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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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유수포프 공비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Княгиня Ири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Росси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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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Ири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Романова)
출생
1895년 7월 15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테르고프 알렉산드리아 궁전
사망
1970년 2월 26일 (향년 74세)
프랑스 파리
배우자
펠릭스 유수포프 (1914년 결혼 / 1967년 사망)
자녀
이리나
아버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
어머니
러시아의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형제
안드레이, 표도르, 니키타, 드미트리, 로스티슬라프, 바실리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결혼
2.3. 제1차 세계대전
2.5. 망명과 사망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의 고명딸이자, 펠릭스 유수포프의 아내.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조카이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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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1895년 7월 1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7월 24일에 세례를 받았고 대부모는 외삼촌 니콜라이 2세와 외숙모 헤센의 알릭스였다. 아버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니콜라이 1세의 손자고, 어머니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알렉산드르 3세의 장녀로 이리나는 친가와 외가 모두 러시아 황족이었다. 니콜라이 2세의 자녀들인 올가 여대공, 타티아나 여대공과도 친했다고 한다. 다만 이리나는 친가 쪽으로는 차르의 증손녀였기 때문에 여대공(Grand Duchess)이 아닌 공녀(Princess)로 불렸다.

아버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정치적 문제로 어린 시절을 대부분 남프랑스에서 보냈다. 이리나는 프랑스식 이름인 이렌느로 자주 불렸으며, 러시아어보다 프랑스어영어를 더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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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진
이리나를 포함한 자녀를 7명이나 낳았음에도, 알렉산드르 대공크세니야 대공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정부를 두고 맞바람을 피웠다. 다만 아이들에게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숨기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이리나는 나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2.2. 결혼[편집]


1913년, 이리나는 당대 최고 부자 중 한명이었던 펠릭스 유수포프와 혼담이 오갔다. 펠릭스는 양성애자라는 소문도 있었고 여장을 하는 등, 사교계에서 여러 스캔들을 일으켰지만 신앙심이 깊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청년이었다. 결혼 생활에 확신이 없었던 펠릭스는 잠시 망설이기도 하였으나 아름다운 이리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러나 이리나의 부모인 알렉산드르 대공, 크세니야 여대공과 외할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는 결혼을 반대했다. 펠릭스가 이리나의 5촌 당숙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1]과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릭스는 이리나의 가족들을 설득하여 1914년 2월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펠릭스는 재산이 매우 많았지만 통치 가문 출신이 아닌 러시아의 귀족이었기 때문에, 이리나는 황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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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사진

2.3. 제1차 세계대전[편집]


결혼 후 신혼여행을 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펠릭스와 이리나는 독일에 억류당했다. 이리나는 고종사촌이자 독일 제국의 황태자비인 체칠리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빌헬름 2세는 그들이 러시아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펠릭스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중립국인 덴마크핀란드를 통해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에도 외아들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법을 이용하여 펠릭스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리나의 외사촌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은 펠릭스를 비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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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이리나와 함께
결혼한 지 1년이 지난 1915년 3월 21일, 유일한 딸 이리나 펠릭소브나 유수포바가 태어났다. 애칭은 베베(Bebé). 이리나가 자신의 이름을 좋아해서 딸에게도 똑같은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2.4.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처단[편집]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는 니콜라이 2세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제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만연했다. 펠릭스 유수포프와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 역시 라스푸틴이 나라를 파괴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라스푸틴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펠릭스는 라스푸틴의 신뢰를 얻기 위해 라스푸틴을 자주 찾아갔다.

1916년 12월 30일 밤, 펠릭스는 라스푸틴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펠릭스는 아름다운 이리나에게 관심을 보였던 라스푸틴에게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정작 이때 이리나는 집에 없었고 크림 반도에 있었다고 한다. 결국 펠릭스와 드미트리 대공의 계획은 성공했고 그날 밤 라스푸틴은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에 매우 분노한 니콜라이 2세는 펠릭스와 드미트리 대공을 유배보냈다.


2.5. 망명과 사망[편집]


1917년 3월 19일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그의 가족들은 모두 볼셰비키에 체포됐다. 다음 해인 1918년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를 비롯한 여러 러시아 황족들이 처형당했지만 이리나와 펠릭스는 유배중이었기 때문에 처형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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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중의 이리나와 펠릭스
이리나와 펠릭스는 잠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집으로 돌아와 보석들과 렘브란트의 그림을 챙겨 급히 크림 반도로 떠났다. 그리고 몰타영국을 거쳐 파리에 정착했다.

이리나는 파리에서 패션 사업을 벌이고 여러 자선활동을 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다. 결국 딸 이리나는 9살이 될 때까지 친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주로 유모 밑에서 자랐던 이리나와 펠릭스는 딸을 직접 기르는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딸 이리나 유수포바는 아버지와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어머니는 어려워했다고 한다.

이리나와 펠릭스는 행복한 여생을 보냈으며 1967년 펠릭스가 사망했을 때 이리나는 큰 슬픔에 잠겼다. 그리고 3년 뒤인 1970년 2월 26일 프랑스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의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공녀
(Princess Irina Alexandrovna of Russia)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Alexander Mikhailovich of Russia)
러시아의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Nikolaevich of Russia)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2]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
바덴의 체칠리에 공녀
(Princess Cecilie of Baden)
바덴 대공 레오폴트
(Leopold, Grand Duke of Baden)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3]
(Princess Sophie of Sweden)
러시아의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Xenia Alexandrovna of Russia)
알렉산드르 3세
(Alexander III)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Princess Dagmar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3.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이리나 펠릭소브나 셰레메테바 백작부인
(Countess Irina Felixovna Sheremeteva)
1915년 3월 21일
1983년 8월 30일
니콜라이 드미트리비치 셰레메테프 백작
슬하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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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91~1942, 알렉산드르 2세의 6남 파벨 대공(1860~1919)의 장남이다. 파벨 대공의 부인 알렉산드라 대공비(1870~1891)가 황태후의 둘째 오빠 요르요스 1세의 장녀이기 때문에 둘은 6촌이기도 하다. 그리고 요르요스 1세의 부인 올가 왕비도 로마노프 왕가 출신이라 이쪽으로도 친척이 된다.[2]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장녀다.[3]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장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