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토끼굴 속으로
[1] 『앨리스는 언니와 함께 강둑에 앉아 있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점차 몹시 지루해졌죠. 언니가 읽는 책을 한두 번 흘깃 바라보았는데 거기엔 그림도 없고 대화도 없었어요. "그림도 없고 대화도 없으면 책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거지?" 라고 앨리스는 생각했지요.』
"그렇지. 책은 역시 만화책이지."
화자는 지크하트가 정해진 대사 이외의 발언을 하는게 못마땅한지 눈을 흘기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차라리 데이지 꽃다발이나 만드는 게 낫곘다고 생각한 앨리스가 데이지 꽃을 뽑기 시작한 그 순간이었어요. 그때, 갑자기 분홍 빛 눈의 하얀 토끼 한 마리가 가까이 뛰어오는게 아니겠어요?』
"에구구! 에구구! 너무 늦었을 거야!"
토끼는
라임이었다. 지크하트와 달리 라임은 자신의 역할에 맞는 열연을 했다.
『딱히 특별할 것이라고는 없었어요. 심지어 토끼가 하는 혼잣말을 들었을 때도 말이죠. 앨리스는 나중에야 이 시점에서 놀랐어야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때는 너무도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어요. 하지만 토끼가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고 서두르자, 그제서야 이전에는 조끼를 걸치거나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는 토끼를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스쳐 지나갔고, 호기심에 불타올라서 토끼를 쫓아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어요.』
"...귀찮아."
『달리기 시작했어요. 시작했다니까요?』
화자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앨리스, 그러니까 지크하트는 뭉그적댈 뿐이었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거 그거지? 린 네 꿈."
린의 자장가는 주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단히 효과적이였다. 잠들 수 없을 만큼 피곤해서 끙끙 거리고 있다가도 린의 자장가를 들으면 편히 잠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이라면 어김없이 털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상쾌해지기 때문에 많은 그랜드체이스 대원들은 린의 자장가로 부터 도움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린이 매실주에 취한 날에는 아무도 그녀에게 자장가를 부탁하지 않았다. 취기가 오른 린의 자장가를 들으면 그녀의 꿈에 끌려가 버렸기 때문이다. 린의 말도 안되는 꿈 속에서 헤매다 보면 심신이 모두 지쳐버리게 되니 잠을 안 잔 것만 못하게 되었다.
'차라리 밤을 새울지언정 취한 린의 곁에서 잠을 청하지 마라' 라는 것은 그랜드체이스 대원들이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 격언이였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란 말이야. 난 그냥 아침이 올 때까지 여기 누워서 기다리련다.
"......"
언니 역의 마리는 무언으로 긍정했다.
말하자면 이곳은 린이 꾸는 꿈의 도입부 같은 것이다. 여기서 더 호응하지만 않으면 괴상한 꿈 속 이야기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누군가 호응해 린 꿈속으로 본격적으로 빠져들면 좋든 싫든 꿈의 결말부를 향해 달려가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린은 지크하트를 설득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꿈에 취한 토끼 라임이 충실히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운 좋게도 토끼가 울타리 바로 밑의 큰 토끼굴로 쏙 들어가는 걸 볼 수 있었어요.』
"야! 라임! 쓸데없는 얘기는 안들어도 되잖아!"
지크하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라임을 뜯어말리려 했다. 라임이 토끼굴로 굴러 떨어지는 것 보다 지크하트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아 들어올리는 것이 더 빨랐다.
그러나 그보다 라임이 '시계'를 꺼내들고 시간을 확인하는 게 더 빨랐다.
"늦었어! 큰일이야, 늦었다구!"
"허리춤에 평범한 회중시계 있잖아? 왜 마치 무기처럼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시계를 꺼내드는 거야?"
커다란 시계가 된 블레싱 해머로 땅바닥을 내리친 것은 그 직후였다.
쩌적.
땅이 갈라졌고 토끼와 앨리스, 라임과 지크하트는 기어코 토끼굴을 통해서 린의 꿈 속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아야!"
『토끼굴은 갑자기 아래로 푹 꺼져버렸어요. 너무 갑작스러워 멈추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시간이 없어서,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아주 깊은 우물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답니다.』
"...린, 너 묘하게 신난 듯하다?"
[2] 『기분탓이었어요.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가고, 끝도 없이 떨어지던 두 사람은 갑자기 쿵! 쿵! 소리를 내며 나무가지와 마른 잎 뭉치에 떨어지면서 드디어는 떨어지는 것이 끝이 났답니다. 앨리스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곧바로 깡총 뛰어 일어섰어요.』
"아이고 내 귀야, 수염아, 늦어버렸어."
떨어지는 충격으로 토끼귀와 수염 분장을 떨어뜨린 라임은 엉금엉금 기면서 바닥에 떨어진 분장 소품을 찾고 있었다.. 지크하트는 그런 라임에게 다가가 꿀밤을 때려줬다.
"히꾹?! 지, 지크하트 선배님?"
"라임. 너 때문에 결국 나까지 린의 꿈 속으로 끌려들어와 버리고 말았잖아!"
"아! 이건 린 씨의 꿈 속이었군요?"
"알라차리는 게 너무 늦잖아!"
"아하하하. 죄, 죄송해요. 어째 여신님의 계시처럼 린 씨의 목소리는 거부할 수가 없어서..."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빨리 이 꿈을 끝내버리자. 이제 어떡하면 돼?"
"... 그걸 왜 제게 물으세요, 선배님?"
"내 역할은 '널 쫒아가는 것' 뿐 이었어. 앞으로 이 꿈에서 뭘 어찌해야할지는 네 역할에 정해져있지 않을까?"
"아."
지크하트의 발언에 라임은 수긍하며 복색을 다듬었다. 토끼귀는 다시 모자에 꽂을 수 있었지만 결국 수염을 찾지 못했다.
"시간토끼와 모자장수 인데요?"
"엉? 왜 역할이 두개야?"
"에... 등장인물이 부족해서?"
두가지나 해야 된단 말이지. 지크하트는 한 숨을 푹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