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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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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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 비정통 황제
劉顯 | 유현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유(劉)

현(顯)
부친
유씨(劉氏)
생몰
? ~ 352년
재위
351년 7월 ~ 352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유현(劉顯, ?~352)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후조의 군인으로 양(襄) 지역에서 황제를 자칭했다.


2. 생애[편집]


351년, 후조의 제7대 황제인 석지는 유현에게 70,000명의 병력을 주어 염위의 수도인 업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했고, 유현은 업성에서 23리 떨어진 명광궁(明光宫)에 주둔했다. 이후 염위의 황제 염민이 유현의 후조군을 대파하고 양평(陽平)까지 쫒아와 그곳에 있었던 30,000명을 참살했다. 염민의 군사력을 두려워한 유현은 염민에게 항복했고, 염민은 유현에게 석지를 죽이라고 한 후 철수했다.

이후 후조로 돌아온 유현은 황제 석지와 승상 석병(石炳), 기타 신하등 10여 명을 죽이고 석지의 머리를 염민에게 전달했다. 염민은 석지의 머리를 불태웠으며 유현에게 대장군(大将军), 대선우(大单于), 기주목(冀州牧)의 직위를 하사했다.

그러나 유현은 351년 7월 염위의 영토가 된 업성을 공격하여 염민에게 대항했는데 패배한 후 양으로 돌아가 칭제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352년 유현이 상산(常山)으로 진격하자 염민과 그의 태자 염지, 태자를 보좌하던 대장군 장간(蔣幹)이 업성을 수비함과 동시에 8,000명의 기병을 거느리며 친정했다. 동시에 유현의 대사마 왕녕(王寧)이 유현을 배반하고 염위에 투항했으며, 염민이 유현을 격파하고 양에 도달하자 유현의 대장군 조복구(曹伏驹)가 성문을 열고 염민을 환영했다. 이후 입성한 염민은 유현의 고위직 신하들을 처형하고, 양의 백성들을 업성으로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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