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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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
이명로(李鳴魯)
자 / 호
도경(道卿) / 학수(鶴叟)
본관
전의 이씨[1]
출생
1852년
경상도 의령현 정곡면 고송동
(現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고송마을)[2]
사망
1916년 6월 19일 (향년 64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1852년 경상도 의령현 정곡면 고송동(現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고송마을)에서 아버지 이기수(李驥洙)와 어머니 양천 허씨[3]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궁류면 다현리로 이주하였다. 『전의이씨성보』에는 그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겸 첨정(僉正)을 지냈다고 하는데, 이를 입증할만한 사료 기록은 없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안동부 안동군진주부 진주군에서의 의병봉기 소식을 듣고 1896년 1월 11일 진주의병진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진주군으로 갔다. 그곳에서 진주의병장 노응규를 만나 노응규로부터 의병진에 가담해줄 것과 군자금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독자적인 의병활동을 위해 우선은 거절하였다.

그후 1896년 2월 15일, 그는 의령현 지역에서 1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의병장에 추대되어 전상무(田相武)와 권은중(權殷中)을 선봉장으로 삼아 경상남도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청로 의병진은 곧 진주부 함안군을 거쳐 2월 21일 창원군에 도착했는데, 이때 창원군수 김철규(金哲奎)로부터 포군(砲軍) 50여 명과 병기, 그리고 군량미를 지원받았다. 그리고 2월 22, 23일에는 김해군에 입성하여 동래부 동래군의 일본인 거류지에 대한 공격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달 26일 일본군 동래지구경비대와의 교전 중 일본군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그가 총상을 입어 이후 어쩔 수 없이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귀향한 이청로는 이후 8도를 다니면서 각지의 뜻 있는 선비들과 일본을 물리칠 것을 토론하는 등 활동하다가 1916년 6월 19일 별세하였다.

200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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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예참공파 28세 로(魯) 항렬.[2] 전의 이씨 집성촌이다. 곽재우 장군은 인근의 세간마을 출신이다.[3] 허보(許俌)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