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둑송첸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赤德松贊, 669~704, 제위 679~704
토번 제국의 3대 첸뽀로, 가르친링을 비롯한 가르 일가 숙청 및 대당관계 악화로 욕을 먹는 첸뽀이다. 중국 사서에는 기노실롱(器弩悉弄)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생애[편집]


첸뽀 망송망첸의 적자로, 679년 아버지 망송망첸이 사망하자 첸뽀 자리에 올랐으며, 그가 집권한 시기는 가르친네가르친링을 비롯한 가르 일가가 실권을 잡고 있었고 당군과의 충돌이 빈번하였던 시기였다.

그러나 토번과 당의 잦은 전쟁으로 인해 가르 일가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1] 699년 치둑송첸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가르친링을 비롯한 가르 일가[2]톤미쌈보따[3]의 톤미 가문을 숙청하였다.

하지만 가르 가문을 숙청한 결과 700년에는 당휴경논궁린에게 패하고 703년 국망포지가 이끄는 군대가 당군에게 대패하는 등 당나라와의 전쟁에서는 손해를 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704년 톤미 가문을 제압하기 위해 남만으로 원정했으나, 병사하고 만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9 08:07:36에 나무위키 치둑송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691년 토번 추장 갈소가 당으로 투항하려 했던 것과 가르친링이 696년 소라한산 전투에서 당군에게 승리하여 당에 안서4진의 중립화와 서돌궐 지역의 분할을 요구했으나 무측천이 가르 일가의 권력 약화를 눈치채고 토번의 요구를 거절하였던 것이 그것이다.[2] 가르친링은 동생 가르다고리와 함께 자살했고 그의 동생 가르찬파가르궁린은 당으로 투항했으며, 무측천이 가르친링, 가르찬파, 가르궁린에게 논씨를 하사했다. 가르찬파는 당으로 투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가르궁린은 당나라에서 활약하게 된다.[3] 토번 문자를 만들었던 토번의 명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