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부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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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부가티의 테스트 드라이버, 엔지니어 겸 디자이너.
2. 생애[편집]
쾰른에서 에토레 부가티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에토레 부가티가 새로운 부가티 생산공장을 만들었던 독일의 알자스 근처 도를리샤임으로 이사했다. 부가티 가문의 사람들은 여러 번 이사를 다니다 보니[1] 여러 국가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프랑스에서 그의 이름 지아노베르토는 '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부가티 일가는 잠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살았으며,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9년 독일이 알자스를 프랑스에 양도하면서 부가티 회사는 프랑스 관할로 넘어갔다.
이후 1920년대 후반부터 젊은 장 부가티는 자동차 디자인 능력을 입증하며 회사에서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의 디자인에 에토레 부가티의 설계 역량이 더해지며 부가티가 성장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1932년엔 23세의 나이로 부가티 타입 41 르와이얄의 디자인을 대부분 맡았으며, 1936년 파리 살롱에선 부가티 투어링카 중 최고로 평가받는 부가티 타입 57sc 애틀랜틱을 공개했다. 또한 그는 전륜 솔리드 액슬 구조에서 벗어난 독립 서스펜션 구조, 트윈 캠 엔진을 개발하는 등 엔지니어로서의 면모도 입증하였다.
3. 사망[편집]
테스트 엔지니어로 활동하던 그는 1939년 8월 11일, 1939 르망 24시에서 우승한 부가티 타입 57 '탱크' 레이스카를 타고 프랑스 바-렝의 뒤피그하임이라는 마을에서 테스트 중이었다. 그러던 중 자전거를 피하려다 제어에 실패해 나무에 부딪혔으며, 결국 3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2] 사후 도를리샤임의 부가티 가족 묘소에 안치되었으며, 사고가 난 장소에는 이 사고에 대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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