겹쳐져 2006년까지는 칼 로브가 대통령이라는 말까지 나왔지만 결국 칼 로브의 위세는 2006년 이후 끝나게 된다. 칼 로브가 저지른 비열한 술수로 워싱턴 정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었으며, 부시의 레임덕이 시작되자 칼 로브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다. 리크 게이트와 칼 로브의 연관성이 발견되고, 심지어 이라크 전쟁 포로에 대한 물고문까지 지시한 것이 드러나며 칼 로브의 이미지는 땅에 떨어졌다.

칼 로브는 마지막으로 2006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전략을 총지휘하며 흔들리던 권력을 바로잡고자 했으나, 칼 로브의 예상보다도 더 크게 민주당이 초압승을 거두며 칼 로브는 처음으로 선거에서 실패를 맛보게 된다. 부시 행정부에 대한 밑바닥 여론의 불만을 캐치하지 못하고 자만하다가 결국 패배하고 만 것이다. 2008년 5월, 칼 로브는 하원으로부터 여러가지 위법행위 및 검사해임 사건 등으로 소환장을 받았으며 이후 정치컨설턴트로서의 활약을 사실상 접게 된다.

2008년 대선 이후, 칼 로브는 공화당에서 제한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여러권의 정치 분석 서적을 내놓았다. 2020년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이 유례 없는 경합이라고 주장했다가 결국 조 바이든이 압승하는 결과가 나오면서 망신을 당하기도 했으며,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도널드 트럼프 선거 특별고문으로 임명됐지만 트럼프가 여론조사 열세를 뒤집지 못하고 패배하며 예전만은 못하다는 말을 들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 올리버 스톤의 영화 더 프레지던트에서 토비 존스가 칼 로브 역을 맡았다. 조지 W. 부시 개인의 전기에 초점을 맞춘 영화인만큼, 이 영화에서 칼 로브는 비열한 선거전략가라기보다는 조지 W. 부시의 친구이자 조언가로서 초점이 맞춰진다. 다만 이라크 전쟁 회의 잔면에서도 "이렇게 꾸물대다간 2004년에 모두 방 빼야할거요"라고 하는 등, 교활한 책략가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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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지 W. 부시의 후임인 릭 페리존 코닌 상원의원도 칼 로브의 도움을 받았다.[2] 1996년 대선 후보인 밥 돌의 부인.[3] 존 매케인은 몇년간 북베트남의 끔찍한 고문을 견딘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칭찬받아도 모자랄 일을 네거티브 수단으로 쓴 것. 이 때문에 존 매케인은 죽는 날까지 조지 W. 부시를 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원수 취급했으며 공화당 내에서조차 윤리적으로 칼 로브가 너무 선을 넘은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4] 나무위키에도 한동안 SBVT의 주장이 진짜인것처럼 쓰여져있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미 해군도 존 케리가 무공훈장 11개를 딴 것은 순전히 그의 영웅적인 행각 때문임을 입증했다.[5] 다만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다가 대선 정국에서 갑자기 반대한 것은 칼 로브의 비열한 술수라기보다는 존 케리 개인의 실책에 가깝다.[6] 2000년 대선에서 히스패닉은 약 51% 대 49%로 고어를 더 많이 지지했지만 2004년 선거에서는 46% 대 54%로 부시의 손을 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