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석(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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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박명수(朴明洙, 朴命洙)·박처사(朴處士)
법명
태수(泰洙)
출생
1864년 2월 17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현 경상북도 안동시)[1]
사망
1921년 7월 24일 (향년 58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승려,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주석은 1864년 2월 17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외손자 이태수씨의 증언에 따르면, 박주석은 14세 되던 해에 사명대사와 연관이 깊은 금강산의 한 사찰[2]로 스님을 따라 들어가 출가한 후, 그곳에서 불법과 병법을 배웠다고 한다.

금강산 사찰에서 수학하던 1907년, 정미 7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일어나 이에 대한 반발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의병항쟁에 뛰어들어 활동하면서 경상북도 안동과 경상남도 진주 등지에서 박처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하며, 이후 호남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문태수로부터 '태수(泰洙)'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태수씨는 외조부를 1908년 경북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피살되었다는 또다른 독립유공자 박처사(朴處士)와 동일 인물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기도 했지만, 동일인물이라고 단정지을 만한 근거는 부족하다.[3]

어쨌든 박주석은 이후 신분을 숨기고 제주도로 건너왔다고 하며, 전라남도 대정군 좌면 도순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의 법정사에서 수도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더 돈독하게 다졌으며,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연일은 우선 1918년 봄에 강창규·방동화(房東華) 등의 승려를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한 다음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박주석을 비롯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같은 해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립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하였는데, 이 때 박주석은 도대장의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조직 편성 후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법정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의 이장들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박주석 등은 일본 경찰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줄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리 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였으며,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체포되었으며, 1918년 7월 29일 소위 소요 혐의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1921년 7월 24일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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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형인명부에는 전남 제주도 구우면 금악리는 주소지, 전남 진도군 동면 상리는 출생지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전라남도 진도군 동면 상리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던 지명이며, 외손자 이태수씨의 증언에 따르면 본디 안동 사람이라고 한다.#[2] 사명대사와 연관이 깊은 금강산의 사찰로는 서산대사와 도술을 시험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장안사(長安寺),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표훈사(表訓寺), 사명대사가 35살 때 3년간 수도를 했다는 보덕사(普德寺), 사명대사 기적비가 발견된 고성 건봉사(乾鳳寺), 임진왜란 발발 당시 머물러 있었던 유점사(楡岾寺) 등 여러 곳이 있기 때문에, 특정하기 어렵다.[3] 한금순,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 『대각사상』제9집, 대각사상연구원, 30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