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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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정구용(鄭九鎔)
이명
정구용(鄭龜龍)
생몰
1880년 10월 5일 ~ 1941년 5월 5일
출생지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 대동배리
사망지
경상북도 영일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정구용은 1880년 10월 5일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 대동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제주도로 건너간 뒤 제주 중문면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법정사 주지 김연일과 친분을 맺고 강창규, 강봉환, 문남은, 박주석, 방동화(房東華) 등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 해 10월 3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한 그들은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추대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도외(島外)로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의 이장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동참할 것을 권유해 400여 명을 가세시켰다. 이 격문은 정구용이 작성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조선인이 일본에 침탈당하여 괴로움을 겪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옥황상제 성덕주인(聖德主人)께서 우리 조선인을 구원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각 면 및 이장은 즉시 마을에서 장정을 모아 이달 3일 오전 4시에 하원리에 집결하도록 하고, 4일에는 거사를 일으켜 관리를 체포하고 일본인들을 축출하도록 한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군법에 따라 처벌한다.”


정구용과 동지들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을 절단해 각 주재소를 고립시켰고 중문 주재소를 기습 공격했다. 중문 주재소에 감금됐던 13명의 구금자를 석방하고 식민수탈에 동조했던 일본 상인들을 공격했다. 일부는 주재소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곧바로 출동하면서 이틀 만에 진압되었으며, 정구용은 체포를 피해 각지를 전전했다. 1919년 2월 4일 궐석재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23년 2월 13일 끝내 체포된 정구용은 목포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일군에 소재한 보경사에서 몸을 담았다. 정구용의 손녀로 알려진 대구 향림사 주지 묘혜 스님에 따르면, 그는 형인 정상용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1941년 5월 5일 영일군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정구용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