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깁스 매커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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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46대 재무장관
윌리엄 깁스 매커두 주니어
William Gibbs McAdoo Jr.


파일:William_Gibbs_McAdoo,_formal_photo_portrait,_1914.jpg

출생
1863년 10월 31일
아메리카 연합국 조지아 주 마리에타
사망
1941년 2월 1일 (향년 77세)
미국 워싱턴 D.C.
국적
파일:아메리카 연합국 국기(1865).svg
아메리카 연합국 (1863~1865)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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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1865~1941)
재임 기간
제46대 재무장관
1913년 3월 6일 ~ 1918년 12월 15일
묘지
알링턴 국립묘지
배우자
세라 헤이즐허스트 플레밍 (1885년 결혼, 1912년 사별)
엘레노어 랜돌프 윌슨 (1914년 결혼, 1934년 이혼)
도리스 크로스 (1935년 결혼, 1941년 사별)
학력
테네시 대학교 (B.A.)
정당


의원 선수
1 (상원)
의원 대수
73, 74, 75 (상원)
지역구
캘리포니아 클래스 3
경력
민주당 전국대회 부의장 (1912)
제46대 재무장관 (1913~1918)
초대 철도청장 (1917~1919)
1920년 대선 민주당 경선 후보
1924년 대선 민주당 경선 후보
연방 상원의원 (캘리포니아 / 1933~1938)
1. 개요
2. 생애
2.1. 사업가 시절
2.2. 윌슨의 재무장관
2.3. 거듭된 대권 실패
2.4. 말년
3. 성향
4. 선거 이력
5.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인. 미국의 진보주의를 상징하는 정치가 중 하나로, 우드로 윌슨의 사위이자 윌슨 행정부의 재무장관이었다. 1924년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주자였으나 실제 출마하지는 못했다.

윌리엄 깁스 맥아두라고도 하지만 실제 발음은 /ˈmækəˌduː/로 매커두에 가깝다.

2. 생애[편집]



2.1. 사업가 시절[편집]


변호사 아버지와 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조지아 주에서 태어났으며, 삼촌은 남부맹방의 장군이었다. 어릴 때 테네시주로 이사를 가 그곳에서 대학교까지 나왔다. 테네시 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되었는데, 지역 전기 회사에 투자를 잘못해서 전재산을 날리고 1892년 뉴욕으로 이사해 새출발을 했다. 뉴욕에서 투자증권 회사를 세우고 고향에서 전차 회사 투자도 해봤는데 잘 되지 않아 고향을 완전히 떠나 뉴욕과 뉴저지에 눌러 앉았다. 그곳에서 매커두는 뉴욕 지하철 건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민주당의 정계 영입 제의를 받아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부위원장을 지내게 된다.


2.2. 윌슨의 재무장관[편집]


그는 뉴저지에서 철도 사업을 하면서 뉴저지 주지사 우드로 윌슨과 아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 인연으로 1910년에는 사업을 접고 윌슨의 대통령 후보 캠페인을 지원하였다. 1912년 아내가 죽자 윌슨의 딸과 교제를 시작해 연인 관계가 되기도 하는 등 윌슨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1912년, 공화당의 분열로 윌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는 재무장관 직에 임명되어 벼락출세를 하게 되며, 2년 뒤에는 윌슨의 딸과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매커두는 윌슨의 중요한 경제 정책에 있어 실무를 맡으며 이름을 알렸다. 1913년, 연방준비제도가 윌슨 대통령에 의해 설립되었고 매커두는 연준을 중앙은행으로 전환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매커두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들이 미국 투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매커두는 이것이 급격한 자본 이탈로 경제 공황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 적극적으로 나서 4개월동안 뉴욕증권거래소의 문을 닫게 하였다. 유럽의 자본가들은 미국의 금융 시장이 문을 닫자 채무를 발행했고, 미국으로부터 전쟁 물자를 사들였다. 그 결과 1차 대전이 장기화될수록 유럽은 가난해진 반면 미국은 전쟁 특수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매커두의 발빠른 조치가 미국과 영국/프랑스간의 격차를 크게 벌려 미국이 1차 대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매커두를 고평하기도 한다.


2.3. 거듭된 대권 실패[편집]


이 외에도 윌슨 대통령이 철도청을 설립하자 자신의 사업가 시절 경력을 살려 미국 초대 철도청장으로 재임하는 등,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위급한 시기에 유능한 행정 능력을 보여주었고, 자연스럽게 윌슨의 후계자로 부각되었다.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매커두는 유력한 프론트러너였다. 실제로 대통령을 결정하는 전당대회의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커두의 출마는 윌슨의 3선으로 여겨질 위험이 있었으며, 우드로 윌슨은 한술 더떠 민주당이 자신을 다시 대선후보로 지명해주길 기대하며(...) 매커두의 입후보를 방해했다. 결국 매커두가 압도적인 표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계속 계속 재투표를 하는데도 후보가 지명되지 않는 막장 사태가 일어났다. 44번의 투표 끝에, 3위 후보자였던 미첼 파머(A. Mitchell Palmer) 법무장관이 2위 후보자였던 제임스 M. 콕스(James M. Cox) 오하이오 주지사를 지지하면서 콕스가 대의원단의 2/3 득표를 획득, 대선 후보로 확정된다.

하지만 제임스 콕스가 본선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하며 1924년에는 매커두에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1924년 대선에서 매커두의 가장 강력한 상대는 앨 스미스 뉴욕 주지사였다. 매커두는 남부와 농촌, 금주법 찬성파의 지지를 받았고, 스미스는 반대로 북부와 도시, 금주법 반대파의 지지를 받았다. 두 후보의 경쟁은 너무 치열해서 101번이나 재투표를 했는데도 결정이 나지 않았다! 결국 양쪽 후보자들은 이대로라면 한평생 투표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절충 후보인 존 W. 데이비스(John W. Davis) 전 주영대사를 후보로 뽑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103차 투표에서 데이비스가 후보로 결정되며 매커두의 대권 가도는 1924년에도 좌절된다.

1928년 대선 때에는 앨 스미스에게 사실상 대권을 양보한다. 이 당시에는 쿨리지 대통령의 지지율이 너무 높아서 매커두가 출마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매커두의 예상대로 스미스는 후버에게 대참패한다. 하지만 매커두 역시 늙어가고 있었고 이는 점차 프론트러너로서의 매력이 떨어짐을 의미했다. 1932년 대선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급격하게 치고 올라오자, 매커두는 루스벨트의 인기에 대응할 수 없었다. 매커두는 부랴부랴 존 낸스 가너를 지지하고 앨 스미스와도 손을 잡으면서 반 루스벨트 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앨 스미스와 달리 매커두는 루스벨트에 비교적 유화적인 편이었기 때문에 막판에는 존 낸스 가너와 함께 루스벨트를 지지하면서 루스벨트가 대의원의 2/3을 획득, 대선 후보가 될 수 있도록 했다. 루스벨트의 러닝메이트 후보로 고려되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가너가 부통령 후보가 된다.


2.4. 말년[편집]


비록 소망하던 대통령은 되지 못했지만, 대신 루스벨트의 지지를 업고 캘리포니아의 상원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고 6년동안 재직하였다. 그러나 193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루스벨트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더욱 진보적이었던 셰리던 다우니(Sheridan Downey)에게 경선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정계를 은퇴한다.[2] 정계를 은퇴한지 3년만에 워싱턴 D.C.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3. 성향[편집]


우드로 윌슨과 함께 진보주의 성향으로 분류되었고 클레이튼 독점방지법을 지지하고 연방준비제도 설립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경제 문제에 정부의 개입을 중시하는 등 진보적인 경제관을 드러냈다. 또한 1924년 대선을 앞두고 아동 노동 반대, 8시간 노동제 지지 등의 공약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앨 스미스와 달리 뉴딜정책을 지지했다.

반면, 사회적으로는 인종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쿠 클럭스 클랜의 지지를 받았으며, 존 낸스 가너를 대선 후보로 지지하고, 금주법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사회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32
연방 상원의원 선거
캘리포니아


943,164 (43.39%)
당선 (1위)
초선

5. 여담[편집]


  • 우드로 윌슨과 마찬가지로 매커두도 극렬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는 진보주의 성향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짐 크로우법의 지속을 지지하였으며 경제적 효율성을 위해서라도 인종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에는 대선 캠페인을 위해 KKK단의 지원을 받아들이기도 하는 등, 윌슨에 못지 않은 신념적 인종주의를 견지하였다.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일이 잘 풀린 모양인지 1920년 대선에서 당선되었으며 24년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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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커두 의원 사직으로 공석이 된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 자리를 채우기 위해 주지사에 의해 임명됨.[2] 정작 셰리던 다우니는 임기 시작된지 얼마 안 되어서 석유회사의 로비로 보수주의 민주당원으로 변절한다.