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의 루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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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왕국의 왕세자비
토스카나의 루이제
Luise von Österreich-Toskana


이름
루이제 안토니아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파 요하나 레오폴디네 카롤리나 페르디난데 알리스 에르네스티네
(Luise Antonia Maria Theresia Josepha Johanna Leopoldine Karolina Ferdinande Alice Ernestine)
출생
1870년 9월 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잘츠부르크 공국
사망
1947년 3월 23일 (76세)
벨기에 브뤼셀
배우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1891년 결혼 / 1903년 이혼)
엔리코 토셀리 (1907년 결혼 / 1912년 이혼)
자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하인리히, 마리아 알릭스 카롤라, 마르그레테 카롤라, 마리아 알릭스 루이트폴다, 안나 모니카 피아, 카를로 에마누엘레
아버지
토스카나 대공국 대공 페르디난도 4세
어머니
부르봉파르마의 알리치아
형제
레오폴트 페르디난트, 요제프 페르디난트, 페터 페르디난트, 하인리히 페르디난트, 안나 마리아, 마르가레타 마리아, 게르마나 마리아, 로베르트 페르디난트, 아그네스 마리아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3.1. 자녀
4. 여담



1. 개요[편집]


작센 왕국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왕세자비. 토스카나 대공국의 마지막 대공 페르디난도 4세의 차녀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토스카나 방계 가문 출신이며 외할머니인 파르마-피아첸차 공작부인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프랑스 국왕 샤를 10세의 친손녀다. 카를 1세의 황후 부르봉파르마의 치타와 사촌 지간이기도 하다.[1]


2. 생애[편집]


1870년 9월 2일, 마지막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4세의 딸로 태어났다. 토스카나 대공국은 1860년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폐지되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되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기에 루이제는 사교계에서 인기있는 신붓감 후보였다. 여러 유망한 왕족 또는 귀족집 자제들이 루이제에게 관심을 가졌으나 루이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파일:640px-Frederick_Augustus_III_of_Saxony_with_his_wife_Louise.jpg

루이제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1887년, 작센 왕국의 필니츠 성에서 작센의 왕자이자 제2왕위계승자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를 만났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1891년 11월 21일 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활발하고 격식없는 성격의 루이제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왕실의 엄격함을 견디기 어려워했고, 시댁 식구들과 갈등을 겪었다.

1902년에 시아버지 게오르크가 작센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루이제는 왕세자비가 되었다. 당시 왕실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던 루이제는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앙드레 지롱을 포함해 몇몇 남자와 불륜 사이였는데, 앙드레 지롱과 주고받은 편지가 들통나면서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게오르크는 루이제를 소넨슈타인 성에 있는 정신병원에 넣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궁지에 몰린 루이제는 왕세자비가 된 지 6개월도 채 안 된 1902년 12월에 오빠 레오폴트 페르디난트의 도움을 받아 앙드레 지롱과 함께 야반도주했다. 당시 루이제는 일곱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크게 노한 게오르크는 아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즉시 왕세자 부부의 이혼을 선언했다. 게오르크는 어지간히도 루이제가 싫었는지 그녀가 이후 작센 왕족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돈과 몬티뇨소 여백작 작위를 주고, 죽기 전에 아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에게 두 번 다시 루이제를 들이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루이제는 이혼을 받아들이고 이후 공식석상에서 종종 앙드레 지롱과 함께 나타났다. 그러나 둘은 1년도 안 되어 헤어졌다.

이 일은 엄청난 스캔들이 되어 사교계에 퍼졌다. 이때 루이제에게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동생 3명이 있었는데, 셋 다 언니의 추문으로 인해 모두 혼삿길이 막혔다.


파일:Luise of Austria-Tuscany with Her Secon Husband.jpg

루이제와 엔리코 토셀리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살던 루이제는 1907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음악가인 엔리코 토셀리와 만나 재혼했다. 엄격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대형 스캔들을 일으킨데다가 귀천상혼까지 한 루이제는 가문에서 추방되어 더이상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었으며 모든 칭호와 권리를 박탈당했다. 루이제는 엔리코 토셀리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5년 만에 이혼했다.


파일:Luise of Toskana.Marie Antoinette.jpg

마리 앙투아네트로 분장한 루이제
1911년에 자서전을 출간해 작센 왕국의 정치인들과 전 시댁 식구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루이제는 스스로를 궁중 예법을 싫어해 왕실에서 고립되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비교하며 피해자로 묘사했다. 그리고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꾸미고 다니곤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무일푼이 되어 꽃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1947년 3월 23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숨을 거두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Friedrich August III. von Sachsen)
1남
작센의 왕세자 게오르크
(Georg, Kronprinz des Königreichs Sachsen)
1893년 1월 15일
1943년 5월 14일
[2]
2남
마이센 변경백[3]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Friedrich Christian, Markgraf von Meißen)
1893년 12월 31일
1968년 8월 9일
투른-탁시스의 공녀 엘리자베트 헬레네
슬하 2남 3녀
3남
에른스트 하인리히 왕자
(Ernst Heinrich, Prinz von Sachsen)
1896년 12월 9일
1971년 6월 14일
룩셈부르크의 소피[4]
슬하 3남
버지니아 뒬롱
1녀
마리아 알릭스 카롤라 공주
(Prinzessin Maria Alix Carola)
1898년 8월 22일
1898년 8월 22일

2녀
호엔촐레른 공자비 마르가레테 카롤라
(Margarete Carola Wilhelmine, Prinzessin von Hohenzollern)
1900년 1월 24일
1962년 10월 16일
호엔촐레른의 공자 프리드리히
슬하 4남 3녀
3녀
호엔촐레른 공자비 마리아 알릭스 루이트폴다
(Maria Alix Luitpolda, Prinzessin von Hohenzollern)
1901년 9월 27일
1990년 12월 11일
호엔촐레른의 공자 프란츠 요제프
슬하 3남 1녀
4녀
오스트리아 대공비 안나 모니카 피아
(Anna Monika Pia, Erzherzogin von Österreich)
1903년 5월 4일
1976년 2월 8일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프란시스 대공
슬하 4남 4녀
레지날드 카잔지안
엔리코 토셀리 (Enrico Toselli)
4남
카를로 에마누엘레 토셀리
(Carlo Emmanuele Toselli)
1908년 5월 7일
1969년 7월 24일



4. 여담[편집]


  • 전 남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퇴위하긴 했으나 재위기간 동안 인기많은 군주였기에, 루이제와는 정반대로 퇴위한지 몇년 뒤에도 군중들의 환호를 받을 정도로 지지받으며 평안한 여생을 보냈다.

  • 루이제의 일곱번째 자식인 4녀 안나 모니카 피아는 임신 중 어머니가 가정교사 앙드레 지롱과 야반도주를 했기에 다들 지롱의 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자기 친자로 인정하여 의료진을 파견해 안전하게 출산하게 하고 데려갔다고 한다. 안나 모니카 피아는 자라면서 친부 프리드리히를 닮았으니 다행.

  • 외국으로 시집을 가서 그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들썩한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불륜 상대와 도주하다가 붙잡혀 이혼당했다는 점에서 벨기에의 루이즈 공주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두 사람 다 생전에 자서전을 집필해 자신을 피해자로 묘사했고, 본래의 높은 신분에 비해 불우하게 삶을 마감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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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삼촌인 파르마 공국의 마지막 공작 로베르토 1세의 딸이 치타. 다만 치타가 후처 소생의 늦둥이 딸이라서 루이제가 무려 22살 연상이다. 하지만 치타의 이복언니인 마리아 루이사(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의 왕비)와는 동갑이다.[2] 독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예수회 신부가 되었다.[3] 작센 왕국 멸망 후 베틴 가문 알브레히트계의 수장은 마이센 변경백을 칭했다. 마이센 변경백은 베틴 가문이 작센-비텐베르크 공작으로 임명되어 작센 선제후가 되기 전 칭했던 작위이기도 하다. 현재 작센 주가 원래 마이센 변경백국(Markgrafschaft Meißen)이었고, 대공위시대신성 로마 제국의 작센 공국은 오늘날의 니더작센이기 때문.[4] 기욤 4세의 6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