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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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사용
4. 기타


1. 개요[편집]


饌盒 / 饌榼

반찬()을 담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반찬을 여러 층의 그릇에 담아 포개어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용기를 말한다. 이는 현대의 도시락과 비슷하다.

옛날 궁중연회 때에는 주방에서 만든 음식을 연회장까지 가져가야 했으므로 찬합이 요긴하게 쓰였다. 이외에도 이동 중에 먹을 수 있는 보관용과 선물용 등으로 쓰였다.

나무로 만든 상자에 반찬을 넣고 층층이 쌓은 뒤 맨 위의 그릇에만 뚜껑을 덮으면 찬합이 된다. 그 외에 서랍식으로 만들어 음식을 넣고 꺼낼 때 여닫는 형태도 있으며, 이 경우 서랍이 열려 음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앞에 위아래로 여닫는 덮개를 하나 더 덧대는 경우도 있다.

편의상 여러 개의 그릇을 한 번에 들고 다니기 쉽도록 손잡이가 달린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릇만 쌓아서 손으로 들고 다니는 것도 찬합이라고 한다.

집에서 음식은 대개 사기그릇이나 놋그릇에 담아서 먹지만, 찬합의 경우는 들고 다니기 가볍도록 목재나 자기 등으로 만들었다. 목재의 경우 음식의 보관과 부패 방지를 위해 수분에 강하고 통풍이 잘되는 오동나무, 은행나무 등 수종을 이용했고, 대나무쪽을 잇대어 엮은 죽합(竹盒)이나 박목판(薄木板)으로 짠 구조 위에 등나무줄기로 엮어 만든 등합(藤盒) 등이 있었다.

그런데 물기가 있는 반찬을 담아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목재는 썩기가 쉬우니 옻칠을 하여 방수처리를 하는 것이 필수였다. 술안주 등 마른 반찬을 담는 찬합의 경우, 기름칠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나전칠기로 장식하거나 금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전, 흑칠, 주칠 등 고급 찬합과 내부에 옻칠이 되어있지 않은 찬합 등도 있어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2. 역사[편집]


찬합은 본래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조조순욱의 일화에서 보듯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한국보다는 일본에 먼저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1421년(세종 3년) 조선왕조실록일본 규슈 총관이 사신을 보내 서신과 함께 식롱(食籠) 한 개를 바쳤다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며, 식롱은 찬합과 같이 포개는 형태의 용기이다. 1624년에 기록된 조천항해록(朝天航海錄)에는 사신 접대를 담당하던 회동관에서 찬합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조조와 순욱의 고사로 찬합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을 테지만 실제로 사용하기 시작한 건 조선시대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실 기록에서 찬합이 등장한 것은 1847년 '정미가례시일기(丁未嘉禮時日記)'이며, '헌종무신진찬의궤(憲宗戊申進饌儀軌)'에도 연행(燕行)에 사층왜찬합(四層倭饌盒)이 사용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예로부터 상류층에서는 일본제 찬합(왜찬합)이 뛰어나다고 하여 널리 사용했던 것 같다. 특히 조선 말로 갈수록 화접문양 같은 장식을 넣는데, 일본제 찬합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 사용[편집]


현대에는 잘 쓰이지 않기는 하지만, 일본에서는 1월 1일이면 예쁘게 꾸민 찬합에 오세치 요리를 담아서 먹으며, 백화점에서 아예 코너를 만들고 대량으로 판매하기도 하는데, 이것마저도 수요가 너무 많아 예약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초밥도 여기에 포장되어 배달되어 오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구절판을 여기다 담아 먹는데, 층층이 쌓인 찬합은 아니고, 팔각형의 구절판용 그릇이 따로 있다. 다만 구절판이 흔히 먹는 음식은 아니므로 우리나라에서 전통 찬합을 쓸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현대에는 철가방 등으로 계승되었고, 피크닉 때 들고 가는 피크닉 상자, 혹은 소풍이나 나들이 때 들고 가는 도시락 상자가 딱 옛날 찬합 모양이다. 그러나 더 이상 목재를 사용하지 않고, 알루미늄이나 플라스틱 같은 것으로 만들고 있고, 오세치 요리를 담는 찬합 같은 경우도 요즈음에는 아예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경우도 많다.

오늘날 군대에서는 반합(飯盒)이라는 형태로 정착했다. 뜻 자체는 찬합과 똑같은데, 찬합에서 조금 더 간소화된 모양이다.

4. 기타[편집]


  • 흔히 찬합이라 하면 삼국지에서 조조순욱의 고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순욱은 본래 조조의 충직한 책사였고, 조조가 천하의 대세를 거머쥐는 데까지의 과정에서 일등공신이라 할 만한 위인이었으나, 조조가 위공(魏公)이 되기 얼마 전부터 조조와 순욱은 조금씩 사이가 벌어져 끝내 갈등이 깊어졌다. 이에 조조는 음식을 준비했다면서 순욱에게 빈 찬합을 보냈고, 음식은 커녕 텅 비어 있는 찬합을 본 순욱은 어이가 없어서 '승상께서 더 이상 내가 쓸모가 없다 하시는구나!' 하고 탄식하고는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고 한다. 삼국지 정사나 연의에 기록된 내용은 아니고 위씨춘추에 적힌 내용이지만 그 연의에 나온 묘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현대까지도 찬합=순욱이라는 인식이 박혔다.
    • 2019년 말에 배달거지가 사회 이슈로 떠오르면서 이 고사가 배달거지랑 엮이는 경우가 늘었다. 원래는 채워 보냈는데 배달 도중에 수행원이 내용물을 빼먹어서 순욱에게 빈 찬합이 간 것이고 그래서 순욱이 자살했다는 식으로. 당연하지만 이에 맞춰 온갖 변형 패러디들도 등장했다.

  • 찬합 류()라는 글자가 있다. 본래는 欙로 썼으나 간소화된 것이 지금의 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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