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보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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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존 보몬트
John Beaumont
생몰년도
1409년 또는 1410년 8월 16일 ~ 1460년 7월 10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팔킹엄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셔 노샘프턴
아버지
헨리 보몬트
어머니
엘리자베스 윌러비
누이
엘리자베스
부인
엘리자베스 펠립, 캐서린 네빌
누이
조앤, 헨리, 윌리엄
직위
보몬트 남작, 보몬트 자작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고,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2. 생애[편집]


1409년 또는 1410년 8월 16일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팔킹엄에서 제5대 보몬트 남작 헨리 보몬트와 어스비의 제5대 윌러비 남작 윌리엄 윌러비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 엘리자베스는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장남 존 네빌의 막내이자 기사엿던 토머스 네빌의 부인이 되었다. 그의 5대조인 헨리 보몬트는 라틴 제국의 황제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었던 장 1세의 손자로, 잉글랜드에 정착한 뒤 잉글랜드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1309년 보몬트 남작 칭호를 받았다. 이후 보몬트 가문은 대대로 북부 카운티에서 상당한 영지를 누렸고, 스코틀랜드 백작이라는 명예 칭호를 가졌다.

3살 때인 1413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모든 영지와 보몬트 남작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의 후견을 받았고,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가 그의 영지를 관리했다. 1429년 헨리 6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으며, 1431년 성년이 된 뒤 보몬트 남작이라는 이름으로 의회에 소환되었다. 1425년에서 1436년 사이에 6대 바르돌프 남작인 윌리엄 펠립의 딸이자 상속녀인 엘리자베스 펠립과 결혼했다. 1441년 장인이 사망한 뒤 이스트 앵글리아의 막대한 재산을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았고, 이로 인해 잉글랜드 북부에서 매우 강력한 남작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436~1437년 랭커스터의 험프리의 지휘하에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군대에 포위된 칼레를 구원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그 결과 칼레는 해방되었다.(2차 칼레 공방전) 이 때의 공을 인정받아 불로뉴 백작을 수여받았으며, 1438년 랭커스터 공국과 레스터 및 도닝턴 성의 청지기가 되었다. 1439년 왕실 추밀원의 일원이 되었다. 1440년 보몬트 자작에 선임되었는데, 이는 프랑스군이 볼로뉴 카운티를 공략해버리면서 영지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왕실의 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45년부터 잉글랜드 순경을 맡았으며, 1446년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을 수행했고, 1450년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을 수행했다. 또한 이 시기에 가터 기사단의 기사에 발탁되었고, 1445년 "최고 자작"이 되면서 이후에 자작 칭호를 받는 모든 영주들보다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다.

존 보몬트의 권세는 1443년 북부의 최강 가문인 네빌 가문에 속하고 모브레이 가문의 광대한 영지의 3분의 1을 통제했던 노퍽 여공작 캐서린 네빌과 두번째로 결혼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그는 1444년 상속인 없이 사망한 토머스 에딩턴의 재산을 매입했고, 1447년 랭커스터의 험프리가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의문사한 뒤 험프리의 재산 일부를 받았다. 그는 초대 서퍽 공작이자 헨리 6세의 총신인 윌리엄 드 라 폴의 동지로서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1450년 윌리엄 드 라 폴이 몰락했지만, 존 보퍼트는 이에 따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같은 해 잭 케이드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런던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453년 여름, 헨리 6세가 잉글랜드 남부를 순행하던 도중에 정신병에 걸리면서 통치가 불가능해졌다. 이에 요크의 리처드가 섭정을 맡았다. 존 보몬트는 리처드의 통치에 대체로 협조했지만, 리처드와 왕실 측근 사이에 다툼이 벌어질 때 왕실 편을 들곤 했다. 1454년 리처드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1455년 이후 랭커스터 왕조에 가담했지만,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장미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질 때 헨리 6세 치하의 의회에 남은 몇 안 되는 대영주 중 한 명이었으며, 1455년 7월 의회가 왕실의 비용을 조사하기 위해 창설한 위원회에 가담했고, 1457년 1월에 결성된 웨일스 왕자 의회에서도 봉사했다. 이는 랭커스터 왕조의 실질적인 권력자였던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음을 암시한다.

1459년 코벤트리에서 열린 의회에서, 그는 윌트셔 백작 제임스 버틀러, 슈루즈베리 백작 존 탈보트[1]와 함께 요크 가문의 영지를 몰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1460년 7월 노샘프턴에서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과 전투를 벌였을 때 중앙 부대를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3. 가족[편집]


  • 엘리자베스 펠립: 6대 바르돌프 남작 윌리엄 펠립의 딸.
    • 조앤 보몬트(? ~ 1466): 티치마쉬의 제8대 로벨 남작 존 러블의 부인.
    • 헨리 보몬트(1438 ~ 1460년 이전)
    • 윌리엄 보몬트(1438 ~ 1507): 아버지 사후 보몬트 가문을 회유하고 싶어한 에드워드 4세의 호의로 보몬트 남작위와 재산을 그대로 받았지만, 이에 넘어가지 않고 랭커스터 왕조를 위해 계속 싸웠다. 1461년 3월 29일 타우턴 전투에서 패배하고 생포된 뒤 사면받았지만 직위는 박탈되었고, 모든 재산은 기사 윌리엄 헤이스팅스에게 넘어갔다. 1470년 헨리 6세가 왕위를 되찾았을 때 즉시 직위와 영지를 회복했다. 이후 1473년까지 제13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와 함께 요크군에 맞서 항전했지만 끝내 패배하자 프랑스로 도주한 뒤 파리에 있던 헨리 튜더와 합류했다. 1485년 여름 헨리 튜더와 함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한 뒤 보스워스 전투에 참가해 리처드 3세를 꺾는 데 기여했다.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등극한 뒤 모든 직위와 영지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1487년 정신 질환에 걸려 무능력자로 선고되었고, 그의 영지는 존 드 베레에게 관리되었다.
  • 캐서린 네빌(1397 ~ 1483):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딸. 존 보몬트와 결혼하기 전에 2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와 초혼, 기사 토마스 스트랭웨이즈와 재혼했다. 존 보몬트가 전사한 뒤 기사 존 우드빌과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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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오래도록 투쟁했던 존 탈보트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