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난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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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룽
鄭南榕 | Nylon D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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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47년 9월 12일
타이베이시
사망
1989년 4월 7일 (향년 41세)
타이베이시
국적
[[대만|

대만
display: none; display: 대만"
행정구
]]

가족
배우자 예쥐란
딸 정주메이

1. 개요
2. 생애
3. 사후 추모



나는 정난룽이다. 나는 대만의 독립을 주장한다(我叫作鄭南榕. 我主張臺灣獨立!)[1]

-1987년 4월 18일 연설 중에서-



1. 개요[편집]


1947년에 태어난 대만언론인. 타이완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대만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다가 1989년 분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덕분에 오늘날 대만 독립파들에겐 '살아서는 대만인, 죽어서는 대만의 혼(生爲臺灣人 死爲臺灣魂)'이라고 불리며 추앙받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아버지는 중국 본토 푸젠성 푸저우시 출신으로, 부모를 여읜 후 1934년에 13살의 나이로 친척들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했다. 정난룽 본인은 1947년 9월 12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태어났는데 자신이 2.28 사건이 일어난 1947년에 태어난 것에 대해 깊은 생각을 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1968년 국립대만대학에 입학했고 이때 아내인 예쥐란(葉菊蘭)과 만났지만 1971년 쑨원을 국부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해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2] 1972년에 예쥐란과 결혼하고 섬유사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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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아내 예쥐란과 함께

그는 딸 정주메이(鄭竹梅)가 태어난 1980년에 메이리다오 사건의 주동자 야오자원의 아내 저우칭위(周淸玉)를 도우면서 언론의 자유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81년부터 3년간 언론의 자유를 위해 여러 개의 글을 투고했으며 1984년 훗날 총통이 된 천수이볜 등과 함께 <자유시대주간>(自由時代週刊[3])을 창간하면서 대만의 민주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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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이볜(오른쪽)과 함께

1986년 5월 7일 그는 대만민주당의 당원으로 가입하고 5월 19일에 용산사(龍山寺)에서 계엄 해제를 촉구하는 시위를 12시간 동안 벌였는데 이 일로 8달 동안 구금되었다가 다음해 1월에 재판 없이 출소했다. 1987년 2월 28일 2.28 사건 40주기를 맞아 최초의 2.28 사건 관련 단체인 '2.28 평화일 촉진회(二二八和平日促進會)'를 설립했고 같은 해 4월 18일 타이베이 금화중학교(金華國中) 앞에서 벌어진 집회에서 "나는 정난룽이다. 나는 대만의 독립을 주장한다(我叫作鄭南榕 我主張臺灣獨立!)"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타이완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1988년에는 미국과 일본을 둘러보면서 <대만공화국 신헌법 초안>(台灣共和國新憲法草案)을 작성해 자신이 발행한 <자유시대주간>을 통해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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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대주간(自由時代周刊)》 발간판 앞에서

1989년 1월 대만 독립 헌법 작성을 '반역'으로 규정한 정부 당국의 구속 결정이 내려지자 '국민당은 나를 잡아갈 수 없고, 내 시체만을 잡아갈 수 있을 뿐이다!'(國民黨抓不到我的人,只能抓到我的屍體)고 선언했다. 그해 4월 경찰[4]이 그의 사무실을 급습하자 분신 자살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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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5월 19일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부인 예쥐란, 당시 9살이었던 외동딸 정주메이를 포함하여 4만 5천여 명이 모였다. 그의 죽음은 이듬해의 야생백합화 운동을 비롯한 대만 민주화 운동을 한층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사후 추모[편집]


일생 동안 대만의 민주화, 독립에 매진했던 인물이지만 생전에는 외성인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본성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대만 민주, 독립 진영으로부터 배척받기도 했다.[6] 심지어 그의 급진적인 대만 독립 주장도 "민주 진영을 분열시키려는 속셈", "국민당의 첩자"라는 식으로 비난받았다.

그가 사망한 후 민주진보당은 그를 '정신적 당원'으로 인정하여 늦게나마 사과와 경의의 뜻을 표했다. 급진적인 대만 독립론자들에게는 '대만의 혼(臺灣魂)', '건국열사(建國烈士)' 등으로 불리며 대표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민주진보당 집권 직후인 2017년부터는 그의 기일인 4월 7일을 '언론 자유의 날'(言論自由日)로 지정하고 정부 차원에서 매년 추모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민주진보당 소속인 차이잉원 현 총통도 참석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대만 독립진영에 대한 간접적인 지지 의사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아내 예쥐란도 정계에 투신하여 민진당의 입법위원 등을 지냈고 천수이볜 정부 시절에는 행정원 부원장(한국의 부총리격)을 역임했으며 차이잉원의 총통 당선으로 민진당이 재집권하면서 대만관광협회장으로 재직했다. 딸 정주메이는 2010년 결혼했고 국민당 집권 시절인 2014년에는 대학생들의 입법원 점거 시위, 즉 해바라기 운동에 어머니와 동참하는 등 민진당과 대만 독립 관련 활동, 선친의 추모 행사에 모습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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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타이베이 시정부는 1989년 4월 그가 분신 자살한 《자유시대주간》 사무실의 건물에 정난룽 기념관/재단(鄭南榕紀念館/基金會)을 세웠는데 내부에는 정난룽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들, 《자유시대주간》의 역대 표지들과 함께, 분신 자살로 불타 버린 사무실 모습까지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기념관 인근의 도로는 '자유로(自由巷)'로 명명되었다.[7] 위치는 중산중학(中山國中) 지하철역 근처다. 현재 이곳의 일부 전시물을 중정기념당(!!!)에서도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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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음을 들어보면 일반적인 대만어하고도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이름인 鄭南榕을 /deng nam jung/으로 발음하는 것과 主張을 /tsu dien/으로 발음하는 것을 보아 조주화 화자임을 알 수 있다.[2] 교양 필수 과목인 '국부 사상'을 끝까지 이수하지 않았다. 당시의 대만에서는 이런 국가 이념과 관련된 과목이 모든 대학에서 교양 필수로 지정되어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국사, 국민윤리 등이 모든 대학의 교양 필수 과목였던 적이 있었다.[3] 잡지 이름은 수시로 바뀌었다. 국민당 정권에서 정간을 당하면 새로운 이름으로 출간하는 형식이었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시대'라는 명칭은 유지했다.[4] 당시 경찰들을 이끌고 온 사람은 타이베이시 경찰 형사국의 일선 책임자이자 2018년 대만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신베이 시장에 당선된 허우유이다. 이런 악연 때문인지 신베이 시장 선거 운동 기간에 정난룽의 딸 정주메이가 상대 후보였던 민진당 쑤전창의 지지 연설을 했다.[5] 몇 해 뒤 후우의의 아들이 차량 화재로 요절했다.[6] 다만 국공내전 때 건너온 게 아니라 아버지가 대만 반환 전 대만일치시기에 본토에서 건너온 경우라 일반적인 외성인과는 배경이 다소 다르기는 하다.[7] 단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이 명칭이 도로명주소의 길 이름으로 쓰이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