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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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ME.png 선정 가장 위대한 음악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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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음악 잡지 NME가 2012년 "50 Of The Greatest Producers Ever"를 선정한 순위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조 믹
조지 마틴
퀸시 존스
나일 로저스
필 스펙터
6위
7위
8위
9위
10위
릭 루빈
브라이언 이노
브라이언 윌슨
부치 빅
닥터 드레

[ 11위-50위 펼치기 · 접기 ]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리 스크레치 페리
아리프 말딘
팀버랜드
나이젤 고드리치
티 본 버닛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넵튠스
스티픈 스트리트
토드 런그렌
다니엘 라누아
앤드루 웨더럴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크리스 토마스
베이비페이스
짐 스타인먼
DJ 프리미어
존 레키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테오 마세로
로버트 존 머트 랭
J Dilla
베리 골디
샘 필립스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톰 다우드
지미 로바인
데인저 마우스
비두
제프 린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맥스 마틴
마크 론슨
프린스
트렌트 레즈너
스티비 릴리화이트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트레버 혼
스티브 알비니
지미 밀러
제리 웩슬러
로이 토마스 베이커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RZA
피트 록
조지 클린턴
폴 에버스
DJ Shadow

같이 보기 : NME 선정 500대 명반



조 믹
Joe M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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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로버트 조지 믹
Robert George Meek
출생
1929년 4월 5일
영국 잉글랜드 글로스터셔 주 네웬트
사망
1967년 2월 3일 (향년 37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국적
[[영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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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음반 프로듀서, 음향 엔지니어, 송라이터
장르
익스페리멘털 팝, 스페이스 에이지 팝, 로큰롤
활동
1954년 ~ 1967년

1. 개요
2. 생애
3. 평가



1. 개요[편집]


영국의 음반 프로듀서, 음향 엔지니어, 작곡가.


2. 생애[편집]


1929년 4월 5일, 글로스터셔 주 네웬트에서 태어났다.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했으며, 전자 공학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A] 18세에 공군에 입대했고, 전역 후엔 미들랜즈 일렉트릭시티에서 일했다. 1953년 여름엔 그곳에서 음향 효과 편집본인 첫번째 음반을 만들어냈다.[1]

이후 믹은 음악에 뛰어들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1년엔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한 존 레이턴의 "Johnny Remember Me"를 프로듀싱했고 이듬해엔 영국 최초의 빌보드 1위 곡인 "Telstar"를 작곡 및 프로듀싱했다.[2] 이 곡의 큰 성공으로 그는 아이버 노벨로 어워드를 받았지만 표절로 고소를 당했다. 소송은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론났으나, 그가 죽고 3주 후에야 끝났기에 결국 그는 생전엔 로열티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A]

1964년엔 그가 프로듀싱한 더 허니컴스의 "Have I the Right?"이 핫 100에서 5위까지 올라갔다. 그는 한평생 제대로 음악을 배운 적이 없었으며, 악보를 볼 줄도 모르고 연주할 수 있는 악기도 없었지만 기발한 창의력으로 신선한 히트곡들을 만들어냈다.

이 기간 동안 조 믹은 필 스펙터보다 앞서 [3] 오버더빙, 샘플링 등의 스튜디오 실험을 대중음악 최초로 도입했다. 실제 공연자의 연주를 실황 녹음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악기 소리를 따로 녹음한 뒤 합치고 에코, 리버브 등으로 소리를 왜곡했는데 이는 지금에야 당연한 녹음 기술로 받아들여지지만 당대에는 전례가 없던 혁신이었다. 또한 집에 자체적인 녹음 스튜디오를 차리고 우유를 빨대로 불어 거품 나는 소리, 싱크대에서 물이 빠지는 소리, 전기 회로가 합선되는 소리, 숟가락으로 병을 두들기는 소리 등 다양한 소리를 녹음해 변형, 합성하는 등 구체 음악에 경도되는 모습 또한 보여주였다. 이 홈 스튜디오의 작업물은 1959년 "I Hear a New World"라는 LP로 발매될 예정이었지만 음반사의 재정난으로 취소되었고 1960년 데모용 EP가 99장 풀리는 데 그쳤다. 전체 녹음은 먼 훗날 발굴되어 1991년에 들어서야 공개되었는데 들어보면 1950년대에 녹음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혁신적인 사운드가 돋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불행한 삶을 살았는데, 1963년부터 그의 삶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1963년에 'Cottaging'[4]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게 언론에 보도되면서 협박을 받게 되었다.[B] 또한 당시 영국은 동성애가 불법이었기에 그는 어머니가 자신이 게이인 걸 알게 될까봐 두려워했으며, 동성애자임을 빌미로 곤경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늘 밖을 나갈 때마다 선글라스를 끼고 나갔다.[5] 게다가 생전 조현병[6]양극성 장애[C]를 앓고 있었으며, 1966년엔 바르비투르산 과복용으로 양극성 장애가 악화됐다.[C] 심지어 마피아에게 몇 번 폭행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B]

지속적인 재정 악화로 우울증이 심해졌으며, 결국 1967년 2월 3일에 집주인을 쏴죽이고 자신도 산탄총으로 자살했다.


3. 평가[편집]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프로듀서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A][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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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B C Heather Phares, "Joe Meek: Biography", 올뮤직[1] Wayne Bennett, "Welcome to Meeksville: The Incredible World of Joe Meek.", traxploitation.co.uk, 2019.10.25.[2] 연주는 더 토네이도스 (The Tornadoes)가 맡았다. 이후 이 밴드는 반짝스타로 끝나고 만다.[3] 필 스펙터랑 라이벌 사이였지만, 믹이 공개적으로 스펙터를 표절범이라 비난하는 등 사이가 나빴다. 정작 스펙터도 한창 뒤에 믹처럼 살인 혐의로 몰락했다는게 아이러니.[4] 남성 동성애자가 공중 화장실에서 성관계를 맺을 대상을 찾는 것을 말한다.[B] A B Koos Couvée, "The life and violent death of genius music producer Joe Meek", 「Islington Tribune」, 2017.2.10.[5] "Joe Meek", 위키피디아[6] Manchester Evening News, "Moran's Meek tale set go large", 「Manchester Evening News」, 2005.6.30.[C] A B Manchester Evening News, "Not a meek and mild story...", 「Manchester Evening News」, 2009.6.25.[7] 그의 이름을 딴 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 Rob Hughes, "Brian Eno wins the first Joe Meek award", Audioprointernational.com, 2009.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