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자모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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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자모산성 전투
파일:attachment/jamosansung12.png
자모산성
시기
고종 23년(1236년) 6월 병신일 ~ 7월 정유일[1]
장소
자모산성 (現 평안남도 순천시 자산)
원인
몽골의 3차 침입.
교전국
고려 파일:고려 의장기.svg

지휘관
최경후(崔景侯)
김지저(金之佇)
김경희(金景禧)
지휘관 불명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지휘부 궤멸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자모산성 함락.

1. 개요
2. 설명
3. 기록
4. 기타



1. 개요[편집]


여몽전쟁 시기에 벌어진 전투.


2. 설명[편집]


몽골은 1235년, 남송을 공격하던 차에 1+1의 덤으로 고려침공을 개시한다. 탕우타이(唐兀台)가 이끄는 몽골군은 6월 경인일에 압록강을 건너 영삭진(寧朔鎭) → 가주(嘉州)[2] → 운암역(雲岩驛)[3] → 박주(博州)[4] → 자주[5] 순으로 움직였다.

이에 자주부사 최경후, 판관 김지저, 은주부사 김경희 등이 병력을 자주산성으로 집결시켜 몽고군을 상대로 1달 동안 분전하였으나, 모두 살해당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패배한 것으로 추측된다.


3. 기록[편집]


○병신일. (몽골군이)자주(慈州), 삭주(朔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등지에 진을 둘러쳤다.

- 《고려사》권26 고종 23년 6월 기사

 

○계유일. 몽고 기병 20여기가 자주(慈州) 동쪽 들판에 침입를 베던 농민 20여명을 사로잡아 전부 죽였다.

○정유일. 몽골군이 자주(慈州)를 함락시켰다. 부사(副使) 최경후(崔景侯), 판관(判官) 김지저(金之佇), 은주 부사(殷州副使) 김경희(金景禧) 등이 모두 살해당했다.

- 《고려사》 권26 고종 23년 7월 기사

 

○가을 7월, 몽골병이 자주(慈州)를 함락하였고, 부사(副使) 최경후(崔景侯), 판관(判官) 김지저(金之佇)와 은주 부사(殷州副使) 김경희(金景禧) 등이 모두 피살되었다.

-《동국통감》 권32 고려기

 

○8월, 몽골이 자주(慈州)를 함락시키고, 진군하여 남경(南京)에 이르렀다.

-《동사강목》 제10하 고종 23년 기사.



4. 기타[편집]


6년 전 벌인 전투와 판이한 결과를 낳았는데 당시에는 몽골의 주력군을 상대한 게 아니거니와, 전투 말미에 고려회안공 왕정을 보내 강화조약을 맺었기에 몽골군이 전투를 중단한 상황이였다. 반면, 제2차 자모산성 전투는 몽골의 주력군과 맞서 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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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력으로는 1236년 7월 15일 ~ 1236년 8월 15일[2] 계사일에 점령[3] 을미일에 점령[4] 을미일에 점령[5] 병신일에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