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나츠 제멜바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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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naz Semmelweis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파일:이그나츠 제멜바이스.jpg

본명
Ignaz Philipp Semmelweis
이그나츠 필리프 제멜바이스[1]
출생
1818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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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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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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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
사망
1865년 8월 13일 (향년 4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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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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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848-1849, 1867-1869).svg.png 헝가리 왕국)
직업
산부인과 의사, 과학자
학력
빈 대학교
부다페스트 대학교
배우자
베이덴호프 마리아(Weidenhofer Mária) (1857년 ~ 1865년)
1. 개요
2. 생애
2.1. 최후
3. 사후 재조명
4. 기타



1. 개요[편집]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는 독일계 헝가리인 의사이자 과학자이다. 감염병을 야기하는 세균의 존재를 인지한 인류 최초의 인물이다.


2. 생애[편집]


부다페스트의 독일계 헝가리인 가정에서 태어난 제멜바이스는 1837년 빈(Wien) 대학에 입학, 처음에는 법학을 전공했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의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빈 병원의 산부인과에서 조수로 일하던 의사 제멜바이스는 당시 산부인과에서 분만을 받은 산모의 사망율이 산파에 의해 분만을 받은 산모의 사망율보다 비상식적으로 높다[2]는 사례를 면밀하게 분석하였고, 산욕열의 발생 원인이 외부의 분해된 동물-유기 물질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가설을 세우고 다양한 질병을 다루는 산부인과의가 분만을 돕기 전에는 반드시 염소 처리된 석회 용액으로 손을 깨끗이 세척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3]

이럴 만했던 것이 그때 의사들은 손이나 수술 도구를 잘 씻지 않았다. 수술실 역시 그 안에서 일하는 외과의사만큼이나 더러웠다. 병원은 소변과 토사물, 여러 체액으로 가득하고 악취가 진동해 감염의 온상이었고, 오직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근원적인 치료만 제공하는 곳이었다. '죽음의 집'이라 불릴 정도였다. 당시엔 집에서 치료받는 게 훨씬 안전했다. 병원의 사망률은 집보다 서너 배씩 높았다.

이 시기 서유럽 의학계에는 미신민간요법의 영향을 받은 원로 의료인들의 파벌을 중심으로 나쁜 공기(miasma)가 질병을 일으킨다거나, 체액의 균형을 맞추면 질병이 낫는다는 식의 아무런 논리도 과학적 증거도 없는 주장들이 난무했다. 실습에 나선 어린 의대생들은 물론이고 곧 은퇴를 앞둔 늙은 베테랑 의사들까지 모두, 조금 전까지 해부실에 있다가 시체를 만졌건 뭐건 그 더러운 손을 맨손 그대로 산모의 질구에 넣고 만져가며 분만을 도왔으며 의복에 묻은 피와 살점을 제대로 닦지도 않았던 야만의 시절이었다.[4] 이중 출산 과정에서 질이 파열된 산모들의 환부가 의사들이 옮겨온 박테리아에게 이상적인 서식처가 됐다. 반면 산파는 출산 전 수술이나 해부를 하지 않았다.

제멜바이스는 해부실에 있다 분만실로 가는 의사들은 산모를 돌보기 전에 소독액을 사용해 손 씻기를 하게 시켰고 했고, 그러자 이듬해인 1848년 의대생 병동의 산모 사망률이 1000건당 12.7건으로 급감했다.#

제멜바이스의 주장은 당시 의학계를 뒤집어 엎는 획기적인 발견이었으며, 매우 적은 비용으로 다수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효율적인 해결법이었다. 비록 제멜바이스의 주장이 후대에서 검증된 실제와는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세균에 대한 지식 자체가 전무하던 시대에[5] '시신이나 환자 등 유기체에서 유발된 어떤 미시적인 입자가 질병을 발생시킬 수 있으며, 이런 소입자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은 단순한 손씻기만으로도 상당수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놀라운 직관과 자신이 수집한 통계 사례를 분석하여 추론해낸 것이다.


2.1. 최후[편집]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천재들 대부분이 그러하였듯 이 발견은 되려 제멜바이스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형선고가 되어버렸다. 제멜바이스는 실증적인 통계를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선 제멜바이스가 '의대생이 산모를 죽여왔다'고 말한 것처럼 받아들였다(실제로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이런 일이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만약 제멜바이스의 주장을 인정하면 의사들의 과실로 산모들이 사망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원로들의 정치력이 워낙에 강세였기에 이러한 관습은 절대적인 진리로 통할 수 밖에 없었고, 기존의 관습과 대치되는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려 하는 의료인들은 제대로 된 연구 지원조차 받을 수가 없었다.[6] 유럽 의료계의 권력층에게 제멜바이스는 '별볼일 없는 헝가리 촌놈 주제에 우리들에게 금은보화를 안겨다 주는 헤게모니아를 붕괴시키려 하는 위험한 불순분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덤으로 비판자들을 맹렬히 비난했고, 손을 씻지 않은 의사들을 "암살자들"이라고 낙인찍는 제멜바이스의 불같은 성격은 안 그래도 불리하던 그의 처지에 기름을 끼얹었다. 제멜바이스가 근무하던 빈 대학 병원의 산부인과 책임자이자 제멜바이스의 상관이었던 요한 클라인은 기존 관행과 전통적 의료 방식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대단한 보수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클라인이 보기에 제멜바이스는 '급진적 이론으로 기존 체계를 완전히 뒤집고 유명해지기 위해 사고를 치고 다니는 풋내기'였고, 이에 둘은 지속적으로 충돌하다[7] 결국 클라인은 제멜바이스의 재계약을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일부 젊은 의사들은 제멜바이스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고, 제멜바이스에게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대조 시험을 엮어 책으로 출간하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멜바이스는 증거를 모으고 책을 통해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려 하기보다는 적극적인 강연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알리려 하였고, 그렇게 조금씩 지지층을 모으려던 참에 갑자기 빈을 떠나 고향인 부다페스트로 돌아가 대학 교수직 및 병원 산부인과 책임자 지위에 올랐다. 이에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를 지지하던 동료들은 그에게 크게 실망했다.

부다페스트에서 재직하던 당시 제멜바이스는 자신의 이론을 강하게 추진하였고 실제로 산모들의 사망률은 낮아졌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강압적 태도를 보인 탓에 병원 직원들과 관계가 멀어졌고 저서 등의 근거 없이 무작정 이론을 설파하기만 한 탓에 지지자의 세를 늘리지 못했다. 결국 1860년 동료들의 강권에 못 이겨 자신의 의견을 담은 책을 서술하긴 했으나, 자신의 주장이 인정받지 못하며 쌓인 울분과 분노가 너무 컸던 탓인지 원체 감정적으로 서술한 탓에 그 결과물은 대동소이한 말의 난잡한 반복이었고 또 자신의 의견보다 기존 의학계에 대한 통렬한 비판[8]과 자신의 견해를 무시하여 산모를 죽게 한 의사들에 대한 세세한 사례가 더 많은 암울한 '묵시록'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멜바이스의 지지자들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비판자들은 저서의 논리적 결함이나 허점, 격앙된 어조를 지지하며 제멜바이스를 궁지에 몰아갔다. 영국의 의사 윌리엄 하비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이론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처세술과 설득을 통해 지지자들을 늘려가고 논리적인 과학적 서술을 담은 저서를 출간하여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모습을 보여 자신의 이론을 주류 이론으로 이끌어 낸 것과 대조되는 부분.[9]

결국 병원에서 해고당한 그는 정신 병동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특히 정신질환이 갈수록 심각해져 그의 말과 행동이 조금씩 균형을 잃기 시작하자[10] 아내랑 그와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이 이를 우려하여 제멜바이스에게 새로운 의료기관을 방문해보자고 설득해 그를 비엔나 정신병원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제멜바이스가 상황을 눈치채고 도망치려 하자 경비원들이 그를 심하게 폭행했다. 그리고는 구속복을 입히고 어두운 방에 그를 가뒀다. 그로부터 2주 후 제멜바이스는 오른손에 난 상처에서 세균이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4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인류가 세균에 저항할 기초를 제시한 위인이 아이러니하게도 세균으로 살해당하고 만 것이다.

3. 사후 재조명[편집]


제멜바이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 10년이 지나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가 세균의 존재를 증명하였으며 이후 산욕열이 세균 감염으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사실이 입증되며 세균과 감염병의 관계가 완벽히 정리되었다.

〈상처는 절대 소독하지 마라〉를 집필하고 이시오카 제1병원 흉터치료센터장을 역임한 나쓰이 마코토는 그의 책에서 제멜바이스가 그토록 당시 학회에서 배척당한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학회 전체가 제멜바이스의 주장에 맹렬하게 반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신들의 학설이 부정당하게 된 의학계의 주류 인사들이 권위를 지키기 위해, 손만 씻으면 산욕열을 박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권력으로 뭉개버린 것이다.


4. 기타[편집]


  • 제멜바이스의 출판물은 〈제멜바이스의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관리되고있다.#
  • 제멜바이스 사후 '시대의 관념과는 정반대의 진실이 제공되었을 때, 이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현상'에 대해 '제멜바이스 반사작용(Semmelweis reflex/effect)'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창안되었다.[11]
  • 헝가리 부다페스트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의과대학이 있다. 한국 학생들이 헝가리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한국에서 의사 국가고시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을 노리고 수능을 우회하기 위해 유학한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알려졌다.韓 의사 국가고시 볼 수 있는 헝가리 의대行 늘어... 편법 비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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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헝가리어 이름은 셈멜베이스 이그나츠 퓔뢰프(Semmelweis Ignác Fülöp).[2] 의대생들이 관리하는 곳에서는 1847년 기준, 산모 1000명당 98.4명의 사망률을 기록했다. 산파들이 돌보는 곳의 사망률은 1000명당 36.2명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이 차이가 남자 의대생들이 산모를 단순히 "더 거칠게" 다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3] Zwei offene Briefe an Dr. J. Spaeth, Professor der Geburtshilfe an der k. k. Josefs-Akademie in Wien, und an Hofrath Dr. F. W. Scanzoni, Professor der Geburtshilfe zu Würzburg ,Semmelweis, Ignác Fülöp https://www.gutenberg.org/ebooks/40261[4] 그러다 보니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를 부검하던 중 메스에 손이 베인 의사가 똑같은 감염에 시달리다 며칠 못 가 사망하는 일도 발생하곤 했다. 제멜바이스는 해당 의사의 시체를 부검한 뒤 죽은 산모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고름과 부패한 피부 조직을 발견하였고 이는 그의 이론을 뒷받침하게 된다.[5] 19세기 중반에는 '독기('장기'라고도 번역)'라는 부식성 물질 입자가 공기 중의 유독한 증기를 타고 전해지면서 질병이 퍼진다고 믿고 있었다.[6] 이 같은 억압의 시대가 탄생시킨 또 다른 이론이 "현 의료체제로는 감염을 피할 수 없으니 병원을 주기적으로 파괴 후 다시 지어야 한다."라고 말했던 제임스 Y. 심슨 같은 부류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양의학이라고 관습적인 경험에 의존했던 당시 동양 의학과 큰 차이가 있었던 건 아니다. 제멜바이스와 존 스노우, 루이 파스퇴르 등이 출현하는 19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대격변한 것이다.[7] 물론 클라인을 위시한 기득권층 의사들의 패악질이 심각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제멜바이스의 태도는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클라인은 제멜바이스 병동의 산욕열 사망률이 낮은 것은 자신이 새로 설치한 환기 장치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8] 저서를 보면 당시 의사들을 학살자 혹은 살인의 방조점으로 규탄하는 수준의 문장이 왕왕 등장한다. 일단 당시 의사들의 위생에 대한 인식은 괴멸적이라 상기한 것처럼 집에서 산파에게 맡겨 분만하는 것보다 병원에서 의사가 맡아 분만하는 것이 사망률이 더 높을 정도였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설득해야 할 입장에서 살인자라고 매도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방법이 아니다.[9] 당시에는 갈레노스의 서술에 따라 혈액이 간과 심장에서 만들어진 뒤 정맥을 통해 온 몸을 느리게 흐르며 영양분을 공급한다는 이론이 주류였는데, 이에 의심을 품은 하비는 해부와 연구를 통해 혈액은 빠르게 이동하며 심장은 혈액이 지속적으로 체내에서 순환할 수 있는 펌프 역할을 해 준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10] 아내와 동료들한테 갑자기 화를 내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일부러 집을 나와 가족들이랑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알코올중독까지 심했다. 또한 이전에는 하지도 않던 사창가에 가서 매춘부와 성관계까지 했다.[11] Mortell, Manfred; Balkhy, Hanan H.; Tannous, Elias B.; Jong, Mei Thiee (July 2013). "Physician 'defiance' towards hand hygiene compliance: Is there a theorypracticeethics gap?". Journal of the Saudi Heart Association. 25 (3): 203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