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점술가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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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 경위
3. 재판 결과
4. 피해자 후지타 코토토메
5. 의문점
6. 기타



1. 개요[편집]


藤田小女姫殺害事件[1]

1994년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발생한 일본인 살인사건.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진 뒤 일본 국내에서 큰 화제가 되었으며, 후술될 여러 석연치 않은 점들로 인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는 사건이다.


2. 사건 경위[편집]


1994년 2월 23일 오후 5시경 호놀룰루 카카아코의 고층 아파트[2]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 자체는 곧바로 출동한 소방대원에 의해 조기에 진화되었으나, 옷장 안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사망자는 후지타 코토토메(藤田小女姫, 당시 56세)라는 여성으로, 한때 일본에서 유명한 점술가였다.[3]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후지타의 시신이 발견된 현장에서 수 km 떨어진 호텔 주차장에서 갑자기 차량 화재가 발생, 불에 탄 차량 안에서는 양 손과 발이 결박된 채 가슴에 총상을 입은 상태의 남성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남성의 신원은 당시 하와이 대학교에 재학중이던 후지타의 외아들 고로(吾郎, 당시 20세)로 밝혀졌다.

사망한 후지타 모자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사건 발생 1시간 전 후지타가 생전에 거래하던 은행에 전화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전화 응대를 했던 은행 직원에 따르면 후지타가 전화로 대출 관련 상담을 했는데, 이 때 그녀의 목소리가 뭔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음색[4]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이상하게 여긴 직원이 일본 영사관에 신고, 영사관 직원이 후지타의 아파트로 갔을 때는 이미 화재가 발생한 시점이었다고 한다. 또한 후지타가 생전에 아들 고로에게 자신 명의의 신용카드를 줘서 사용하게 했는데, 고로가 이 카드를 친구들에게 빌려주는 일이 종종 있어 어머니와 충돌이 잦았던 점 때문에 당초에는 고로도 용의자로 의심받은 시기가 잠시 있었다.
그러던 중, 평소 고로와 함께 스쿠버다이빙을 하던 지인 후쿠사쿠 라이타(福迫雷太, 사건 당시 28세)가 유력 용의자로 떠올랐다. 후쿠사쿠가 과거 총기 불법소지로 적발된 전력이 있었고, 후지타 모자의 시신에서 총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건 현장 인근에 위치한 후쿠사쿠의 자택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실탄이 발견되었고, 자택 소파에서 검출된 혈흔의 DNA가 고로의 것과 일치했다. 여기에 더해 후쿠사쿠가 전당포에 고로가 소지하고 있던 귀금속을 맡기고 2000달러를 빌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하와이 주경찰은 후쿠사쿠를 후지타 모자 살해범으로 단정하였고, 인터폴을 통해 일본 경시청에 후쿠사쿠의 신병 확보를 요청했다.

한편 후쿠사쿠 라이타는 사건 2일 후인 2월 25일에 일본으로 귀국, 3월 4일 카나가와현경에 자진 출두했으나 후지타 모자 살해에 관해서는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2개월이 지난 4월 3일 미국에서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고, 5월 11일 미국 측에서 범죄인 인도 조약에 따라 법무성에 후쿠사쿠의 송환을 청구하여 후쿠사쿠는 8월 16일에 하와이로 송환되었다.


3. 재판 결과[편집]


1995년 2월에 시작된 재판에서 후쿠사쿠는 자신은 단지 시신 운반을 돕기만 했을 뿐 살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혈흔 감정 결과를 근거로 기소된 상태였고 동년 5월 22일 호놀룰루 순회법원은 후쿠사쿠를 후지타 모자 살해사건의 실행범으로 인정, 2급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하여 그대로 형이 확정되었다.

하와이주는 사형 제도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의 법정 최고형이 선고된 셈이며, 30년 복역시 가석방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2017년 이후 후쿠사쿠는 형무소 안에서 갑자기 쓰러졌다가 암 선고를 받아 절제 수술을 수 차례 반복하면서[5]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 되었고, 2020년 2월에는 이 사건을 오랫동안 취재했던 TV 아사히의 취재팀 앞으로 "얼마 못 가 죽는다 생각하니 너무나 불안하다", "(자신이 죽으면)캘리포니아 바다에 뼛가루를 뿌려 달라"는 내용의 흡사 유서를 방불케 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4. 피해자 후지타 코토토메[편집]


후지타 코토토메는 1938년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출생으로 본명은 후지타 토아코(藤田東亞子).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하면서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고,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으로 집을 잃고 지인을 의지해 각지를 전전하며 살아 왔다. 그녀의 남동생 후지타 요조[6]에 따르면 후지타의 가정 사정에는 매우 복잡하고 어두운 이면이 있었다고 한다. 남매의 호적상 조부는 야하타 제철소 전용 위안소, 즉 유곽을 운영했고, 호적상 부친은 조모가 강간당해 낳은 아이로, 이 때문인지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하며 성장했다. 게다가 성장한 후에는 대학생들을 속여 그들과 교제중이던 여자들을 유곽에 팔아넘기는가 하면 광산 노동자들에게 매춘을 알선하기도 하고, 인신매매를 생업으로 삼기도 했다. 유괴납치 등으로 어린아이들을 모아 팔아넘기는가 하면, 이렇게 데려온 아이를 입양해 놓고는 제대로 양육도 하지 않고 친부모에게 양육비를 청구하여[7] 그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돈벌이를 위해 다른 집으로 입양보낼 때는 무적자로서 받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호적에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후지타 남매는 이런 식으로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빚의 담보로 이들에게 넘겨졌다는 것이다.

9세 때 하와이의 여우가 빙의하면서 영감을 얻었다고 주장, 초등학교 6학년 재학중이던 1949년 지역 신문에 '기적의 소녀 나타나다(奇跡の少女現る)'라는 제하에 처음 다루어졌고 이듬해인 1950년 산케이신문 5월 1일자 사회면 톱에서도 '공놀이를 하면서 무엇이든 적중(マリを突きながら何でもズバリ)'이라는 제하의 특집 기사로 영험한 점술 소녀로 다루어졌다.[8] 이 기사가 나간 뒤 당시 산케이신문 사장 마에다 히사키치가 본사 사옥에 제공한 사무실에서 본격적으로 점술가 활동을 시작, 마에다의 후임으로 사장 자리에 오른 미즈노 시게오는 코토토메에게 신문의 운세 코너 연재를 맡기기까지 했다.[9]

이후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경까지 영험한 점술가로 각종 미디어에서 소개되어 유명세를 탔다. 게다가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마쓰시타 고노스케, 오사노 겐지[10] 같은 정재계의 내로라하는 거물들도 후지타의 주요 고객이었으며,[11] 이외에도 당시 친왕이었던 아키히토 상황의 결혼과 한국의 10.26 사건,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의 사망 등 국내외의 굵직한 사건을 예언하여 적중했다고도 전한다. 또한 유명 야구선수 왕정치가 학생이었을 때 "앞으로 야구로 크게 성공할 것이다"라고 예언한 일화도 유명하다.

이렇듯 정재계 거물들의 신임을 받고 유명세를 떨치던 만큼 그녀는 어마어마한 재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창 잘 나가던 시기 후지타의 재산은 자그마치 수억 엔에 달했고, 여성이 운전면허를 따는 일이 흔치 않았던 1964년 당시 자동차를 무려 5대나 소유했으며 본인 소유의 소형 비행기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61년에 결혼했던 남편과 불과 3년만에 이혼한 이후로는 점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8년 3월 자신이 경영하던[12] 사우나에서 화재로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는 참사가 터졌고, 이 화재로 인해 1974년 형사재판에서 업무상 실화 및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이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그 동안 후지타를 영험한 점술가로 치켜세우기 급급했던 언론의 태도도 바뀌어서, 그녀의 능력에 대해 의문과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기에 이르렀고 결국 그녀를 지지하던 유력자들도 점차 관계를 끊고 떠나가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후지타는 1970년대에 하와이로 이주하면서 사실상 점술가로서는 은퇴했다.[13] 이후에도 계속 하와이에서 거주, 점술가 시절의 인맥과 경험을 살려 기업 컨설턴트로 전업[14]하여 일본과 하와이를 오가며 생활하다 살해당하게 되었다.

한편 후지타의 집에서 일했던 가사도우미의 증언에 따르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후지타가 모친[15]을 하와이로 데려와 살게 했는데, 종종 모친을 만나러 가서 폭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단순한 모녀지간의 감정 싸움 정도가 아니라 일본 본국에서는 언론을 의식해서 그간의 한을 풀 길이 없었던 후지타가 언론의 눈길이 닿지 않는 하와이에서 모친을 학대한 것으로 추정되며, 학대를 당한 모친은 오히려 딸에게 구타를 당하면서 마음이 진정된 것 같다는 취지의 발언까지 나왔다고 한다.

5. 의문점[편집]


후쿠사쿠 라이타가 범인으로 확정된 후에도 사건에는 여러 가지로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많아서 2023년 현재까지도 과연 후쿠사쿠가 진범 내지는 실행범이 맞는지, 사건의 배후 세력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피해자 후지타가 사건 발생 전 신주쿠의 한 대부업체에 1억 5천만엔의 대출을 신청했을 당시의 담당자가 후쿠사쿠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출 직후 후지타로부터 갑자기 대출금을 분실했다는 뭔가 이상한 연락이 오는가 하면, 후지타에게 대출을 해 준 대부업체 사장이 후지타 모자 살해사건으로부터 2개월 후 자택 앞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등[16] 수상한 정황이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게다가 후지타의 시신에는 발견 당시 전신에 구타당한 듯한 흔적이 있었고, 사진을 본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수의 인물에게 폭행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사건 당시 흉기로 사용된 권총도 현지 법규상 원칙적으로 외국인 여행객은 총기를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과연 이 사건을 후쿠사쿠의 단독범행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후지타는 전술되었듯 정재계 유력 인사들과 접점이 크게 있었고, 왕세자비 시절의 마사코 황후에 대해 '왕세자비는 되더라도 황후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언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17] 게다가 후지타는 생전에 정재계의 여러 에피소드를 기록해 둔 노트, 일명 '블랙 북'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사건 현장에서 이 노트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문제의 노트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또한 이 '블랙 북'에는 정재계 관련 사실들만이 아니라, 점술가 시절 정재계 인사들을 통해 뒷세계 쪽의 인사들과도 연줄이 있었기 때문에 이 쪽 관련 '고객 정보'와 비밀도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점들을 근거로 후지타 모자 살해사건의 배후에 정재계의 거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온 것. 특히 후쿠사쿠가 재판 당시 법정에서 했던 "이 재판에 압력을 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아무런 할 말도 없습니다. 제 가족만은 건드리지 마십시오."라는 의미심장한 증언이 배후설에 힘이 실리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보통 살인사건 피해자의 유가족들은 범인의 엄중한 처벌을 원하는 경우가 절대 다수인데, 후지타의 남동생 후지타 요조는 후쿠사쿠에 대한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범인이 여러 명이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후쿠사쿠의 석방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실제로 일본의 법의학자들 사이에서도 전술된 바와 같이 후지타의 시신에 구타당한 흔적이 있었다는 점과, 아들 고로도 마찬가지로 손발이 묶인 흔적과 안면부에 멍이 들어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단독 범행이라고 하기에는 부자연스러운 점이 많은데다 피해자들에게 가한 행위도 불필요한 것들이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의견이 나왔다.

여기에 더해 후지타와 마지막으로 전화 통화를 했던 은행 직원은 수화기 너머 후지타의 옆에 일본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취지의 증언을 했다. 고로와 후쿠사쿠는 모두 일본어가 유창했기 때문에, 만약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사건 당시 후지타의 자택에는 제 3의 인물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6. 기타[편집]


  • 후지타 코토토메의 남동생 후지타 요조는 2004년 누나의 일생을 다룬 책 <토아코와 요조·후지타 코토토메의 진실(東亜子と洋三・藤田小女姫の真実)>을 출간했다.
  • 니혼 테레비 'The! 세계 교텐뉴스' 2016년 4월 13일 방영분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방송에서 MC 쇼후쿠테 츠루베나카이 마사히로가 사건 현장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 그 동안 아들의 무죄를 믿었던 후쿠사쿠의 부친은 2000년에 세상을 떠났고, 한 방송 인터뷰에서 그저 아들이 무사하기를 비는 수밖에 없다고 한탄하던 모친도 2020년 시점에서는 89세의 고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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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지타 코토토메 살해 사건[2] 정확히는 콘도미니엄[3] 다만 후술하듯 이 시점에서는 점술가로는 사실상 은퇴한 상태였다.[4] 전화 너머로 굉장히 다급하게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5] 위의 약 85%를 절제했으며 암이 전이된 대장과 소장도 상당 부분을 절제했다고 한다.[6] 5세 아래의 남동생으로, 철이 들기도 전에 누나와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누나가 사망한 후에야 생물학적 남매 관계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7] 말이 좋아서 청구지 실제로는 갈취였다.[8] 당시에는 '코토도메(ことど姫)'라는 이름을 사용했다.[9] 이 때 후지타가 산케이신문의 한자 産経를 가타가나 'サンケイ'로 고치는 것이 좋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하자 미즈노 사장이 주저없이 후지타의 말을 따랐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도 통용되는 산케이신문의 로고 표기 중 가타가나 표기가 바로 이것.[10] 일본의 기업가. 록히드 사건 당시 관련자로 그 유명한 '그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11] 기시 노부스케와 관해서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기시가 미일안보신조약 문제로 후지타에게 점을 쳐 달라고 부탁했더니, 후지타는 "반드시 밀어 붙이십시오. 꼭 통할 겁니다. 그 대신 총리님의 내각은 오래 가지 못 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후 1960년 6월 19일에 조약이 체결되기는 했으나, 조약 체결 4일 후 기시 내각은 총사퇴했다. 이 내각 총사퇴와 미일안보신조약 체결 과정에 관한 자세한 경위는 기시 노부스케 참조. 이 일화는 정치평론가 호소카와 류겐의 저서에서 언급되어 있다.[12] 직접 경영한 것은 아니고 명목상 경영자로 되어 있었다.[13] 완전히 점술을 접은 것은 아니어서 80년대에도 간간히 예언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전성기에 비해서는 비교적 뜸해졌다.[14] 컨설턴트 활동 자체는 이혼 후부터 겸업하기 시작했다가 198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컨설턴트 일을 병행하게 된다.[15] 호적상 모친. 생물학적 친모는 아니다.[16] 공교롭게도 후지타 모자와 똑같이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17] 물론 이 예언은 빗나갔다. 마사코는 비록 왕세자비 시절 궁내청으로부터 노골적인 견제와 괴롭힘을 당하기는 했지만 나루히토 왕세자가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황후가 되었고, 궁내청과 극우 세력의 갖은 음해에도 불구하고 딸 아이코 공주를 훌륭한 재원으로 키워낸 역량과 황후 본인의 좋은 성품이 알려지고 난 후에는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