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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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2. 밑바닥 생활
3. 스페인 내전 참가와 〈카탈로니아 찬가〉
4. 2차 세계대전 시기의 활동
5. <동물농장> 집필
6. <1984>와 죽음






1. 초기[편집]


1903년, 인도 벵골에서 아편국 하급 관리인 리처드 블레어와 프랑스계 영국인인 아이다 리무쟁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이듬해인 1904년 어머니 아이다, 누나 마저리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수도원 산하의 유치원에서 교육받았다. 1913년 시프리언스 사립예비학교에 반액 진학생으로 진학했지만 부잣집 도련님들과 명문학교 진학을 강요하는 노골적인 상업성을 띄는 면학 분위기와 교장 부분의 야만적 처우 때문에 지옥같은 5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성적은 우수하여 왕립 장학생으로 1917년 이튼 칼리지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세인트 시프리언스의 입시 교육에 단단히 질려 주로 독서에 집중하였고, 졸업할 즈음엔 그다지 성적이 좋지 못했다(167명 가운데 137등). 몇몇 교사들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학생이었다고 한다.한편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멋진 신세계>를 집필한 영국의 명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당시 오웰의 프랑스어 교사였다. 헉슬리도 제국주의자를 양성하는 이튼의 풍조에 적응하지 못해서 학생들에게도 경멸당하는 어설픈 선생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정작 오웰은 헉슬리를 좋은 자질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했단다.

오웰의 성적으로는 더 이상 대학교의 살인적인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학업에 흥미도 없어져서 대학 진학은 포기하고 인도 제국 경찰관 시험에 응시하였다. 시험을 간신히 통과한 그는 모두가 기피하던,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근무하였던 버마를 근무 희망지로 신청하였는데 이튼 칼리지 출신의 인도 제국경찰은 그가 유일했다고 전한다.

당시 버마에는 영국 경찰관이 90명이었고 그 밑에 관리하는 버마 경찰이 1만명이 넘었다. 주급 봉급도 14파운드나 되었는데[1] 오웰은 1945년 동물농장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이 시절의 수익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버마에서는 1922년부터 1927년까지 5년간 재직하였으며 꽤 성실하게 근무하였지만[2] 제국주의와 백인의 의무를 내세우는 영국인들의 위선에 크나큰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결국 1927년,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내기 위해 병가를 얻어 귀국하였다가 사표를 제출하고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오웰은 1934년에 <Burmese Days>(국내에서는 <버마시절>로 출간)을 집필해 이 시기를 신랄하게 깠다.


2. 밑바닥 생활[편집]


사표를 낸 뒤, 그는 이모가 사는 파리로 이주하였다. 처음에는 글로 먹고 살 생각이었지만 현실은 시궁창. 영어 알바나 번역, 신문 기고 등으로 간신히 먹고 살았지만 도둑맞아 재산 대부분을 털린 뒤에는 시궁창스러운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된다. 알고 지내던 러시아인 보리스와 함께[3] 호텔과 영세 레스토랑 등지에서 하루에 열세 시간씩 접시닦이로 일하다 친구에게 교통비를 빌려 반쯤 도망치는 신세로 영국으로 돌아오고, 이후 일자리가 생기기 전까지[4] 노숙자들과 방랑 생활을 하기도 했다. 바로 이 때의 경험을 밑천으로 한 작품이 <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1933)이다. [5] 이 책은 오웰을 르포작가로서 세상에 알린 첫 작품이 되었다. 이 책에는 그가 실제로 겪었던 노숙생활에서 본 부랑자, 일용직 노동자, 불량배 등 다양한 사람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 내용이 가감없이 포함되어 있다.[6] 이는 지금도 언어적[7], 문화적, 사회적 측면에서 영국 하층민의 생활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에는 에스페란토 운동에 관심 가지거나 가정교사 일도 잠시 하였고, 홈리스 생활을 하던 중에 켄트로 가서 줍는 일도 하다 한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고, 15개월 동안 서점 점원으로 일한 것도 이 시기의 일로, 이 때의 경험은 <목사의 딸>(A Clergymans Daughter, 1935)과 <엽란을 날려라>(Keep the Aspidistra Flying,1936)의 집필로 이어졌다. 그러나 1946년 조지 오웰은 유언장을 작성할 때 이 작품을 "순전히 상업적인 이유"에서 저술했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사후에 재발간을 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렇게 경험을 쌓던 오웰은 그와 전업 계약을 체결한 빅터 골란츠로부터 탄광 노동자의 생활에 대한 글을 써줄 것을 요청받았는데, 그렇게 탄생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The Road to Wigan Pier, 1937)은 골란츠가 대표로 있던 레프트 북 클럽(Left Book Club) 회원들에게 돌려져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 작품은 조지 오웰이 자신의 민주사회주의적 가치관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글쓰기로 먹고 살만한 수준이라는 것이지 빈곤이 해결된 것은 아니라서 식료품상 등의 부업을 계속해야 했다.


3. 스페인 내전 참가와 〈카탈로니아 찬가〉[편집]


1936년 12월, 결혼 6개월 만에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의 소식을 듣고 바르셀로나로 달려갔다. 이곳은 아나키즘의 이름 아래 평등한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오웰은 여기서 인간다운 희망을 얻었다. 하지만 상황은 열악해서 전투는 얼마 없었지만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의용군이 고통받았고, 참호전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추위와 냄새였다고 회고했다.

이곳에는 다양한 정파들이 있었지만 서로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그러나 평등한 곳이라 여겼던 바르셀로나는 위장일 뿐이었다. 도시의 부르주아지들은 시류를 따라 위장한 것이었으며 모스크바의 지령을 따르는 중앙집권적인 스페인 공산당이 공화국 정부의 권력을 차지했다. 급기야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5월 사건이 일어나 공산당(소련파)와 아니키스트파(반소련파)가 무장 교전을 벌였다. 중앙정부가 카탈루냐의 자치를 짓밟고 아나키스트와 그가 소속되었던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을 분쇄하고 말았다. 마침 휴가를 얻어 바르셀로나에 있던 조지 오웰은 반파시즘의 대의 아래에서 동맹이라 믿었던 좌파들끼리 서로 죽여대는 모습을 목격하고 깊은 회의감에 빠진다.

전선으로 복귀한 조지 오웰은 저격당해 목을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8] 그런 와중에,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이 스페인 공산당 측에게서 트로츠키파로 의심받기 시작하였고 대표로, 조지 오웰과 스페인 내전에 초기 참전에 함께한 아나키스트는 스탈린주의자에게 가장 많이 학살당하고 탄압당한 탓에 세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별 생각없이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의용군에 입대한 상태였던 조지 오웰에게도 수배령이 떨어졌다.[9] 사경을 헤매던 오웰은 공산당이 급습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겨우 스페인을 탈출하여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귀환했다.[10][11]한 이때의 경험은 르포르타주 <카탈로니아 찬가>에 잘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군소 출판사에서 출판한 탓에 대실패를 거두었고 그의 죽음 이후에서나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간의 갈등을 묘사한 점이 재평가받게 되었다.

그 뒤에 심신이 피로해진 조지 오웰은 모로코로 떠나 요양하면서 <숨 쉬러 나가다 (Coming up for air, 1939)>를 집필하면서 1년간 생활하게 되었다.


4. 2차 세계대전 시기의 활동[편집]


1939년, 아돌프 히틀러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오웰은 세계대전을 제국주의의 음모로 보고 반전을 주장한 독립노동당을 탈퇴한 후, 전쟁 발발 8일 후인 9월 9일에 영국 육군에 입대를 신청했지만 폐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이후 선전을 위한 집필도 제안했으나 인민전선에 참전한 경력 문제 때문인지 이 역시도 거부당했다. 그나마 영국 육군의 보조 조직인 홈가드에 입대하는데 성공했다.

오웰은 1941년에 BBC에서 대인도 선전방송의 원고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담당했으나, 제국주의적 태도와 검열 등에 불만을 품고 그만두게 되었다. 1943년부터는 '트리뷴'에서 문예 편집자로 일했다.[12]

한편 1942년에는 '평화주의와 전쟁'이라는 에세이를 기고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평화주의는 파시즘의 편"(Pacifism is objectively pro-Fascist)이라면서, 연합국 내부의 반전, 평화주의 주장이 히틀러를 위시한 침략 세력에게 악용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13]

5. <동물농장> 집필[편집]


2차대전이 끝난 1945년에는 스탈린 체제 소련을 풍자한 우화 <동물농장>을 출간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영국과 동맹 관계였던 소련과 스탈린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한동안 출판은 어려웠으며, 심지어 쓰는 와중엔 런던 공습 중에 원고가 타버릴 뻔했다. 하지만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 공산주의 전체에 대한 풍자로 왜곡, 미화된 덕분에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출판되었다.

미국의 반공산주의 풍토로 인해 더욱 인기몰이를 한 케이스 이긴 하다. 시대를 잘 타고 났다긴 하지만 작품 자체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 시대에만이 아니라 현대 독자들 에게도 감동을 준다. 여담으로, <동물농장>이 애니메이션화될 때, 그 배후에는 CIA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소설과 달리 애니메이션에서는 민중혁명으로 돼지 나폴레옹 일당이 몰락하는 최후가 나온다.


6. <1984>와 죽음[편집]


<동물농장>으로 유명해진 오웰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우울감과 멀지 않아 핵전쟁이 터질거라는 공포 때문에 스코틀랜드 주라 섬[14]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1946년도에 <1984>를 집필하여 1949년 11월에 드디어 출간하였다. 그는 병이 심하지만 않았다면 <1984>도 그다지 어둡지는 않았을 것이라고도 말하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950년 1월 21일, 결국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소련식 체제를 혐오하였다. 소련은 사회주의의 이상을 퇴색시켜 버린 독재 국가에 불과하다고 간주한 것이다. 특히 <동물농장>과 <1984>는 그가 생각하는 소련스탈린주의를 멋드러지게 풍자한 것으로 명성이 높다. <동물농장>과 <1984>, 이 두 걸작품은 이후에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었으며, 특히 <1984>의 빅 브라더는 개인의 모든 정신과 생활까지 체제에 따라 빠짐없이 감시하는 상황을 비유하는 대명사로까지 정착되었다. 나아가 이 소설의 영향으로 소설 속의 오세아니아처럼 정부가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통제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오웰리언(Orwelli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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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1파운드는 2023년 기준 40-50파운드에 맞먹고, 1920년 런던 기준 4파운드(약 1.8kg) 빵 한 덩어리 가격이 약 10-12펜스였으니 당시 기준이나 지금 기준이나 절대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2] 이때 버마어와 힌두어를 익혔으며 능숙한 수준이라 고급버마어를 구사하고 번역도 곧잘 했다고 한다.[3] 서술에 따르면 백계 러시아인으로, 대위로 제대한 귀족 출신이지만 공산주의 혁명에 몸만 빼돌려 파리로 도망쳐 온 신세이다. 그런데 돈 좀 벌기 위해 자칭 볼셰비키 비밀결사 사무실에 찾아가서 돈을 요구하는 추태를 보인다.[4] 친구에게 '뭐든 좋으니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잘 수 있는(...)' 직업 좀 소개해 달라고 사정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에 친구가 심신쇠약 환자를 보조하는 요양 알바를 소개해 주어 다 때려치우고 영국으로 왔다. 그런데 정작 영국에 도착하니 '환자가 자리를 비웠는데 한 달 뒤에 돌아온다더라. 미안하지만 그 때까지만 버텨라'라는 기막힌 소식을 전해듣고 그 기간 동안 노숙 생활을 하게 된다.[5] 한국어 번역본은 여럿 존재하는데, 각기 제목이 달라 통일되어 있지 않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파리와 런던에서의 노숙 생활> 등등.[6] 가난한 인생이다보니 아이러니하게 음식 묘사가 일품이다. 쫄쫄 굶다가 친구인 러시아인 웨이터 보리스가 일하는 호텔에서 훔쳐온 음식을 먹는 묘사나, 오웰의 친구가 굶다가 갑자기 생긴 돈으로 먹는 빵과 포도주의 묘사가 끝내준다. 파리에서는 주로 가난하고 악만 남은 주방에서 일꾼들의 묘사가 (특히 보리스와 주방장간의 실랑이), 일을 잡기 전에 얼마 안되는 돈을 쪼개 버티던 런던에서는 부랑자 생활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7] 특히 런던 시절 부분에서는 아예 한 단락을 당시 영국 부랑자들 사이의 속어 및 표현에 대한 설명을 할애하고 있다.[8] 의사는 운이 참 좋았다고 위로했지만 오웰은 운이 좋았다면 총을 안맞았어야했다고 냉소적으로 회고했다.[9] 사후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공산당은 그를 트로츠키주의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았다.[10] 이런 분위기를 모르고 있던 오웰은 당시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아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와 귓속말로 당장 여기서 떠야 한다고 경고해 준 덕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이후에도 POUM 출신이라는 것 대문에 출국 서류를 발급받던 도중 체포당할 뻔하는 등 귀국 여로가 순탄치 않았다.[11] 실제로 그의 동지들 중 많은 이들이 체포당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오웰의 호텔 방도 급습당해 종군 일기나 편지, 스크랩 자료 등을 전부 강탈당했다. 카탈로니아 전기에 보면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오웰이 "혹시 나에게 편지 보낸 독자들 중에서 답변 못 받은 사람 있으면 미안하다. 당시에 관련 자료를 전부 압수당했다"라고 적어두고 있다.[12] 이때 쓴 칼럼들 대다수는 한글 번역본이 없는 상태. 일부를 모아 번역한 책으로 한빛비즈에서 나온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이 있다.#[13] 동시기에 반전을 명분으로 나치를 두둔하고, 미국의 유럽 참전을 반대했던 찰스 린드버그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14] 주라 섬에서 생산하는 싱글몰트 위스키는 꽤 유명하며 엔트리급 제품인 12년은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주라 섬과 주라 섬의 위스키, 조지 오웰에 관한 얘기가 짤막하게 등장한다. 오웰이 1947년 주라 섬 인근의 바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조난당해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이 소용돌이의 이름이 아드벡의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들어봤을 코리브레칸(Corryvreckan)이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