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독립운동가)

덤프버전 : r20210301



1. 대구광역시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호
2. 경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호
3. 포항시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호
4. 단천시 방면 독립운동가, 이상호
5. 평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호
6. 고성군(경상남도)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호
7. 포항시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호



1. 대구광역시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호[편집]


파일:이상호(대구시 독립운동가).jpg
성명
이상호(李相虎)
생몰
1926년 2월 19일 ~ 1945년 12월 9일
출생지
경상북도 대구부 봉산동
사망지
경상북도 대구부
위패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이상호는 1926년 2월 19일 경상북도 대구부 봉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구상업학교에 재학중이던 1945년 5월에 동교생 김상길(金相吉)·서상교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태극단이란 명칭은 한말 이래 사용되어온 태극기를 상징하여 정한 것이며, 동 결사의 약칭으로 T.K.D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그와 동지들은 일본군입대 반대 등 일제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들은 1943년 4월에 김정진(金正鎭)·이준윤(李浚允)·이원현(李元鉉)·윤삼용(尹三龍) 등을 동지로 포섭한 것을 비롯하여 학교단위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동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을 포함하여 전원이 대구시 앞산인 비파산(琵琶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가졌으며, 그와 간부들은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써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育成府) 아래 관방국(官房局)·체육국(體育局)·과학국(科學局) 등 3국을 두고, 그밑에 군사부(軍事部)·항공부(航空部) 등 10여부(部)를 두어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이들을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단장으로 선임되어 동결사를 통솔하며 지도하였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각종 체육회 등을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힘을 쏟았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어느 배반자의 밀고 인해 태극단의 전모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이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5년, 장기 10년형을 언도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45년 12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상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2. 경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호[편집]


파일:이상호(경성군 출신 독립운동가).png
성명
이상호(李相鎬)
생몰
1871년 5월 4일 ~ 1930년 5월 11일
출생지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승암동
사망지
간도 용정촌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이상호는 1871년 5월 4일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승암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 후 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이주, 전재일·윤태선(尹台善) 등 10여 명과 함께 손가락을 자르는 의식을 치르면서 조국 광복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 뒤 결사구국단(決死救國團)을 조직하여 고향을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향리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관여하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 활동하였다. 여기서 내무총장 안창호로부터 함경북도 연통제의 총감(總監)으로 임명받고 귀국, 함경북도 내 10여 개 군을 상대로 비밀리에 연통제 군조직을 완료하였다.

이후 상해임시정부와 함경북도 경성군을 내왕하면서 군·면단위 조직을 완료하고 기밀 문서의 수발, 군자금의 모금 전달, 밀정 파악 보고, 일제 기관의 소재 파악, 헌병·경찰 배치 상황, 독립운동기관 설치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0년 10월 향리에서 연통제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0년 말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중에서도 독립만세를 선도, 독립지사들을 격려, 고무하다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혹독한 고문에 인사불성이 되기도 하였다. 출옥한 1924년부터 1930년까지 일제의 감시 대상이던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를 육성, 발전시키는 데 노력하다가 옥고의 후유증으로 1930년 5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이상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포항시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호[편집]


성명
이상호(李相浩)
생몰
1875년 5월 20일 ~ 1949년 6월 21일
출생지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오덕리
사망지
경상북도 영일군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이상호는 1875년 5월20일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오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용기가 영천에서 일으킨 의병대에 가담해 김석정(金石井)·이경구(李景久)와 함께 예안, 안동 일대의 모병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1907년 입암 전투에서 정용기가 전사하자, 그는 의병을 인솔하여 정용기의 부친 정환직과 합세하여 청송·진보·청하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리고, 소총 80정, 군량미 200석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방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치료받던 중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했고, 이후에는 관동 일대를 전전하며 은거하다가 1949년 6월 21일 고향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이상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4. 단천시 방면 독립운동가, 이상호[편집]


성명
이상호(李相鎬)
생몰
? ~ 1935년 12월 24일
출생지
미상
사망지
함경남도 단천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이상호는 1933년경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최민환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결사 단천농민조합 재건협의회에서 활동하다 1935년 3월 18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동지 10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10월 28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검사의 취조를 받았다. 12월 2일 예심에 회부되어 심문을 받던 중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12월 24일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이상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5. 평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호[편집]


성명
이상호(李相浩)
생몰
1885년 2월 26일 ~ ?
출생지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한촌리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이상호는 1885년 2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한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7월 평산군 마산면 주답리와 적암면 온정리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뒤 1919년 6월 2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8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는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4월 9일 출옥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이상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6. 고성군(경상남도)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호[편집]


성명
이상호(李相浩)
일본식 이름
巴山相浩
생몰
1922년 7월 8일 ~ 2010년 12월 4일
출생지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사망지
경상남도 고성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이상호는 1922년 7월 8일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 시마네현 익전농림학교(益田農林學校)에 재학중이던 1939년 2월에 동향 친구인 이재관(李在官)의 도쿄 소재 하숙집에서 항일결사인 재일학생동지회(在日學生同志會)를 조직하고 항일활동을 폈다. 그후 이들은 동지규합에 힘을 쏟았으며, 1940년 도쿄 상야공원(上野公園)에서 모임을 갖고 부서를 정하였는데 이때 그는 경상도 책임자로 국내에 들어와 고성군 농회 기수(農會 技手)로 재직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1942년 2월 체포되었으며,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고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2010년 12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이상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7. 포항시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호[편집]


파일:이상호(포항시 독립운동가).jpg
성명
이상호(李相浩)
생몰
1881년 12월 2일 ~ 1954년 8월 10일
출생지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유계리
사망지
경상북도 영일군
추서
대통령표창

이상호는 1881년 12월 2일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유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2일 영일군 청하면 덕성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주도한 윤영복(尹永福)·오용간(吳用干)과 함께 덕성리 장터에서 수백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영일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4년 8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이상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