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교

덤프버전 : r20210301



창씨명
大達尙敎[1]
자 / 호
문보(文甫) / 목민(木民)
본관
달성 서씨[2]
출생
1923년[3] 11월 7일
경상북도 대구부 시장정
(現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4]
사망
2018년 3월 13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중앙보훈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부모
아버지 서정조, 어머니 밀양 변씨
자녀
슬하 2남 3녀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편집]


서상교는 1923년 11월 7일 경상북도 대구부 시장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에서 아버지 서정조(徐正朝)와 어머니 밀양 변씨 변시영(卞始榮)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12대손으로, 그의 고조부는 조선 말기 대구 지역의 이름난 유학자였던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이며, 독립유공자 서건수는 그의 종조부[5]이다. 조부 서갑수(徐甲洙)는 1894년(고종 31) 식년시 생원시에 3등 145위로 급제한 바 있으며, 아버지 서정조는 임재 서찬규 종가의 종손이자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 지역의 부호로서, 교남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1924년 고향 인근의 남산정(현 중구 남산동)으로 이주하여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대구공립상업학교 재학 시절에는 덕산정(현 중구 덕산동)에 거주하였다.

그는 대구남산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립상업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던 1942년 5월, 그는 동교생 이상호(李相虎), 김상길(金相吉) 등과 함께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했다. 태극단은 태극기를 본따서 지어진 명칭으로, 약칭으로 t.k.d를 사용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조선인의 일본군 입대 반대 등 일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제작해 배포했고, 1943년 4월에 김정진(金正鎭), 이준윤(李浚允), 이원현(李元鉉), 윤삼용(尹三龍) 등을 동지로 포섭했다.

1943년 5월 9일, 그는 전 단원들을 인솔해 앞산 안일사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가진 후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해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했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뉘었고, 최고의결기관인 간부회의를 구성했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육성부(育成府) 아래 관방국(官房局)·체육국(體育局)·과학국(科學局) 등 3국을 두고, 그밑에 군사부(軍事部)·항공부(航空部) 등 10여부(部)를 두어 체계화했다. 또한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 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이들을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을 뒀다.

서상교는 체육국장의 일을 맡아 단원의 연성활동(鍊成活動)을 지도, 감독했다. 단원들은 용두산, 비파산 등지에서 학술연구토론회, 체육회 등을 개최해 동지간 유대의식과 독립의식 함양 및 체력 증강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군사학에도 힘을 기울여 군사관계서적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를 추진했다.

그러나 1943년 5월 한 배신자의 밀고로 조직의 활동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그는 수업 도중에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대구지방 주재소로 끌려가 친일경찰 김봉생(金鳳生)[6]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44년 1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단기 5년, 장기 7년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2월에 징역 5년형으로 감형되어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가 1945년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다음날인 16일 출옥했다.

파일:서상교(1945년).jpg
1945년 8월 16일 출옥 직후의 모습.

그는 비록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고문후유증으로 추간판 탈출증·심장판막증·폐결핵 등의 병을 얻어 한동안 경상북도 대구시 대명동(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영선못 인근에 살면서 마늘·· 등을 먹으며 요양생활을 해야 했다.

1946년 5월 31일 한국독립당 전임위원을 지내다가 1948년 2월 29일에 탈당했으며, 이후로는 자신의 독립운동 관련 수필집, 회고록을 저술하고 중화민국의 경제학자 마인초(馬寅初)의 저서를 한국어로 번역, 발표하기도 했다. 1954년 경기도 인천시(현 인천광역시)에 있던 모 제철소에 취직하여 근무했으나 이후 공장이 문을 닫아 실직하기도 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고 보훈대상자가 되어 은행에 촉탁(囑託)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정년퇴직할 때까지 일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2018년 3월 13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여담[편집]



[1] 大達(대달)은 '大'邱(대구), '達'城(달성)의 줄임말로 보인다.[2] 현감공 제(濟)파. 달성 서씨 25세 교(敎) 항렬.[3] 달성서씨현감공파보 6권에는 192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4] 동산동 357번지 현 동산아파트 자리에서 태어나 1924년 남산동 407번지로 이주하였다.#[5] 조부 서갑수(徐甲洙)의 동생.[6] 고등계 형사로서 대구상업학교 태극단 사건과 대구사범학교 독서회 사건 등을 취급하여 독립운동가 23명을 고문하여 중형을 받거나 옥사케 하였다. 이 공로로 일제 말 영천경찰서 사법주임에 오르기도 했다. 해방 후 1949년 8월 자신의 앞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도주하였다.# 9월에는 반민특위의 공소시효가 종료되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이후 왜관경찰서장, 1952년 연일군달전면장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