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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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復昌
(? ~ 1563)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수초(遂初)이며 호는 양곡(洋谷). 경기도 풍덕(豊德) 출신이다. 유번(有蕃)의 증손자이자 석경(錫卿)의 손자. 현감을 지낸 의손(義孫)의 아들. 진복창의 증조부인 진유번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세종대왕의 스승이었던 권우(權遇)의 둘째 사위였으며, 진복창의 조부인 진석경은 셋째 아들이었다.

1535년(중종 30년) 별시문과 갑과에서 장원급제를 한 뒤, 정자 · 전적을 지내는 등 중앙관직을 역임했으며, 이어 부평부사를 지냈다. 관직생활 10년째이던 1545년(명종 원년) 외직인 부평부사에 있다가 정4품 사헌부 장령으로 중앙정계에 복귀했다. 이때 사관들은 그의 인격을 두고 "사람됨이 경망하고 사독(사악하고 독함)하다"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이후 그의 행적을 미리 보여주는 듯한 기록이다.

그는 이후 사헌부와 사간원의 요직을 번갈아가며 지내면서 정적들을 가차없이 쳐없애는 인물이 되었으며, 인종의 외숙 윤임(尹任)의 대윤(大尹)을 숙청한 사건인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명종의 외숙이자 대윤의 반대파인 소윤(小尹)의 영수 윤원형(尹元衡)의 수하로 활동하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관료들을 탄핵하고 몰아내 죽였다. 진복창의 눈에 걸리면 그 집안의 어린아이까지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사관들로부터 독사(毒蛇)라고 불렸다.

홍문관 응교를 거쳐 1548년(명종 3년) 2월 3일, 사간원의 영수인 대사간에 올랐다. 당시 사관은 이를 두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복창은 권간(權奸) 이기의 심복이 되어 그들의 지시에 따라 선한 사람을 마구 공격하였는데 그를 언론의 최고책임자로 두었으니 국사(國事)가 한심스럽다."


처음에는 권력가였던 이기의 수하에 서서 반대파를 탄핵하고 공격함으로서 자신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을사사화가 성공하면서 권력의 축에 들어가 득세했던 이기의 아래에 몸을 맡기고 있다가, 윤원형이 이기를 몰아내려하자 얼른 이기에게서 등을 돌려 그의 등에 칼을 꽂게 된다.

그가 대사간에 오른 1548년 4월 19일, 대사헌 구수담(具壽聃)이 이기를 탄핵하고 나서자, 구수담의 편을 들어 이기를 탄핵함으로서 보기좋게 이기를 배신했다. 비록 처음에는 구수담이 유배를 당하면서 잠잠해지나했던 여론은 이기에게 등을 돌려 그를 공격했고, 진복창은 그 가운데서 이기를 비난하는데 열을 올렸다. 결국 1552년 이기는 실각하게 되고, 조정의 중심권력은 드디어 윤원형의 것이 된다. 윤원형이 조정의 모든 실세를 장악하자 이기에게 충성을 바치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철저히 윤원형의 심복으로 행세하며 윤원형과 자신의 정적들을 계속 몰아냈다. 한편, 진복창은 1549년(명종 4년) 5월에 홍문관 부제학에서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에 올랐다. 조정 관리들의 목숨줄을 틀어쥐는 자리에 오르자, 몇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리는 등 명종의 눈에 강직한 사람으로 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렇게 임금의 신뢰를 받게 되자 그 자만은 극에 달했다. 게다가 자신을 지난날 사헌부 장령으로 추천했던 은인이기도 했던 이조판서 허자를 탄핵하여 실각시키고, 자신의 스승인 구수담도 자신의 뜻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모함하여 죽였다. 이렇게 배신의 일로를 걷게 되자 그에 대한 악평은 늘어만 갔다.

사태가 이 정도에 이르자 그를 지지했던 사간원과 사헌부의 인사들이 등을 돌렸고, 그를 탄핵하게 된다. 처음 명종은 진복창이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신하라 하며 그 탄핵들을 물리쳤지만, 윤원형은 그를 가만히 놔뒀다가는 자신과 누나 문정왕후의 앞길에 방해가 될 거라고 여겨 그를 험한 변방 삼수로 유배보냈다.

1561년, 그의 아들 진극당이 과거에 급제하자 언관들은 진복창을 다시 비난하기 시작했다. 진복창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사통하다가 진의손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이 진복창이고, 따라서 그의 어머니는 음탕한 여자이며 행실이 방종하기 이를 데 없으며, 진복창과 진극당은 이런 여인의 소생이므로 관직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진극당의 과거급제는 취소되었으며, 그를 합격시킨 시험관들에게까지 처벌이 미쳤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그의 사악함은 개선될 기미가 없었다. 귀양지 삼수에서 백성들의 논밭을 빼앗고 그 지방 토호들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며, 사사롭게 형틀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폭행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은 그의 죄가 전혀 씻겨질 기미가 없다며 가시울타리를 두른 집에 감금[1]했다.

이후 유배 2년만인 1563년(명종 18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진복창은 오늘날까지도 간신의 오명과 문명(文名)의 두 가지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는 당대에 간신으로 삶을 마쳤지만, 한편으로는 문장에 뛰어난 수재이기도 했다. 역대 제왕의 사적을 노래한 역대가는 그가 귀양가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그의 대표작으로 전체가 전하지는 않지만 순오지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을사사화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던 윤원형과 그의 첩이었던 정난정, 그리고 윤원형의 누나이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권력투쟁기를 그린 작품 여인천하에서는 공교롭게도 등장하는 신이 없다. 을사사화 때 그가 보여주었던 면모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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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 위리안치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