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각(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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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
李珏


숙헌(叔獻)
본관
함평 이씨[1]
출생
생년 미상
사망
1592년(선조 25년) 음력 5월 12일
경기도 임진강
부모
부친 - 이윤실(李允實)
모친 - 전주 이씨[2]
관직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함평(咸平)[3], 자는 숙헌(叔獻).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약칭은 경상좌병사)로 울산 병영에서 부대를 이끌고 동래성을 지원하러 갔던 무관이다.


2. 생애[편집]


이각은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 행 죽산도호부사(竹山都護府使)를 지낸 아버지 이윤실(李允實)과 어머니 전주 이씨[4] 사이에서 6형제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재직하고 있었다.

왜군의 침입으로 부산진 전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울산군의 좌병영에서 달려왔으나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부산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동래성 전투가 발발하자 먼저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요격하러 간 양산군수 조영규에게 적의 군세가 수만이나 된다는 말을 듣고는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은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즉시 나가서 소산역(蘇山驛)[5]에 진을 쳐야 하겠다고 핑계를 대며 동래도호부사 송상현이 남아서 같이 동래성을 지키자는 간청을 뿌리치고는 빠져 나왔다.[6] 물론 외곽에서 지원은 없었으며 일본군이 몰려오자 그대로 도망쳤다. 동래부순절도의 왼쪽 상단에 말을 타고 도주하는 장수가 바로 이각이다. 동래부순절도 항목 참조.

이후 울산군에 있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으로 돌아왔으나 병영을 방비할 계획은 전혀 세우지 않았고, 그날 밤에 첩을 내보내면서 창고에 간직해 둔 무명 1천 필(疋)을 가져다 주어 함께 싣고 가게 하고, 이튿날 새벽에 자신 또한 도망쳤다. 결국 4월 22일 병영 또한 왜군에 함락되었다. 이윽고 대구도호부 화현내면에 있다가 밀양도호부사 박진이 작원관(鵲院關)에 진을 치고 북상하는 왜군을 막았으나 중과부적으로 4일 만에 패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도주했다.

이렇듯 박홍과는 이후에도 다르게, 싸울 준비를 갖추지 않고 있다가 1만의 병사로 도주하여 '임금을 뵈러 간다'는 핑계로 북쪽으로 계속 도주했다. 그러나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과 마주쳤고, 전투에서 도주한 사실이 들통나 이로 인해 분노한 김명원의 명령으로 참수되었으며, 그의 목은 조리돌려졌다.

경상좌도 병력의 지휘권을 쥔 병사가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그때까지 임지를 지키고 있던 관군 병력과 흩어진 관군과 피난민들을 규합해 결성된 의병들은 통합된 지휘를 받지 못하고 박진이 신임 경상좌병사로 부임하는 1592년 6월까지 각개 전투를 벌였다.

여러모로 당시 조선군 입장에서는 만악의 근원급의 인물이었는데, 이각이 도망치다 병마절도사의 인신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후임 병사 박진은 군사를 수습하고 명령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의심을 받으며 고생해야 했다. 또한 이 사건의 연쇄작용으로 이일 역시 병력을 모아보지도 못하고 상주에서 패배한 뒤 탄금대까지 도망쳐야 했다.


3. 대중매체[편집]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실록에서 등장한다. 단역이긴 하지만 박홍보단 비중이 큰데 송상현을 돕기위해서 동래성에 말을 타고 오는걸로 첫 등장한다. 이때 송상현이 협조를 해달라고 했는데 이각이 이를 거절하며 "좋은 방법이 아니오. 나는 성 밖에서 협공하겠소."라고 말하고는 성 밖에서 진을 친다. 그리고 전쟁이 터지자 마자 이각은 말을 타고 "작전상 후퇴닷."이란 말을 남기고 도주하면서 등장종료.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3 01:32:58에 나무위키 이각(조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함성군파(咸城君派) 15세 玉변 항렬.[2] 이수(李樹)의 딸[3] 함성군파 15세.[4] 이수(李樹)의 딸이다. 이수는 양녕대군의 손자로, 임회수(臨淮守)에 봉해졌다.[5] 지금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마을에 있었다.[6] 사실 제승방략에 병마절도사는 성을 외부에서 지원하게 되어있었다. 한 명의 병사라도 급한 송상현의 요청이지, 작계상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동래성 전투를 보면 애초부터 이길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동래성 보다는 울산지역에서 끝까지 본진을 지킨 병사들과 백성들을 버린 것이 더 욕먹을 일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