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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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을규.png

출생
1894년
충청남도 논산시
사망
1972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직업
독립운동가, 감찰위원, 정치인
가족
이정규 (동생)[1]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독립대동단에 가입해 활동하였고 의친왕상하이로 망명시키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의열단에 가담하고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하는 등 계속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감찰위원을 역임하였다.


2. 생애[편집]


충청남도 논산시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직후 전협(全協)·김가진·최익환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과 조선 민족의 대동 단결을 목적으로 서울에서 조직한 독립대동단(獨立大同團)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대동단의 조직이 일본 경찰에 알려져 본부를 중국 상하이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김가진을 먼저 망명시킨 뒤 곧이어 의친왕 이강(李堈)을 수령으로 추대해 상하이로 망명시키려 할 때 이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로부터 송달된 각종 선전물을 배포하면서 민족의식 함양에 힘쓰는 한편, 정남용·이재호(李在浩) 등과 함께 의친왕을 상하이까지 수행하는 임무를 맡아, 그해 11월 9일 서울을 출발해 11월 11일 만주 안둥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탐지하고 추격해 온 일본 경찰에 일행은 검거되고, 자신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가 이듬해 1월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뒤, 상하이로 건너가 의열단(義烈團)에 가담하여 무기 제조 및 무장 훈련에 전념하였다. 1924년에는 이회영·이정규(李丁奎)·유자명 등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간하였으며, 1929년 7월에는 김좌진 등이 주도한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해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31년 상해에서 검거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3년 형을 구형받았고[2], 출옥 후 무정부주의 단체 조직으로 불구속기소 되었고, 이후 상해에 건너갔다가 1936년 다시 송국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해방 후 이승만과 함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고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회 중앙위원을 지내는 등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1946년 독립촉성국민회 노동부장 및 농민부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건국 후 1948년 8월 29일 정인보 감찰위원장 밑에서 박순천 등과 초대 감찰위원을 지내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청남도지역 투표감시반원으로 활동하였다.

휴전 후 1953년 9월 감찰위원에 임명되었고, 1954년 신채호 선생의 유고 편찬을 위한 단재유고출판회 감사로 참여했다. 이후 야당운동에 참여하였고, 1960년 한국사회당 초대 대표로 혁신운동에 뛰어들었다. 1963년 3월 1일 독립운동 업적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72년 6월 11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후 1973년 말년에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집결한 논문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이 발간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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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운동가, 1897 ~ 1984, 아나키스트이며 1963년 부터 1966년 까지 성균관대 총장을 역임하였다.[2] 집행여부에 관한 후속 기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