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3세(파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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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
Carlo III, Duca di Parma

이름
페르디난도 카를로 비토리오 주세페 마리아 발다사레
(Ferdinando Carlo Vittorio Giuseppe Maria Baldassarre)
출생
1823년 1월 14일
루카 공국 루카
사망
1854년 3월 27일 (향년 31세)
파르마 공국 파르마
재위
파르마 공국의 공작
1849년 5월 17일 ~ 1854년 3월 27일
배우자
루이즈 다르투아 공주[1] (1845년 결혼)
자녀
마르게리타, 로베르토 1세, 알리체[2], 엔리코
아버지
카를로 2세
어머니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형제
루이사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파일:카를로 3세(파르마).jpg
카를로 3세는 부르봉파르마 가문 출신으로 파르마 공국공작이다.

2. 생애[편집]


파르마 공작 카를로 2세로 즉위하는 루카 공작 카를로 루도비코와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친이 루카 공국을 내팽겨치고 여행을 다닌 덕분에 여기저기 떠돌면서 외국 문물을 많이 접했다. 외아들로서 모친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나 마리아 테레사는 점점 가톨릭에 회귀하는 삶을 살아 10대 이후 어머니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는 자유로운 성향의 부친을 쏙 빼닮으며 성장했다.

자금난에 빠졌던 카를로 2세는 아들을 가까운 친척인 프랑스 부르봉 왕조 샤를 10세의 손녀 루이즈 다르투아(Louise d'Artois 1819~1864)와 결혼시켰다. 그는 루이즈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나 부친의 압력에 굴복하고 1845년 11월에 결혼했다. 부부는 파르마 공국의 마지막 공작 로베르토 1세, 마지막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4세와 결혼한 알리체 등 2남 2녀를 두었다.

1847년 12월 기존에 파르마 공국을 통치하던 마리 루이즈가 사망하면서 파르마 공국으로 돌아갔으나, 파르마에서는 이듬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사주를 받은 세력이 들고 일어나 혁명이 일어났다. 그는 파르마를 탈출했으나 크레모나에서 체포되어 밀라노에 감금되었다. 영국 정부의 협상으로 겨우 풀려난 후 몰타에 잠시 머물렀다 나폴리를 거쳐 영국으로 망명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하면서 파르마 공국에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입성했고 1849년 3월 24일 부친이 퇴위가 발표되면서 파르마 공작이 되었다. 다만 그가 파르마에 입성한 것은 5월 17일이 되어서였고 이후에도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올로모우츠로 떠나면서 국정을 직접 맡지는 않았다.

카를로 3세는 나름 자유주의적인 통치자였고, 그가 통치하던 파르마 공국은 레오폴도 2세가 복위한 토스카나 대공국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그는 영국의 영향을 받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도움으로 복위했으나 오스트리아의 반동주의를 경멸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매력에도 불구하고 궁정 관료들과 파르마 공국 시민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고 1853년까지 그를 암살하려 한다는 궁정 음모에 대한 소문이 팽배했다.

부인 루이즈와의 사이도 신혼 초에만 잠시 좋았을 뿐, 그는 궁정 음모를 좋아하는 루이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트렌토 총독의 처제인 엠마 구아다니(Emma Guadagni 1829~1866)와 불륜 관계에 빠지면서 부부 사이도 완전히 파탄났다.

1854년 3월 27일, 평소처럼 파르마 시내를 산책하다 군인 둘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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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를 10세의 친손녀이자 앙리 5세의 누나다.[2] 토스카나 대공국 페르디난도 4세의 대공비이자 작센의 왕세자비 루이제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